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3.1만세운동 1차불발은 일본인 밀고 때문" ... 아라키준 박사 관련자료 발견
"경주 3.1만세운동 1차불발은 일본인 밀고 때문" ... 아라키준 박사 관련자료 발견
  • 김종득 기자
  • 승인 2019.04.30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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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경주의 3.1 만세운동은 3월11일과 12일 경주 노동리 교회에서 박래영목사, 박문홍 영수등이 회합을 갖고 3월13일 경주장날에 거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12일밤 태극기 제작 및 13일 새벽 태극기 배포 사실이 일본 경찰에 의해 적발 되면서 실패하고, 그 이틀뒤인 3월15일 경주작은장날 만세시위를 벌였다.

12일 태극기 300개를 제작한 뒤 새벽에 배포하려다 일경에 적발돼 체포되면서 13일 경주장날 거사는 일단 실패한 것.
12일 밤 회동 사실과 13일 새벽 태극기 배포계획이 일본 경찰에 적발된 경위는 무엇일까?

당시 경주에 거주하던 일본인 유력자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의 밀고가 있었다는 기록이 최근 발견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당시 경주 3.1만세운동의 1차 거사 실패는 당일 새벽 출동한 경찰에 주동자들이 체포된 것이 직접적인 이유이지만, 그 이면에는 당시 경주에 거주하던 일본인 유력자의 신고가 있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드러난 것이다.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100년전 경주 3.1만세운동의 실체적 진실이 일본인 연구자에 의해 하나씩 새롭게 규명되고 있다.

‘밀고자’에 대한 기록은 독립운동가 이용락 선생(1897년~1972년)이 1969년 펴낸 『삼·일운동실록』(이하 실록. 사단법인 3.1운동 동지회 발행) <경주시 의거편>에 나타난다.

이 책은 1919년 4월 8일 울주군 온양면 남창리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해 징역 1년의 옥고를 치렀던 독립운동가 이용락 선생이 해방후 6년동안 전국을 답사하며 3.1운동 참가자중 생존자들의 체험담을 수집, 기록하여 펴낸 책.

<경주시 의거편>은 이용락 선생이 경주3.1운동에 참가했다가 옥고를 치런 김철 선생의 증언을 기록한 것이다.

김철 선생(1919년 체포당시 김천근 그후 개명. 성건리 농업)은 경주3.1운동당시 만세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연행돼 옥고를 치런 12명의 경주인 가운데 한명.
22세의 나이로 경주 만세운동에 참가해 대구지법 경주지청에서 보안법위반으로 징역4개월을 선고 받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던 독립운동가였으며, 그후 사립학교 교원, 신문기자등을 거쳐 해방후에는 제헌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이용락 선생이 쓴 『삼·일운동실록』은 300권 정도 비매품으로 발간했다. 그만큼 흔한 책이 아닌 것.
이 책은 경주근현대사를 연구하고 있는 일본인 아라키 준 박사(荒木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류학 박사)가  경주 3.1운동 관련 논문을 준비하면서 중앙도서관에서  발견했고, 이 책 내용중에 ‘밀고자’가 있었다는 사실도 새롭게 발견했다.

『삼·일운동실록』은 경주 3.1운동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목사 박영조 등은 노동리교회) 내외의 청년 애국 동지를 규합하여 3월 22일 경주 큰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를 부르기로 예정하고 (태극기 300장 제작, 독립선언서 500장 등사 후) 대기 중, 이 내용이 일본 대서인 모로가 히데오)에게 사전 탐지되어, 모로가가 경찰에 밀고하여 경찰이 총동원되어 교회내와 계남학교를 수색하니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이 발견되어 목사 등 세 명은 연행돼 , 구속되고 김철, 김학봉 김성길, 최성렬, 박봉록등은 피신하였으므로 예정하였던 22일에는 거사를 못하였다.
 

이용락 편저 『삼·일운동실록』 중 경주 3.1운동 관련 기록부분. 일본인 대서인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에게 사전탐지되어...경찰에 밀고하여....등의 기록이 보인다.사진.아라키 준 박사 제공
이용락 편저 『삼·일운동실록』 중 경주 3.1운동 관련 기록부분. 일본인 대서인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에게 사전탐지되어...경찰에 밀고하여....등의 기록이 보인다.사진.아라키 준 박사 제공

경주 3.1운동이 불발에 그친 날짜가 3월 13일, 실행된 날짜가 3월 15일이었는데 『실록』에는 각각 3월 22일, 3월 29일로 기록돼 있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50년이 지난 후 간행된 이 책은 이처럼 사실과 거리가 있는 부분도 있다.

그렇다면 경주의 유력자였던 일본인 모로가 히데오가 밀고했다는 김철 선생의 진술은 신뢰할수 있을까?

이 기록을 발견한 아라키 준 박사는 오히려 『실록』의 이러한 착오가 역설적으로 밀고자가 모로가였다는 기술의 신뢰성을 높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라키 준 박사는 “ 『실록』에 보이는 경주 3.1운동의 날짜 등에 대한 기본적인 착오는 이용락이 「판결문」 등 일본 측의 자료를 전혀 참조하지 않고, 오직 생존자의 증언에 의거해서 경주 3.1운동을 기술했음을 의미한다”며 “ 『실록』의 경주 3.1운동에 관한 기술 가운데 날짜 등의 착오는 김철의 불확실한 기억에 의지했기 때문에 생긴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이어 아라키 준 박사는 “밀고자는 경주 3.1운동 참여자에게 영원한 원수로 마음에 각인되었음이 틀림없으며 기억의 착오가 생기기 어려운 요소이며, 『실록』의 기술은 경주 3.1운동 참여자 사이에 밀고자로 모로가 히데오가 공유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면서 “『실록』만으로 밀고자를 모로가로 확정하는 데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지만, 적어도 경주 3.1운동 참여자 사이에 밀고자가 모로가로 공유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김 철 선생이 밀고자로 지목한 모로가 히데오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1931년 펴낸 경주부근 고적안내서 맨 위쪽에 모라가 히데오의 사진을 넣었다.사진.아라키 준 제공
1931년 펴낸 경주부근 고적안내서 맨 위쪽에 모라가 히데오의 사진을 넣었다.사진.아라키 준 제공

 

아리키 준 박사에 따르면 모로가 히데오(1882-1954)는 1908년에 경주에 정착했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는 ‘경주왕’이라고 불릴 정도의 권세를 부린 경주지역의 권력자이기도 했다. 그는 경주 중심부에 대서업을 개업하여 생활했는데, 취미로 경주의 역사, 그중에도 신라사 그리고 유적·유물을 연구하기 시작하여, 경주 유적·유물을 보호·연구하기 위한 관변단체 경주고적보존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가 조선총독부와 공식적인 관계를 맺게 된 것은 금관총 발견직전인 1921년 9월 총독부박물관 경주주재 촉탁으로 임명된 시점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1926년 경주고적보존회 진열관이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으로 승격되었을 때 사실상 관장 역할이었던 주임을 맡게 돼 1930년까지 사실상 관장역을 수행했다.
그는 1927년부터는 경상북도 평의원으로 선출되어 정계에도 진출했다.

한편 그는 뒤편에서 유물을 판매하여 유출시키는 주범이었다. 1933년 4월 신라고분을 도굴한 조선인의 체포가 계기가 되어 모로가의 악행이 발각되어 결국 경주에서 활동을 못하게 됐다.

‘도기 녹유 탁잔’과 ‘경주 노서동 금팔찌’,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등 경주에서 활동할 때 착복해 소장했던 유물 가운데 일부는 일본 제실박물관(일본 국립박물관의 전신)이 사들였고,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 환수됐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제공한 환수문화재 중 지정문화재로 등록된 28건 가운데 6건이 모로가히데오가 빼돌린 것을 환수한 것이라고 전한다.
국보 제124호인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과 제125호 ‘녹유골호’를 비롯해 보물로 지정된 ‘도기 녹유 탁잔’(보물 제453호) ‘경주 노서동 금팔찌’(제454호)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제455호) ‘경주 노서동 금목걸이’(제456호)는 모두 그가 빼돌렸던 유물로 전한다.

 그는 1936년 11월29일 경북수산회 주임으로 임명돼 그해 12월13일 포항에 부임하기 까지 체포이후에도 3년이상은 경주에서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되며, 광복직후 일본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아라키 준 박사가 29일 경주 3.1운동 밀고자에 대한 기록 발견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아라키 준 박사가 29일 경주 3.1운동 밀고자에 대한 기록 발견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아라키 준 박사는 “그가 경주에서 출세하게 된 단서는 그가 종사한 ‘대서업’이라는 직업이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지는 아라키준 박사의 말.
“대서업은 오늘날의 사법·행정사서에 해당한다. 모로가는 부동산 거래나 등기를 비롯한 다양한 행정절차를 대행함으로써 경주 중심부 사람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인맥을 넓혀갈 수 있었다. 모로가가 진정 밀고자였다면 경주 3.1운동의 조짐을 탐지하는 데 그 직업이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경주 3.1운동과 관련해 경찰에 체포된 12명 가운데 박봉록의 직업은 ‘대서인’ 보조원이었었는데, 그 ‘대서인’이 모로가였다는 확증은 없지만 모로가가 밑에 일하던 박봉록의 움직임을 통해서 경주 3.1운동의 조짐을 탐지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다”

100년전 민족독립의 뜨거운 의지를 갖고 모인 경주의 독립지사들이 처음 삼일만세운동 거사일로 지정했던 3월13일 경주장날은 평소 1만여명의 군중이 모였다고 한다. 

당시 최대 총단이었던 천도교는 3.1운동을 앞두고 전국 교단 조직을 결속하기 위해, 사전에 전국 9곳의 대표기도처에 각 4명의 대표를 파견하여 ‘49일 특별기도’ 의식을 봉행했다고 한다. 이때 경상도를 대표한 기도처가 ‘경주군교구’였다.

경주지역 기독교와 천도교 신도들, 그리고 1만군중이 모이는 경주장날에 만세운동이 벌어졌다면 수천명의 군중이 대규모 시위를 벌일수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 경찰에 의해 사전탐지 되었고, 1차 시위 불발후 경주작은 장날 만세 시위 참가 인원수는 100~150명 정도에 그쳤다.

그 이면에는 일본인 유력자의 밀고가 있었다는 사실이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 연구자에 의해 드러나고 있다.

아라키 준 박사는 “「판결문」 등 일본 측 자료에는 오직 3.1운동 주도자의 ‘죄’를 밝히는 데 관심이 집중되어 밀고자의 구체적인 이름은 기재되지 않았다. 일본 측 자료를 아무리 봐도 밀고자를 추정할 단서를 찾을 수는 없다. 반면 직접 생존자의 기억에 접근한 『실록』은 그러한 일본 측 자료의 한계를 극복하여 밀고자의 실명까지 밝혀낼 수 있었다.”면서 “경주 3.1운동의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는 것은 학자로서의 사명감이기도 하고, 시민으로서 당연한 의무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아라키 준 박사는 경주 3.1운동에 대한 연구 성과를 6월초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 발표할 예정이다.

경주 3.1만세운동 '밀고자 있었다' 증언 기록 담긴  『삼·일운동실록』은 이용락 선생 '고난의 역작'
 

책 표지. 사진. 아라키 준 제공
책 표지. 사진. 아라키 준 제공

1919년 경주 3.1 만세운동에 가담했던 김철 선생을 만나 ‘밀고자’등의 증언이 담긴 『삼·일운동실록』을 펴낸 이용락 선생은 울주군 온양면 남창리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해 징역 1년의 옥고를 치렀던 독립운동가였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선생은 1919년 4월8일 울주군 온양면 남창리 장날, 동지들과 함께 수백명의 장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이들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선창한 후 경찰에 체포돼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69년 『3.1운동 실록』을 발간한 것은 삼일동지회의 공동작업으로 추진됐지만, 도중에 뜻이 달라 선생 단독으로 이책을 펴냈다.

이 책이 발간된 때는 선생의 나이 만 72세였다. 노구를 이끌고 자비를 들여 6년동안 전국을 돌며 독립운동가를 만나고 관련 자료를 모아 이 책을 펴낸 것이다.

서문에는 그 고단함을 엿볼수 있다.
“주유팔도 해매기를 6년, 그동안 재일 동생들이 보낸 약값으로 여비로 근근 보태썼고, 두 번이나 졸도하여 숨질뻔한 일이며 어두운 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늘지 않는 필력, 이 모두가 나에겐 숨벅찬 투쟁이 아닐 수 없었다.”

운신하기 조차 힘든 노구를 이끌고 그토록 힘든 작업을 해낸 원동력은 무엇일까?
선생은 서문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만세를 외치다 갈갈이 찢긴 몸 되어 흔적 없이 사라져간 무명의 청년을 잊어서는 안되리라. 과거의 기억은 후대의 올바른 길의 선택에 좌표가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선대가 흘린 피의 흔적을 어딘가에 모아 놓아야 겠다. 여기에서 편자 자신의 능력에도 닿지 않는 큰 작업으로 삼일운동 실록을 쓴 것이다.”

이용락 선생. 사진 국가보훈처
이용락 선생. 사진 국가보훈처

선생은 이 책을 펴낸 과정 및 한계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말했다.
“여기에서 일체의 감성도 편견도 없다. 어디까지나 편자 스스로 6년이란 짧지 않은 세월을 두고 직접 삼일날에 목이 터져라고 외쳤던 동지 노옹들과 대담 했고, 온갖 객관적인 문헌과 유물들을 살폈다. 그리고 일일이 확인을 받았으며 이를 첨부했다”고 편찬과정의 노력을 전하면서도 “이 책의 기록이 완전한 사실 그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을수도 있을 것임을 말해두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것은 삼일운동이 벌써 56년전의 일이고 또한 당시에 투쟁한 애국 동지들은 거의 타개하였고, 또한 당시의 기록마저도 완전한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삼팔 이북엔 직접 다니면서 수집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많은 문헌들이 6.25 전란으로 소진되어 안타까운 마음 비할데가 없으며 개인의 힘으로는 이 많은 사건과 너른 지역의 일들을 샅샅이 조사할 능력이 없으며 당시 애국지사들의 후예나 연루자들의 이야기와 문헌이 완전하다고 믿을 수도 없는 실정이고 보면 안타까운 마음은 더한 것이다.”

서문 마지막 부분에 선생은 이 책을 쓴 이유를 다시 한번 강조했다.
”오늘을 향유하는 세대가, 또 미래를 이끌어갈 우리의 후대가 이 책을 읽어 선대를 이해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조그마한 정신적 영양이 되어 진다면 더 바랄수 없는 기쁨과 보람이 될 것이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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