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성축조연대, 키 135cm 여성 인신공희 인골 추가확인... 월성 축조연대 4세 중엽~5세기 초 완공 문헌기록보다 250년 늦어
월성축조연대, 키 135cm 여성 인신공희 인골 추가확인... 월성 축조연대 4세 중엽~5세기 초 완공 문헌기록보다 250년 늦어
  • 김종득 기자
  • 승인 2021.09.07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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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벽 위치.
서성벽 위치.
서성벽 인신공희 위치.
서성벽 인신공희 위치.
여성인골과 장신구 위치.
여성인골과 장신구 위치.
2017년 확인한 50대 남녀 인골.
2017년 확인한 50대 남녀 인골.
2017년 확인한 50대 남녀 인골.
2017년 50년 남녀인골과 올해 여성인골 확인 위치.

경주 월성에서 성을 쌓을 때 사람을 제물로 바쳐 제사를 지낸 의식(인신공희)이 행해졌다는 사실이 2017년에 이어 추가로 확인됐다. 
월성 축조연대는 문헌기록보다 250년정도 늦은 4세기 중엽에 성을 축조하기 시작해 5세기초에 완공한 것으로 밝혀졌다.
신라 왕성인 월성의 축조 연대와 축성 방식을  확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7일 이같은 발굴성과를 공개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2017년 월성 서성벽구간에서 인신공희(人身供犧)의 사례로 50대 남녀 인골을 발굴한 이후 추가 발굴조사를 발여 인근에서 성인여성 인골과 동물뼈등을 추가로 확인됐다.

이번에 확인된 여성 인골은 이전과 달리 곡옥 모양의 유리구슬을 엮은 목걸이, 팔찌를 착용했으며,  키가 약 135cm 전후로 체격이 왜소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물뼈는 말, 소 등 대형 포유류로 추정되며, 늑골 부위 위주로 선별하여 제물로 바쳐졌다.

인신공희는  월성 기초부 공사를 끝내고 성벽을 거대하게 쌓아 올리기 전, 성벽과 문지가 견고하게 축조되길 바라며 거행됐다.

인신공희 지점에서 북서쪽 방향으로 약 10m 정도 떨어진 곳에는 1985년과 1990년 시굴·발굴조사에서 출처 불명의 인골 20구 이상이 일괄적으로 확인된 적이 있는데, 이번에 밝혀진 월성의 축성 작업과 비교한 결과, 이들 인골 또한 성벽 축조 과정과 관련하여 묻힌 것으로 밝혀졌다.

성 축조 시기, 삼국사기 등 문헌기록보다 250년 늦어
서성벽 조사를 통해 월성 성벽의 토목 기술과 축조 시기도 기존 문헌기록보다 약 250년뒤인 으로 확인됐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기록에는 월성이 파사왕 22년(101년)에 축조된 것으로 등장하지만, 서성벽 발굴조사를 통해 월성은 문헌 기록과 약 250년 차이 나는 4세기 중엽부터 쌓기 시작해 5세기 초에 이르러 완공된 것으로 확인됐다. 종전 문헌의 축조기록은 실제 축조연대 보다 많이 앞당겨 진 것으로 여겨져 논란이 끊이지 않았는데.이번 조사를 통해 축조시기를 확인 것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월성 서성벽의 축조 연대는 출토된 유물의 전수 조사와 40여 점에 가까운 가속질량분석기(AMS, Accelerator Mass Spectrometer) 연대 분석(목재, 유기물질 등의 탄소를 측정하여 과거 연대를 검출하는 방법)에 기반해 이뤄졌으며,  양자 간의 정합성을 최대한 맞추어 자료의 객관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밝혔다.

월성은 신라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토성으로 알려졌지만, 그 축조 수준은 토목공학적으로 다양한 축성 기술이 집약된 것으로 확인됐다. 
먼저, 일정 간격으로 나무 말목을 박은 지정(地釘)공법과 목재, 식물류를 층층이 깐 부엽(敷葉)공법 등 기초부 공사를 통해 월성 지형의 연약한 지반을 보강했다. 그 이후, 본격적으로 성벽 몸체를 만드는 체성부 공사에서는 볏짚·점토 덩어리·건물 벽체 등을 다양한 성벽 재료로 사용해 높고 거대하게 만드는 토목 기술이 확인됐다.
월성 성벽은 너비 약 40m, 높이 10m 이상으로 추정돼 신라인들의 뛰어난 토목 기술과 당시 왕성의 웅장함을 그려볼 수 있게 됐다.
 

서성벽 축조공정 복원도
월성 서성벽 축조공정 복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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