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 탑재가 조선시대 경주읍성 석재로...경주읍성 발굴서 팔부중상 면석 3장 확인
통일신라 탑재가 조선시대 경주읍성 석재로...경주읍성 발굴서 팔부중상 면석 3장 확인
  • 김종득 기자
  • 승인 2020.02.21 14: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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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본 경주읍성 5구간 전경.
하늘에서 본 경주읍성 5구간 전경.

문화재청 경주시 의뢰로 한국문화재재단이 추진 중인 경주읍성 복원정비 사업부지(5구간)내 유적 발굴조사에서 조선시대에 축조된 성벽에서 통일신라시대 석탑에 사용됐던 팔부중상 면석 3매가 기단석으로 재사용 된 것으로 드러났다.

조선시대 경주읍성 복원 및 개축과정에서 주변 석재를 총동원하다 시피한 흔적이라거나, 통일신라때 조성된 탑의 일부가 조선시대 성벽의 석재로 사용될 만큼  '숭유억불'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팔부중은 부처의 설법 청중을 구성하는 다양한 무리 중 하나로, 인간 이외의 다양한 존재를 일컫는 집합적 용어다. 팔부중상 면석은 다른 나라 탑에서는 유례를 찾을 수 없고 통일신라시대 석탑에서 창안된 독특한 부조상이기도 하다.

‘팔부중상’ 이 부조된 탑재 3매는 경주읍성의 동문(향일문) 및 성벽의 북쪽구간으로, 북벽으로 연결되는 구간인 읍성 5구간 체성 벽에 덧대어 있는 치성의 가장 아래인 기단석으로 사용됐다.

5구간에서 치성은 현재 1개만 확인되었는데, 최근까지 주택이 있었던 자리로 기초석과 기단석 정도만 남아있다.
치성(雉城)은 성곽 시설 중 하나로, 성곽 일부분을 네모나게 돌출시켜 적들을 손쉽게 진압할 수 있게 만들었던 시설을 말한다

팔부중상이 부조된 면석 3매는 치성 기단의 북쪽과 동쪽 모서리를 연결하며 놓여 있었으며, 기단석에는 팔부중상의 면석 이외에도 탑 부재들과 건물 터의 주초석 등이 사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기초석의 침하로 팔부중상 면석들은 한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상태이다. 팔부중상의 부조 면이 위로 보며 놓여 있기 때문에 치성이 축조될 당시에는 그 위로 많은 석재들이 올려져있어 성벽 외부로 상이 아예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치성을 올리기 위한 기초석의 범위는 동서 길이 11m, 남북 너비 11m이며, 치성 기단석의 범위는 길이 10m, 너비 8m크기다.

동·남·북면의 팔부중상만 확인

아수라(사진왼쪽) 건달바(오른쪽)
아수라(사진왼쪽) 건달바(오른쪽)

‘팔부중상’ 면석 3매에는 각 1매에 1쌍의 팔부중상이 부조되어있다. 이번에 출토된 팔부중상은 탑의 서탑의 서쪽(천·가루라)에 사용되는 면을 제외한 북쪽(긴나라‧마후라가)‧남쪽(아수라‧건달바)‧동쪽(야차‧용)에 사용하는 3면 면석이 발견됐다. 북쪽면은 길이 148cm · 너비 75cm, 남쪽면은 길이 184cm · 너비 75cm, 동쪽면은 길이 166cm · 너비 75cm 크기였다.

 

9세기 중반 제작된 것으로 추정

현재까지 경주지역에서 팔부중상이 부조된 석탑 및 탑재는 담엄사지 석탑재, 창림사지 석탑, 남산리사지 서탑, 숭복사지 동·서탑, 인왕동사지(傳 인용사지) 동서탑재, 사제사지 탑재 등이 있으나 이번에 확인된 팔부중상이 부조된 석탑 및 탑재 중에서 동일한 도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직 확인되지 않아 출처는 알수가 없다.
그러나 조각 전체가 8세기대의 조각양상에 비해서 정교하지 못한 편이고, 천의 자락 날림이 부자연스럽고 손 모양도 변형된 점 등으로 미뤄 9세기 중반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관련 전공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치성 기단석및 팔부중상
치성 기단석및 팔부중상

경주읍성의 치성은 발굴조사를 통해서 체성과는 별도로 축조된 것으로 확인되며, 문헌기록을 통해서도 조선시대 세종(1418~1450년)연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문화재재단 박종섭 팀장은 “치성이 조선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볼 때 팔부중상 석탑재가 성벽의 석재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당시의 사상적 배경과 불교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밝혔다.
불교를 배척한 조선시대의 사회분위기의 한 단면이 아니냐는 분석으로 볼수 있다.

이와함께 경주읍성 개축이나 치성 축조 과정에서 부족한 석재를 총동원한 흔적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채경 경주시문화재과장은 "고려때 토성으로 지은 경주읍성은 조선시대 들어 여러차례 개축을 하게 되는데 석재가 부족해서  필요한 석재는 주변에서 모조리 끌어 모아 사용한 흔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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