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헌 박상진의사 순국 100주년 경주시 차원 첫 추모행사 10일 내남면 노곡리 묘에서
고헌 박상진의사 순국 100주년 경주시 차원 첫 추모행사 10일 내남면 노곡리 묘에서
  • 김종득 기자
  • 승인 2021.08.06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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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촬영한 박상진의사의 묘. 경주포커스 자료사진.
지난해 촬영한 박상진의사의 묘. 경주포커스 자료사진.
정비가 진행되고 있는 최근 모습. 사진 김성대 신라문화동인회 부회장 제공.
정비가 진행되고 있는 최근 모습. 사진 김성대 신라문화동인회 부회장 제공.

일제 강점기 초기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총사령으로 항일투쟁을 주도하다가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한 고헌 박상진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경주시가 주최하는 추모하는 행사가 10일 내남면 노곡리에 있는 박 의사 묘에서 진행된다.

순국 100주년 동안 경주시 차원의 추모행사가 열리는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박상진의사는 1915년 대한광복회를 조직한 뒤 일제의 세금마차를 탈취하고 금광습격, 친일부호와 조선총독의 암살, 신흥무관학교의 지원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다가, 1918년 2월1일 일본경찰에 체포돼사형형을 언도받고 4년여 옥고 끝에 1921년 8월11일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일제 강점기 초기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다.(건국훈장 독립장)

올해가 의사의 순국 100주년을 맞이 하는 것이다.
박상진 의사의 선대는 경북 영천이지만, 8대 조때 울산송정으로 이사했고, 그후 의사의 조부대에 외동읍 녹동리로 옮겨왔다.

박 의사의 출생지는 1884년 12월7일 울산 송정리 출생으로 정리돼 있다. 4살 때(혹은 생후 100일) 외동읍 녹동리 백부(박시룡)의 양자로 입적됐다. 1902년 왕산 허위의 문하에 들어갈 때 까지 유소년기를 외동읍 녹동리에서 보냈다. 
조부(박용복)가 1870년 경주인으로 생진과에 등과하고, 생부(시규)도 경주인으로 1885년 문과에 등과한 기록이 전해오는 등 경주시 외동읍 녹동리 출생설도 있다.

경주시가 올해 처음으로 개최하는 추모행사는 10일 오전 11시부터 신라문화동인회가 주관해 추모시, 추모공연, 헌화 및 분향등의 행사가 진행된다.
참가인원은 코로나19 4차 대유행으로 50명 미만으로 제한된다.

올해 추모행사는 주낙영 시장의 선양의지와 깊은 관계가 있다.
주낙영 시장은 3월2일 열린 간부회의에서 “대한민국 건국을 앞당긴 박상진 의사의 묘역이 경주에 있었지만, 그동안 행정에서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며 “늦었지만 묘역 진입로 정비를 통해 박상진 의사가 이룬 업적을 상세히 알리겠다”고 말했다.

이에따라 경주시는 내년까지 3억8000만원의 예산을 들여 박상진 의사 진입로 및 묘역 정비를 추진하고 있다.  묘와 진입로등은 상당부분 정비가 이미 진행됐다. 

울산시에서는 지난4월 순국100주년 기념사업회를 발족하고 특별기획전(울산박물관) 테마도서전(울산도서관) 캐릭터공모전(기념사업회), 합창대회(고헌초등학교)등 다양한 행사가 열리고 있다.

경주시의 추모행사가 10일로 하루 앞당겨 진것도 유족회 측이 울산시 행사와 중복을 피하기 위해 경주시측에 요쳥한데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은 국가보훈처가 기록한 박상진의사 공훈록.

고헌 박상진의사.

울산(蔚山) 사람이다. 전통적 유가(儒家)에서 성장한 그는 일찍이 한학을 수학하고 1902년에는 허위(許蔿)로부터 학문적 수업을 쌓았다. 그후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양정의숙(養正義塾)에서 법률과 경제를 전공했다. 1910년 판사(判事)시험에 합격한 그는 평양법원에 발령을 받았으나 사퇴하고 1911년 만주로 건너가 허겸(許兼)·손일민(孫逸民)·김대락(金大洛)·이상용(李相龍)·김동삼(金東三) 등의 지사들과 교류하며 독립투쟁의 방략을 모색하였다.

1912년 귀국한 그는 대구(大邱)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독립운동의 정보연락 및 재정적 지원을 목적한 것이었다. 당시 상덕태상회는 국내의 연락뿐 아니라 이관구(李觀求)가 설립한 만주 안동(安東)의 삼달양행(三達洋行)이나 장춘(長春)의 상원양행(尙元洋行)등 곡물상과 연락망을 구축하며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1915년 음력 1월 15일 대구 안일암(安逸庵)에서 독립군 지원단체인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을 결성하였다. 이때 조선국권회복단에 참여한 인사들은 주로 대구를 중심한 경상우도(慶尙右道) 지방의 중산층 이상의 혁신유림(革新儒林)들로서, 동단은 곡물상의 상업조직을 통하여 독립군을 지원한 구국경제활동단체였다. 그러나 동단의 인사들은 보다 강력한 독립군 단체를 조직할 목적으로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제휴하여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결성하였고 그는 총사령(總司令)을 맡았다. 채기중(蔡基中)이 주도한 풍기광복단은 1913년에 조직된 독립군 단체로서 의병적 성격이 짙었고, 이때 국권회복단에서는 박상진 외에 김재열(金在烈)·정운일(鄭雲馹) 등 의병적 인물이 참여했다.

대한광복회는 혁명적 독립운동단체로서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실천강령을 정하고, 일본이 국제적으로 고립될 때 일제히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혁명의 거점으로는 국내 각처에 곡물상을 개설하는 한편 만주의 신흥학교(新興學校) 등과 연결하면서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았다. 한편 이에 필요한 자금은 자산가들의 의연금으로써 충당할 계획이었는데 친일부호들의 비협조로 의연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았으므로 강제모금의 방법을 택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1916년 무기구입을 위해 만주를 다녀오는 길에 서울에서 붙잡혀 1917년 4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군자금 수합에 더욱 힘을 쏟아 당시 식민적 지주체제에 안주하는 반민족적 친일부호를 처단하는 의협투쟁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그는 대한광복회 명의로 포고문을 작성하는 한편 친일부호 처단의 명령을 내려 채기중·유창순(庾昌淳)·강순필(姜順必)·임봉주(林鳳柱) 등으로 하여금 1917년 11월 경북 칠곡군(漆谷郡)의 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케 했으며 1918년 1월에는 김한종(金漢鍾)·장두환(張斗煥) 등이 주관케 하여 충남 아산군(牙山郡) 도고면(道高面) 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하였다.

이때 동단의 처단 고시문(告示文)을 붙였으므로 만천하에 대한광복회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일로 인하여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1918년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일경에 붙잡혔고, 사형을 선고받아 4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8월 11일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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