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질해도 괜찮아! ”
“찌질해도 괜찮아! ”
  • 신경진
  • 승인 2012.03.17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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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신경진, 홀로 더불어 ④

최근 아이들이나 어른들 사이에서 새롭게 등장하고 번져나가는 표현들이 많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찌질하다“라는 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특히 십대 아이들의 입에서 자주 나오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지난해 말 경에는 서울대 이준구교수가 강용석 국회의원을 비난하는 표현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거북스럽고 싫어하는 상대방에게 모멸감을 주기 위해 한껏 부정적인 의미를 담아 쏟아내는 부정적 정서 표현이다. 아이들과 어른들, 학식이 높은 사람이거나 혹은 그렇지 못한 사람이거나 ’찌질하다‘는 표현에는 모두 대상에 대한 거부와 멸시의 정서가 한껏 담겨 있는 것 같다.

인터넷을 통해 뜻을 알아보았더니, ‘행동이나 사상 등이 올바르지 못한 경우에 사용하는 표현(오픈국어)’ 그리고 다른 의미로는 ‘1. 가난해 보인다. 없어 보인다. 2. 사람의 외모와 됨됨이가 몹시 추접하고 더럽다. 보는 순간 때려주고 싶은 욕구가 샘솟는 사람을 일컫는다. 3. 비슷한 말: 빈티 나다.’ 등이 있었다. 가난을 ‘악’인양 멸시하는 언어적 표현이 생각과 정신마저 규정해버리는 듯한 양상이다.

찌질한 일상 찌질한 미래

나는 어른들 사이에 사용되는 표현보다 아동-청소년들 사이에서 사용되는 표현에 더 주목하고 싶다. 최근 농촌과 어촌지역에 소재한 지역아동센터에서 의뢰된 아동들을 대상으로 ADHD(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선별검사와 적응행동 검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

대상자들은 대부분 아주 취약한 가정 여건 속에 있는 아이들이었는데, 검사 결과 ADHD성향이나 부적응행동, 또는 심리적 우울과 심각한 학업부진 문제를 가진 것으로 나타나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이었다.

지역아동센터의 사회복지사 선생님은 이 아이들이 청소년기에 막 접어드는 초등 4-5학년부터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려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가난하고 험난하기까지 한 현재를 버텨내기도 힘든 아이들에게 미래 또한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고, 학교나 가정에서도 ‘행복’, ‘사랑’ 같은 단어는 죽은 단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참 찌질한 일상에 참 찌질한 표정에 참 찌질한 미래다.

단란한 중산층 가정의 공부 잘하고 사랑을 넘치게 받는 아이들은 이 가난하고 절망 속에 있는 아이들을 대 놓고 찌질하다고 놀리고 멸시한다. 가난은 노력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고, 왜 공부를 하지 않냐고 이야기한다.

찌질이에 깃든 차이와 결핍을 보듬어야

▲ 소외된 이웃들 곁을 지키는 문정현신부.
그러나 ‘찌질이’라고 불리는 이 아이들에게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차이’와 ‘결핍’이 십대 청소년이 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누적되어 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십여년 동안 아이에게 일어난 책임질수 없는 ‘차이’와 ‘결핍’을 보상해 주기보다 비난하고 책임지라고 한다. 그 때부터 아이는 ‘문제아’라는 낙인까지 덧붙여진다. 아이에게 학교도 지역사회도 전혀 친절하지 않다. 돌아오는 말은 ‘찌질하다’는 비난의 말 뿐이다. 그 아이들에게 삶은 너무 가혹하다.

취약계층 아동(청소년)들의 이런 현실을 보면서 난 ‘찌질하다’는 말이 좋아져 버렸다.
그러고보니 영화‘완득이’에 나오는 ‘똥주’ 선생님도 참 찌질했다.
그리고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평화의 섬’을 외치며 경찰의 폭력에 항의해 웃통을 벗은 채 절규하는 수염투성이 모습의 문정현신부의 모습도 참 찌질했다.
교사와 신부의 사회적 체면과 권위는 그들에게 거추장스러운 것 같다.

어떻게 보면 가난한 사람들, 사회적으로 능력이 작은 사람들의 모습이 ‘찌질하다’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다면 그 찌질함을 함께하지 않고 어떻게 그들과 어울려 살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그들(가난한 이들)과 편가르기 하지 않고 구경꾼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들이 폼나고 힘있고 뺀질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방식으로 함께 해야 한다.

아이들의 가난과 그로 인한 ‘찌질함’에 대해 그저 “잘 버텨만다오”, “사회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적어도 좋은 어른으로 잘 자라만 다오”, “하루 하루 웃어만 줘도 고맙다”라고 말하고 싶다.
부지런히 빨래해주고, 교복 다려주는 부모도 없이 할머니 손에서 크는 아이들, 장애를 가진 가난한 부모 밑에서 학원 한번 다니지 못하고 학교에서의 성적경쟁을 버텨내야 하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이 마냥 고맙고 미안할 뿐이다. 그들에게 따뜻하고 좋은 어른의 존재가 몇이나 될까?

찌질한 사람과 편가르지 말고 우리가 되어야

국회의원으로서 같은 서울대 출신 교수로부터 “찌질하다”는 비난을 받은 강용석의원도 매우 가난한 학창시절을 보냈다고 했던가.
가난을 알고, 그 가난을 온 몸으로 겪으며 서울대를 졸업한 사람이 왜 부자들을 위한 정당에서 상위2%의 권력과 부에 그토록 충성하는 삶을 살며 온갖 구질구질한 발언으로 정치적 저격수의 역할을 자처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자신의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가난했던 자신의 모든 삶의 경로마저 부끄러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누군가 가난한 사람들을 잘 이해할 수 있다면 사회와 가난을 연결지어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이 평등하고 행복해지도록 하는데 이바지하는 것이 더 훌륭한 삶이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자신의 권력과 부만 생각하고 가난했던 과거를 부끄러워한다면 그는 이미 대를 이어 부와 권력을 계승하며 살아온, 가난을 근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정신적으로 구속된 노예와 같다.

정신적 찌질함이 가장 큰 문제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약간의 인간적인 허점과 털털한 외모를 보면서 동질감과 편안함을 느끼기도 한다. 약한 존재, 들풀처럼 흔한 존재들이 짓밟히지 않는다는 확신만 있다면 그 평범함을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다.

 
․ 대구대학교 치료특수교육학과 졸업
․ 경북대학교 대학원 교육학 박사
․ 장애전담 '아이꿈터'어린이집 원장
․ 경주대학교 특수체육교육학과 외래교수
․ 참교육학부모회 경주지회장
․ 경주시보육정책위원
․ 경주시립도서관 운영위원

 

우리 사회 속에서 더 강한 존재가 되어야 할 필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약간의 ‘찌질함’을 ‘인간다움’으로 여길 수 도 있을 것이다. 부와 권력의 노예가 되어 스스로 자신의 삶과 가난을 부끄러워하는 그런 ‘정신적 찌질함’이 가장 큰 사회 문제이다.

가난한 청소년들에게, 그리고 열심히 살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타고난 능력이 작지만 웃으며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장애인들에게,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자발적으로 가난한 삶을 살아가는 거룩한 바보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 찌질해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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