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남동 고분 금동관, 금귀걸이, 은허리띠 등 묻힌 상태로 출토...피장자는 6세기 신라최상위 계층 여성 추정
황남동 고분 금동관, 금귀걸이, 은허리띠 등 묻힌 상태로 출토...피장자는 6세기 신라최상위 계층 여성 추정
  • 편집팀
  • 승인 2020.09.03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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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2호분 금귀걸이 주변 유물 노출 세부 모습.
120-2호분 금귀걸이 주변 유물 노출 세부 모습.

지난 5월 27일 경주 인왕동 고분군 조사 이후 43년만에 금동신발이 출토돼 관심을 모았던 경주 황남동 120-2호고분에서 금동관과 금드리개, 금귀걸이, 가슴걸이, 은허리띠, 은팔찌, 구슬팔찌, 은반지 등이 피장자가 착장한 상태 그대로 확인됐다.
이 고분에서는 지난5월 매장주체부에서 금동신발과 금동 달개(瓔珞, 영락) 일부가 확인된바 있다.

무덤의 주인, 피장자신분과 성별에 대해 전문가들은 왕족 혹은 최상위 귀족계층 신분의 여성으로 추정했다.

이번에 피장자가 착장한 장신구가 대거 발굴된 곳은 황남동 120호분의 봉토를 파괴하고 축조된 120-2호분으로, 문화재청·경상북도․경주시는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사업의 하나로 2018년 5월부터 경주 황남동 120호분을 발굴조사 하고 있다.

발굴조사를 담당하고 있는 (재)신라문화유산연구원이 이번 정밀 발굴조사에서 확인한 것은 피장자가 머리부터 발치까지 전신에 착장했던 금동관 등 6세기 전반에 제작된 장신구 일체다.
피장자는 금동으로 만든 관(冠)을 머리 부분에 착장했고, 굵은고리귀걸이(太環耳飾, 태환이식)를 양쪽에 하고 있으며, 금동신발을 신고 있었다.

120-2호분 금동관, 금드리개, 금귀걸이, 가슴걸이 노출 모습.
120-2호분 금동관, 금드리개, 금귀걸이, 가슴걸이 노출 모습.

경주 지역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墓, 적석목곽묘)에서 피장자가 신발을 착장한 사례가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리고 관과 귀걸이, 가슴걸이, 허리띠, 팔찌, 반지, 신발이 일괄로 출토된 것은 1973년∼1975년 황남대총 이후 처음이며, 이렇게 피장자의 장신구를 착장 상태 그대로 전체 노출시켜 공개하는 것도 처음이다.

금동 달개 일부가 5월에 먼저 노출됐던 피장자의 머리 부분에서는 최종적으로 금동관이 확인됐다.
금동관은 가장 아래에 관테(帶輪, 대륜, 머리에 관을 쓸 수 있도록 둥글게 만든 띠)가 있으며, 그 위에 3단의 나뭇가지모양 세움장식(樹枝形 立飾, 수지형 입식) 3개와 사슴뿔모양 세움장식(鹿角形 立飾, 녹각형 입식) 2개를 덧붙여 세운 형태이다.
관테에는 거꾸로 된 하트 모양의 장식용 구멍이 정연하게 배치돼 있으며, 나뭇가지모양 세움장식의 끝 부분에도 거꾸로 된 하트 모양의 구멍이 뚫려 있다.

또한 금동관의 관테에는 곱은옥(曲玉, 곡옥)과 금구슬로 이루어진 금드리개(金製垂飾, 금제수식)가 양쪽에 달려 있으며, 관테와 세움장식 사이에는 ‘ㅜ, ㅗ’ 모양의 무늬가 뚫린 투조판이 있는데, 세움장식의 상단에서도 투조판의 흔적이 일부 확인됐다. 이 투조판이 관모(冠帽)인지, 금동관을 장식하기 위한 용도였는지는 추가적인 조사를 통해 밝혀질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까지 출토된 경주 지역의 금동관 가운데 가장 화려한 것으로, 금동관의 관테에 장식용 구멍이 뚫려있는 것은 첫 사례이기도 하다.

투조판이 관모일 경우에는 경주 지역 돌무지덧널무덤의 피장자가 관과 관모를 동시에 착장한 첫 사례이며, 투조판이 관을 장식한 용도일 경우에는 현재까지 출토된 사례가 없는 새로운 형태의 관이기도 하다.

금동관 아래에서는 금으로 제작한 굵은고리귀걸이 1쌍과 남색 구슬을 4줄로 엮어 만든 가슴걸이(胸飾, 흉식)가 확인됐으며, 그 아래에서는 은허리띠와 허리띠의 양 끝부분에서 4점이 묶음을 이룬 은팔찌, 은반지도 확인됐다.

오른팔 팔찌 표면에서는 크기 1㎜ 내외의 노란색 구슬이 500점 넘게 출토돼 작은 구슬로 이뤄진 구슬팔찌를 은팔찌와 함께 끼고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은반지는 오른손에서 5점, 왼손에서는 1점이 출토됐는데, 왼손 부분을 완전히 노출시키기 않아 추가적인 조사가 이뤄지면 왼손 부분에서 은반지가 더 출토될 가능성도 있으며, 천마총의 피장자처럼 각 손가락마다 반지를 꼈을 가능성도 있다.

금동신발은 ‘ㅜ, ㅗ’ 모양의 무늬를 번갈아가며 뚫은 앞판과 달리 뒤판은 무늬를 새기지 않은 사각의 방형판으로 마감한 형태였다. 1960년 의성 탑리 고분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금동신발이 출토된 적이 있다.

경주 황남동 120-2호분 매장주체부 전면 노출 전경.
경주 황남동 120-2호분 매장주체부 전면 노출 전경.

현재까지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관과 신발은 실생활에 사용하던 것이 아니라 죽은 이를 장사지내어 보내는 의례(葬送 儀禮, 장송 의례)를 위해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밖에 은허리띠의 드리개 연결부가 삼각 모양인 점, 부장칸에서 출토된 철솥(鐵鼎, 철정)의 좌․우에 고리 자루 모양의 손잡이가 부착된 점 등 기존에 보기 어려웠던 새로운 자료가 많아 추후 종합적인 연구가 이뤄지면 다양한 논의가 더 진행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금동관의 중앙부에서 금동신발의 뒤꿈치까지의 길이가 176㎝인 것으로 보아 피장자의 키는 170㎝ 내외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신라왕경사업추진단은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피장자의 성별 등을 포함해 추가로 더 밝힐 수 있는 것이 있는지를 확인할 예정이다.
일단  3일 오후2시부터 문화재청 유튜브를 통해 공개된 설명회에서 전문가들은 피장자 성별과 신분에 대해 왕족 혹은 최상위 귀족계층 신분의 여성으로 추정했다.

대전대학교 이한상 교수(역사문화학 전공)는 "남성 피장자의 부장품인 왼쪽에  칼이 없는 반면 왼쪽 허리춤에 금은 장식의 도자가 발견된점등으로 미뤄 6세기최 신라최상위 귀족신분의 여성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재)신라문화유산연구원 김권일 선임연구원도 "부장품에서 큰고리귀걸이, 방추자등이 있는데 반해 큰칼(大刀)이 없는점 등으로 미뤄 신라 왕족이거나 최고위귀족층 신부의 여성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문화재청이 3일 오후 2시부터 최초로 유튜브를 통해  공개한 발굴설명회에는 동시접속자가 약 3000명에 이를 정도로 깊은 관심속에서 진행됐다.

* 문화재청 유튜브 채널: https:www.youtube.com/chluvu 

 

경주 황남동 120호분과 그 주변의 유구 분포 현황.
경주 황남동 120호분과 그 주변의 유구 분포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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