[3.1운동 100주년] 경주독립운동사적지 및 기념비 ① 우편(세금)마차 습격 의거지
[3.1운동 100주년] 경주독립운동사적지 및 기념비 ① 우편(세금)마차 습격 의거지
  • 김종득 기자
  • 승인 2019.02.18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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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광복회 서악동 소티고개 효현교 일대
독립기념관이 2009년 학술조사 용역을 실시한뒤 대구경북 독립운동 사적지로 지정한 경북우편마차 습격의거지.
독립기념관이 2009년 학술조사 용역을 실시한뒤 대구경북 독립운동 사적지로 지정한 경북우편마차 습격의거지.

1915년 12월24일, 당시 경주군에서 발생한 세금을 운반하던 우편마차를 습격한 사건은 극적인 요소가 너무나 많은 사건이었다.
성탄절 전날이라는 시간배경, 일제 마부가 규정을 어기도록 출발전날 미리 마부의 집으로 찾아가 대구에 있는 의사를 만나러 간다고 꾸며 세금마차에 동승할 구실을 마련한 것이나, 마차가 이동하는 다리를 사전에 파손한 점등은 잘짜여진 한편의 영화보다 더욱 극적이다.
무장항일투쟁 기금, 즉 독립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독립운동가들의 탁월한 지략, 대범함이 민족독립을 향한 뜨거운 의지와 한데 어우러져 이같은 의거를 일으켰을 것이다. 

일제 무장통치가 기승을 부리던 1915년 12월24일 새벽, 경주군 광명리 소태(소티고개) 아래 효현교. 경주에서 대구로 가는 길목.
경주·영일·영덕등지에서 거둔 세금을 대구로 수송하던 우편마차가 12월24일 새벽 괴한들에게 털리는 사고가 발생한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1915년 12월26일자 신문은 3면에 머릿기사로 성탄제 밤의 좀, 현 천주교당 사진을 크게 싣고, 두 교회의 성탄행사를 전한 뒤 곧바로 관금 8700억원 탈취 사건을 비중있게 보도했다. 그만큼 충격이 컸던 사건이었다.

<경주 아화간에서 官金逢賊(관금봉적), 8천7백원 분실, 도적은 조선사람>이라는 제목을 단 총독부 기관지는 당시 사건을 이렇게 기록했다. (기사는 가급적 원문을 현대적 표현으로 하되 일부는 의역했다./편집자)

1915년 12월26일자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3면에 관금탈취 사건을 보도한 모습.
1915년 12월26일자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3면에 관금탈취 사건을 보도한 모습.

 

24일 오전 인시(새벽 3~5시/편집자) 사십분에 경주를 출발하야 대구로 배송될 관금 팔천질백원이 행낭이 경주아화간에서 분실된 대사건이 있더라.
이 우편마차는 대구부대야봉차량의 맛혀서 운반하는 자로 *일에 신용있는 일인 마차부를 사용하는터인데 당일도 왕갓치(전처럼/편집자) 새벽에 일즉이 그 배송금을 실고 경주를 출발햐엿더라.
그때에 한 조선사람 승객이 있어서 그 행랑옆에 앉혀 있었으나 수상한자인줄은 생각지도 안니 하였고, 새벽바람이 몹시 추운지라 마차의 이자도 외투속에 묻혀서 아화방향으로 진행하는데 그때는 마침 *** 적지 않아 아직 닭우는 소리도 들리지 아니하고 찬바람만 말굽소리와 같이 들리더라.
이때에 별안간 뒤편에서 덜생**하는 소리가 들리는고로, 고개를 몰니여 보니 뒤편의 마차문이 열려 있음으로 이상히 여겨 자세히 본즉 같이 오 던 사람이 간곳도 없는 지라. 놀래여 급히 우편행낭을 검사해 본즉, 날카로운 칼끝으로 관금행낭을 내리째여 놓았고. 행랑속에 있는 관금은 간곳이 없더라. 이자는 깜짝 놀래어 잠시는 어찌 할줄 몰랐으나 아무리 걱정을 한들 될일이 아니므로 즉시 경주로 돌아가 경찰서에 고발하니 경찰서에서는 곧 비상선을 치고 극력 범인을 수색하였으나 범인은 도망한지 이미 두시간이 지난 지라 아직 체포되지 아니 하였고,(24일 오후5시) 목하 엄중 수색중이라더라.

세금 탈취 사건을 보도한 신문 상세모습.조선총독부 기관지를 캡처한 것이다.
세금 탈취 사건을 보도한 신문 상세모습.조선총독부 기관지를 캡처한 것이다.

요약하면 이같은 내용이다.
관금(세금) 8천700원을 싣고 12월24일 새벽에 일찍 경주를 출발한 행낭이 경주~아화 사이에서 분실된 큰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 우편마차는 일본인 마부가 운행하는 것으로 새벽 일찍 조선승객을 행랑옆에 앉혀 출발했으나, 새벽에 덜컹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마차문은 열려있고, 동승했던 조산사람과 관금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관금행낭은 날카로운 깔끝으로 찢어진째 발견됐으며, 경찰이 비상선을 치고 적극적으로 범인을 수색했으나, 당일 오후까지 체포하지 못했다.

일제는 세금을 수송하던 8700원의 거금(현재가 2억5000만원 상당)을 강탈당했지만, 범인들은 끝내 잡히지 않았고. 미궁에 빠진채 종결됐다.

이 사건의 실체가 알려진 것은 광복이후였다.
그날 세금마차를 습격했던 범인들이 스스로 나타난 것.

백산 우재룡 선생이 구술한 광복회 총사령 고헌 박상진의 일대기인 <고헌실기 약초>에 그 전모가 실린 것.

사건발생하던 전날. 1915년 12월24일.
경주인근의 토지세를 운반하기로 되어 있던 마부의 집에 한 남자가 찾아온다.
이 남자는 다음날 대구에서 의사를 만나기로 했다며 마차에 태워줄 것을 간청했다.
그 시각 또다른 한 남자는 마차가 지나가는 효현교 나무다리를 부수어 마차가 지나가지 못하게 한다.
다음날 세벽 세금마차는 외부사람은 동승할수 없다는 규정을 어기고 전날밤에 찾아온 환자를 태우고 대구로 향한다.
소태고개(소티고개)에 도착한 마차는 부숴진다리를 건널수 없어 얕은 개울물을 건너 기로 한다.

마차의 속도가 느려지자 짐칸에 타고 있던 환자는 품속에서 칼을 꺼내 세금행랑을 파괴하고 돈을 꺼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차에서 내려 훔친 돈다발을 들고 유유히 사라진다.
일본경찰은 이 사건을 백방으로 조사했지만, 단서조차 잡지 못했다.  세금을 턴 두사람은 광복회 지휘장인 우재룡, 권영만 의사였고, 훔친 세금은 독립군 군자금으로 보내졌다.

<KBS역사스페셜. 2010년 4월방송>

결국 이 사건은 광복이후에 가서야 당시 사건발생 3개월전인 1915년 8월2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항일무장투장조직으로 결성된 대한광복회가 기획한 독립군자금 마련 의거라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당시 대한광복회 총사령은 경주군 외동읍 녹동리에서 자란 박상진의사 였다.
1906년 양정의숙 법률학부에 입학에 근대법률을 배운뒤 1910년 최초의 판사 임용에 합격했으나 판사부임을 거부하고 독립운동에 나섰던 독립운동가다.

경주사정에 누구보다 밝았던 박상진 의사가 총사령이었기에 기획하고 실행했던 사건이 아니었을까.

지난해 3월1일 경주포커스가 주최한 경주독립운동 사적지 답사때 참가자들이 효현교 부근에서 당시 사건을 재구성해 보고 있다.
지난해 3월1일 경주포커스가 주최한 경주독립운동 사적지 답사때 참가자들이 효현교 부근에서 당시 사건을 재구성해 보고 있다.

한국방송 <역사저널 그날> 은 2월10일 방송을 통해 세금마차 습격사건과 박상진의사, 대한광복회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하기도 했다.

독립기념관은 2009년 경주시 광명동 1128일대 소태고개 및  효현교 일대를 경북우편마차 습격의거지로 지정했다.

경주 우편(세금)마차 탈취사건과 대한광복회및 박상진 의사를 조명한 '한국방송 역사저널 그날' 방송화면 캡처.
경주 우편(세금)마차 탈취사건과 대한광복회및 박상진 의사를 조명한 '한국방송 역사저널 그날' 방송화면 캡처.

*본사알림 : 경주포커스가 주최하는 3월1일 경주독립운동 사적지 답사때 방문하는 곳입니다.
경주시청 홈페이지 지명유래에서는  '마을의 뒷산이 소가 누운 형상이라하여 불렀다고 하나, 고대삼한 이래 제사장인 천군이 주관하는 祭祀地域인 蘇塗에서 유래하는 마을이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풀이하며 소티고개및 소태고개를 같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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