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폭압 뚫은 숭고한 독립의지' 기린 뜻깊은 하루...남북통일로 계승의지 다져
[3.1운동 100주년] '폭압 뚫은 숭고한 독립의지' 기린 뜻깊은 하루...남북통일로 계승의지 다져
  • 경주포커스
  • 승인 2019.03.04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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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포커스와 경주겨레하나가 주최한 3.1운동100주년, 경주독립운동사적지 탐방 행사가 40여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됐습니다. 참여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날 탐방 했던 곳을 시간순으로 사진으로 정리했습니다.
경주포커스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한 뜻깊은 올해, 독립운동 사적지 및 기념비 탐방 행사를 추가로 2~3회 더 진행할 예정입니다.
독자여러분의 관심과 성원 바랍니다.

천도교 중앙총부는 국권회복을 위해 기미년 1월5일부터 2월22일까지 전국 9개의 기도처를 정해 특별기도를 하도록 했다. 경주는 서울, 해주, 의주,길주,원주, 서산, 전주, 평강등과 함께 전국 9개 기도처 가운데 한곳으로 포함됐다. 진주 신용구, 경주 박인환 언양 곽해진 영천 이종원 선생이 이곳에서 49일 특별기도회를 하며 독립운동의 의지를 일깨웠다.
천도교 중앙총부는 국권회복을 위해 기미년 1월5일부터 2월22일까지 전국 9곳의 기도처를 정해 특별기도를 하도록 했다. 경주는 서울, 해주, 의주,길주,원주, 서산, 전주, 평강등과 함께 전국 9개 기도처 가운데 한곳으로 포함됐다. 진주 신용구, 경주 박인환 언양 곽해진 영천 이종원 선생이 이곳에서 49일 특별기도회를 하며 독립운동의 의지를 일깨웠다.
천도교경주교구에서.
천도교경주교구에서.
경주제일교회의 전신인 경주읍교회(노동리교회)에서 박내영 목사와 박문홍 영수 등이 경주만세운동 거사를 도모했다. 경주제일교회 전점득 장로가 이를 설명하고 있다.
경주제일교회의 전신인 경주읍교회(노동리교회)에서 박내영 목사와 박문홍 영수 등이 경주만세운동 거사를 도모했다. 경주제일교회 전점득 장로가 이를 설명하고 있다.
3월13일 큰장날 거사는 실패했지만, 3월15일(음력 2월14일) 경주작은장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작은장(사정장)터 였던 봉황대는 경주만세운동의 역사적 현장이다.
3월13일 큰장날 거사는 실패했지만, 3월15일(음력 2월14일) 경주작은장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작은장(사정장)터 였던 봉황대는 경주만세운동의 역사적 현장이다.
3월13일 큰장날 거사는 실패했지만, 3월15일(음력 2월14일) 경주작은장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작은장(사정장)터 였던 봉황대는 경주만세운동의 역사적 현장이다.
3월13일 큰장날 거사는 실패했지만, 3월15일(음력 2월14일) 경주작은장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작은장(사정장)터 였던 봉황대는 경주만세운동의 역사적 현장이다.
3월13일 큰장날 거사는 실패했지만, 3월15일(음력 2월14일) 경주작은장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작은장(사정장)터 였던 봉황대는 경주만세운동의 역사적 현장이다.
3월13일 큰장날 거사는 실패했지만, 3월15일(음력 2월14일) 경주작은장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작은장(사정장)터 였던 봉황대는 경주만세운동의 역사적 현장이다.
3월13일 큰장날 거사는 실패했지만, 3월15일(음력 2월14일) 경주작은장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작은장(사정장)터 였던 봉황대는 경주만세운동의 역사적 현장이다.
3월13일 큰장날 거사는 실패했지만, 3월15일(음력 2월14일) 경주작은장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작은장(사정장)터 였던 봉황대는 경주만세운동의 역사적 현장이다.
3월13일 큰장날 거사는 실패했지만, 3월15일(음력 2월14일) 경주작은장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작은장(사정장)터 였던 봉황대는 경주만세운동의 역사적 현장이다.
3월13일 큰장날 거사는 실패했지만, 3월15일(음력 2월14일) 경주작은장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작은장(사정장)터 였던 봉황대는 경주만세운동의 역사적 현장이다.
1915년12월24일 경주에서 대구로 세금 8700원(현재가 2억5000만원)을 운송하던 세금마차를 대한광복회 지휘장 우재룡, 권영만 의사등이 탈취했다. 해방때까지 미제사건이었다가 광복후 전모가 드러났다. 효현교 일대에서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을 떠올려 보고 있다.
1915년12월24일 경주에서 대구로 세금 8700원(현재가 2억5000만원)을 운송하던 세금마차를 대한광복회 지휘장 우재룡, 권영만 의사등이 탈취했다. 해방때까지 미제사건이었다가 광복후 전모가 드러났다. 효현교 일대에서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을 떠올려 보고 있다.
독립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 옥고를 치런 일천 정수기 선생(1896~1936)의 기념비에 헌화하고 있다. 선생은 1928년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독립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 옥고를 치런 일천 정수기 선생(1896~1936)의 기념비에 헌화하고 있다. 선생은 1928년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의사(1884~1921)묘를 참배하고 있다. 1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이날 의사의 묘에는 울산청년회의소 회장단이 입구 안내판 정비를 위해 실태파악을 겸해 참배를 하고 있었다.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의사(1884~1921)묘를 참배하고 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이날 의사의 묘에는 울산청년회의소 회장단이 입구 안내판 정비를 위해 실태파악을 겸해 참배를 하고 있었다.
2008년 울산청년회의소가 건립한 묘소 입구 안내판. 보수를 추진하고 있다고 전했다.
2008년 울산청년회의소가 건립한 묘소 입구 안내판. 보수를 추진하고 있다고 전했다.
감포읍 나정리 김봉규선생 공적비에 헌화하고 있다. 선생은 1920년 경북제2유림단 의건에 참여해 독립군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가 1920년 일경에 의해 연행되던중 일본인 경찰 1명을 사살했다. 그후 상해등지에서 활동했다가 일시 귀국했던길에 일경에 체포돼 1924년 징역4년형을 선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감포읍 나정리 김봉규선생(1892~1968) 공적비에 헌화하고 있다. 선생은 1920년 경북제2유림단 의거에 참여해 독립군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가 1920년 일경에 의해 연행되던중 일본인 경찰 1명을 사살했다. 그후 상해등지에서 활동하다가 일시 귀국했던길에 일경에 체포돼 1924년 징역4년형을 선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감포읍 팔조리 입구 정래영선생 공적비 앞에서. 선생은 1920년 경북제2유림단 의거에 참여해 독립군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으며, 김봉규선생과 함께 체포돼 1924년 대구지법에서 징역 1년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추서
감포읍 팔조리 입구 정래영선생(1900~1961) 공적비 앞에서. 선생은 1920년 경북제2유림단 의거에 참여해 독립군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으며, 김봉규선생과 함께 체포돼 1924년 대구지법에서 징역 1년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추서
탐방의 마지막 순서는 일성 조인좌 선생 기적비 방문이었다. 애국지사 조인좌 선생은 독립군 군자금 모금활동을 옥고를 치러기도 했고, 1936년 무렵 경주에 정착한 이후 침술을 통해 널리 시술을 펼쳤으며, 한국전쟁이후에는 대자원을 설립해 전쟁고아를 돌보는 등 활발한 사회사업을 펼쳤다.
탐방의 마지막 순서는 일성 조인좌 선생(1902~1988) 기적비 방문이었다. 애국지사 조인좌 선생은 독립군 군자금 모금활동을 옥고를 치러기도 했고, 1936년 무렵 경주에 정착한 이후 침술을 통해 널리 시술을 펼쳤으며, 한국전쟁이후에는 대자원을 설립해 전쟁고아를 돌보는 등 활발한 사회사업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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