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하지 못한 역사...일제의 충견이 초대 경주경찰서장으로 사진과 함께 홈페이지에
청산하지 못한 역사...일제의 충견이 초대 경주경찰서장으로 사진과 함께 홈페이지에
  • 김종득 기자
  • 승인 2021.03.03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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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친일 반민족 행위에 앞장섰던 서영출은 일제 마지막 경주경찰서장이자 해방후 첫 경주경찰서장이었다. 경주경찰서 초대 서장으로 홈페이지에 사진이 올라 와 있다.
일제하 친일 반민족 행위에 앞장섰던 서영출은 일제 마지막 경주경찰서장이자 해방후 첫 경주경찰서장이었다. 경주경찰서 초대 서장으로 홈페이지에 사진이 올라 와 있다.

일제 강점기 악명높았던 고등경찰로 친일반민족 행위에 앞장섰던 인물이 초대 서장으로 현재 경주경찰서 홈페이지에 사진과 함께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제강점기 경주경찰서장이자, 1945년 10월12일부터 1946년2월7일까지 해방후 첫 경주경찰서장을 한 서영출이다.

서영출 동 친일경찰...반민특위 '일제의 충견'

반민특위 반민죄 기록.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그 기록이 확인된다.
반민특위 반민죄 기록.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그 기록이 확인된다.

서영출은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설치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에 1949년1월31일 체포된 대표적인 친일 경찰이었다.

반민특위가 반민족행위자들을 체포한뒤 이들의 죄를 기록한 ‘반민특위 반민죄’에서 서영출은 일제 고등경찰 22명을 한데 묶은 ‘애국혁명투사의 피를 빨던 도배들’로 분류돼 기록으로 남아 있다.

반민특위가 기록한 ‘반민특위 반민죄’(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에서는 서영출을 ‘倭帝(왜제)의 忠犬(충견) 서영출’이라는 제목으로 달고 ‘倭帝(왜제)하에 경주경찰서장으로 손수 민족의 선구자를 구금 학살한 일제의 충견이었던 자로, 전과를 뉘우침 없이 동포의 생명을 유린하였다고 한다’고 그의 죄상을 기록해 두었다.

서영출이 포함된 ‘애국혁명투사의 피를 빨던 도배들’에 대해 반민특위는 ‘8·15 전 일제의 高等警察(고등경찰)이란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치게끔 우리 혁명투사들이 고문을 받아 참혹한 죽음을 당하였고 감옥에서 죽어 갔다. 이러한 迫害(박해)를 내리는 데 앞잡이가 되어 미쳐 날뛴 高等刑事(고등형사)들이야말로 反民者 가운데 首級(수급)에 오르는 최고의 반역자로서 이 자들에 대한 분노는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치열한바, 特委 活動開始 以來 서울과 지방을 통하여 일제 때의 高等刑事들이 속속 체포되어 斷罪臺(단죄대)에 오르고 있는 바, 원로 金㥁基를 비롯한 일행들의 이름과 이 가운데 거물급의 죄상이란 이러하다.’고 적었다.

서영출을 반민족 행위의 최상위(首級), 거물급 죄인으로 규정한 것이다.

대동청년단 활동하며 독립운동가 살해도

2016년 KBS대구.다큐멘터리 '기억, 마주치다, 단죄'편에 서영출에 관해 보도한 모습. 방송화면 캡처.
2016년 KBS대구.다큐멘터리 '기억, 마주치다, 단죄'편에 서영출에 관해 보도한 모습. 방송화면 캡처.

그는 경주경찰서장을 거쳐 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기 직전까지 대동청년단 활동을 하며 민간인 학살에도 관여했다.
경주군 읍내리 대동청년단장이던 서영출은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5월1일 경주군 교리에 거주하던 최순(당시 57세)이 기부금을 내지 않는다며 납치해 살해했다.

경주 최부자집 12대손인 최순은 독립운동 자금을 송출한 인물이었는데, 해방후 5.10 국회의원선거가 다가오자 친일 경찰 출신 서영출이 독립운동을 한 최순이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것을 막으려 단원들과 함께 권총으로 사살케 했던 것이다. 독립운동가 출신인 최순이 당선되면 전직 고등계 형사였던 자신이 '민족 반역자'로 낙인찍힐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신문기사에서도 확인된다.

1948년10월17일자 국제신문은 ‘지난 10월 5일 서울지검에서는 모종의 중대한 살인사건의 단서를 얻고 극비밀리에 행동을 개시하여 시내 원효로 2가 73에 주소를 둔 大同靑年團 단원 康德模(21)를 체포하여 엄중문초한 바 있었는데, 탐문한 바에 의하면 경주군 읍내리 대동청년단 단장 徐永出 동 회계검사과장 朱得明 외 2명은 동군 校里에 거주하는 崔淳(57)씨가 기부금을 안 낸다는 이유로 지난 5월 1일 새벽 1시경 전기 최씨를 동군 산중으로 납치하여 권총으로 살해한 사건이라 한다’고 보도했다.

그는 읍내리 대동청년단장이던 자신의 위력을 이용해 사건을 조작하려 했던 것으로도 보인다.
이어진 기사에는 ‘그런데 어떻게 이유인지 그후 동 사건의 범인으로 高元大라는 사람이 경주경찰서에서 피검 송치되어 대구지방심리원에 기소되었던 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은 사실이 있었다 한다.’고 보도했다.

기사를 토대로 추정하면 서영출은 자신이 최순을 살해 하는데 가담 해놓고도 고원대라는 사람을 범인으로 둔갑시킨 뒤, 무죄판결을 받도록 모종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문의 보도대로 강덕모라는 단원이 체포돼 사건전모를 실토함으로써 그의 범죄가 밝혀진 것이다.

49년 2월2일자 자유신문. 서영출이 체포된 사실과 일제하 경주경찰서장으로서 악행을 일부 기록하고 있다.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49년 2월2일자 자유신문. 서영출이 체포된 사실에 이어 일제하 경주경찰서장으로서 손수 애국자들을 구금학살한 왜제의 충견이며, 해방후 무고한 동포의 생명을 수많이 유린했다고 한다고 보도하고 있다.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고문은 부하의 짓이라고 공판정 진술을 보도한 49년 4월13일 자유신문.
고문은 부하의 짓이라고 공판정 진술을 보도한 49년 4월13일 자유신문.

 

공판정에서 끝끝내 사실을 부인했다는 제목의 49년 5월14일자 자유신문.
공판정에서 끝끝내 사실을 부인했다는 제목의 49년 5월14일자 자유신문.

친일행적과 관련한 당시의 신문기록을 보면 그는 49년 1월31일 체포돼(자유신문 49년2월2일) 2월3일 특검으로 송치됐다.
이어진 4월12일 공판과정에서 ‘고문은 부하의 짓’이라고 뻔뻔한 거짓말(자유신문 49년4월13일보도)을 하기도 하고, 5월13일 공판에서도 끝끝내 사실을 부인(자유신문 49년5월14일)한 것으로 나타난다.

49년 4월 공민권 정지 3년형 구형 받았으나 복역중 형 면제를 받았다는 언론의 보도(2016년 KBS대구. 기억, 마주치다 단죄)가 있으나 기자는 이를 확인하지 못했다.

그가 몇 년형을 선고 받은지는 정확하게 알수 없지만, 49년8월31일 반민특위의 공소시효가 만료된날 보석으로 풀려난 것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신문기사로 확인된다.

49년8월31일 조선중앙일보는 ‘반민족행위처벌법 공소시효, 8월31일로 종료’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하필 반민자에 한하여 그다지 병자도 많이 생기며 시비도 많은가’라며 반민족행위자들의 무더기 보석을 비판했다.

그러면서 반민족특별재판부 통계를 근거로, ‘지난 (49년)1월 8일부터 8월 29일 현재로 기소 총건수는 222건인데 그 중 불구속기소 건수가 44건이며 보석 건수는 57건이라 한다. 불구속 건수와 보석 건수를 합치면 101건으로 이를 기소 총 건수에 비해보면 약 50%에 해당된다. ’고 보도하면서 57명의 보석자 명단에 서영출을 올렸다.


실패한 식민잔재 청산 서영출에게는 행운

1938년 2월25일자 조선총독부 관보. 경상북도 경부보 고시 합격자로 서영출의 명단이 발견된다. 초등학교 교사를 거쳐 경찰시험에 합격한 것으로 보인다.
1938년 2월25일자 조선총독부 관보. 경상북도 경부보 고시 합격자로 서영출의 명단이 발견된다. 초등학교 교사를 거쳐 경찰시험에 합격한 것으로 보인다.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이승만의 집요한 방해와 친일경찰의 습격등으로 반민특위의 활동이 흐지부지되면서 독립국 대한민국의 식민잔재 청산은 실패했다.
경주출신 대표적 친일경찰 서영출도 다른 수많은 반민족 행위자들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고, 그후에도 사업을 하며 권세를 누린 것으로 보인다.
일제 식민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역사의 비극이 서영출에게는 행운이었던 셈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현대 인물자료를 보면 서영출은 1949년 현재 43세로 기록돼 있다. 1905년생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 주소는 경북 경주읍 서부리로 돼 있다. 서면 출생으로 알려져 있다.
경북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 대구수성보통학교 훈도, 1927년 대구수창보통학교훈도, 1929년 건천보통학교 훈도, 1930년 건천보통학교 훈도(초등학교 교사)등을 거쳐 1938년경 경찰에 입문했다.

1935년 조선총독부 관보에서 그는 경부보 고시 합격자 명단으로 나온다.
1940년에는 영주경찰서에 경부보로 근무했다는 기록도 발견된다.

1950년 현재 경주규조토광업사 사장으로, 기타 경주자동차협회장, 경주경찰서후원회 부회장,대동청년단 경주단부 단장, 경상북도광산협회 감사, 경주철공협회 이사, 대한독촉( 大韓獨促 )경주지부 청년부장, 경주지구 대한노총 철도연맹, 경주대한노총등 고문으로 등재돼 있다.
49년부터 59년까지 광업회사 대표로 경주읍, 서부리, 감포, 양북면 등지에서 사업을 했던 기록이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서 확인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현대 인물자료에서 서영출에 관한 기록. 50년에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현대 인물자료에서 서영출에 관한 기록. 50년에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광업하며 제3대, 5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 낙선

서영출의 회사운영 기록.

일제 고등경찰로 온갖 악행을 하며 권력을 누렸던 그는 해방후 정치권력에 대한 욕심은 버리지 못한 듯했다.
서영출은 1954년5월20일 치런 제3대 국회의원 선거, 1960년 제5대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두 번 모두 낙선했다.

1954년 3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제18선거구에는 서영출을 비롯해 11명이 출마했는데, 친일부역자이자 해방후 민간인 학살로 악명높았던 무소속 이협우가 당선됐다.

서영출. 사진 경주경찰서 홈페이지.
서영출. 사진 경주경찰서 홈페이지.

일제강점기때는 일제 경찰로, 내남면 서기로, 해방후에는 내남면 대한청년단장, 민보단장을하며 내남면 양민학살에 앞장섰고, 2대 국회의원(경주군 을구.대한청년당)을 역임한 무소속 이협우는 유효투표수의 19.38%인 9305표를 받아 재선에 성공했다.
서영출은 2위로 17.04%인 8179표를 받았다.

서영출은, 자유당소속으로 출마해 이협우가 3선에 성공한 제4대국회의원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았다.

미련을 버리지는 못했는지 4.19혁명직후인 1960년7월29일 실시된 제 5대 국회의원선거 경북 제9선거구에서 서영출은 무소속으로 다시한번 도전했으나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서영출을 비롯해 7명이 출마한 당시 선거에서 서영출은 민주당 오정국(7457표. 32.77%) 무소속 김동선(7287표.25.25%) 무소속 김정열(4385표. 15.19%)에 이어 4269표(14.79%)를 받아 4위를 기록했다.그 후 공직선거 출마기록이나 활동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KBS가 최근 전국 지방경찰청, 경찰서 등 274곳의 홈페이지를 전수 조사한 결과 70명이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11월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 홈페이지에 역대 서장등으로 게시돼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경주경찰서장, 해방후 첫 경주경찰서장으로 반민특위에 체포돼 기소까지 됐던 서영출은 이 친일인명사전에는 등재되지 않았다.  서영출의 계급이 당시 신문이나 총독부 기록에서 ‘경부보’까지만 확인될뿐 ‘경부’로는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전해진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경찰은 경부계급까지만 인명사전에 올렸다고 한다.

2일 경주포커스 유튜브 방송을 통해 서영출이 경주경찰서 홈페이지에 사진과 함께 게시돼 있다는 사실을 접한 시민·독자들은 경주경찰서 홈페이지에 서영출의 사진은 그대로 두되, 그의 친일 반민족 행위를 홈페이지에 표시하는 방법으로 과거 죄상을 오늘을 살아가는 시민들에게 분명하게 알려야 한다고 한 목소리로 주장했다.

경기도는 지난해부터 역대 도지사 가운데 친일 행적이 있는 사람은 약력에 친일관련 기록을 표시하고 있다고 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다. 

*서영출의 그후 행적을 기억하시는 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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