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왕이 장인과 왕비를 버린 사연
신문왕이 장인과 왕비를 버린 사연
  • 경주포커스
  • 승인 2013.03.19 14: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호상-문화유산 둘러보기

 

 
1967년 경북 청송 출생
1985년 동국대학교 입학
2003년 대구가톨릭대학교 박사학위 취득
1993.3 ~2005.1 동국대학교 경주박물관 조교, 연구원, 전임연구원
2005.1 ~ 2011.12 (재)신라문화유산연구원 조사연구과장, 조사실장
2012.3 ~ 현)위덕대학교 박물관 전임연구원
2010.3 ~ 현)대구가톨릭대학교 역사교육학과 산학협력교수
2007.9 ~ 현)동국대학교 국사학과 겸임교수
2005.8 ~ 현)(사)신라문화진흥원 부이사장.
신문왕은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의 맏아들로 태자 시절 소판(蘇判: 신라17관등 중에서 3관등) 김흠돌(金欽突)의 딸과 결혼하였다. 문무왕이 죽자 대를 이어 왕이 되었지만 문무왕의 상중(喪中)에 장인인 김흠돌이 반란에 연루되자 장인을 죽이고 왕비를 궁궐에서 내친 비운의 왕이기도 하다.

장인 김흠돌이 난을 일으킨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들이 있지만 진덕여왕 이후로 신라 왕족으로서 왕위계승권을 가지는 초월적인 성골(聖骨)에서 왕위계승권이 없는 왕족이었던 진골(眞骨)인 무열왕계에 대한 도전이라는 해석이 역사학계의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견해이다. 부언하여 본다면 진지왕 이후 진평왕에게 왕위 계승권을 빼앗긴 후 다시 진덕여왕으로부터 왕위 계승권을 되 찾아온 무열왕계는 취약한 정치적인 기반과 함께 끊임없이 왕권에 도전하는 반대세력들이 있었다. 이는 선덕여왕 말기와 진덕여왕 즉위초에 있었던 비담과 염종의 난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불안정한 시기에 문무왕이 오랜 질병으로 임종을 맞이하게 되자 태자에게 유언으로 자신의 관(棺) 앞에서 즉위식을 올려 왕위를 계승함으로써 반대세력에게 기회를 주지 말 것을 강조하게 된다. 아마도 그것은 문무왕 자신이 아버지 태종무열왕을 따라 평생 전쟁터를 누벼 삼국통일을 이루었고, 당나라의 요청으로 고구려와의 전쟁에는 아버지의 상중에서도 출전하여 이룬 대업이 무너질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 신문왕릉(경주시 보문동 608) . 사진은 현재 사적 제180호로 지정되어 있는 진평왕릉이다. 그러나 이곳은 문헌기록과 고분의 구조(構造)와 호석(護石) 등을 감안해 본다면 신문왕릉일 가능성이 높다. 현재의 신문왕릉(경주시 배반동 453-1)은 신문왕의 아들인 효소왕의 능이다. 혹 유홍준 선생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진평왕릉으로 찬미되어 있는 왕릉이라 답사인들에게는 매우 혼란스러울지 모르지만 계절 따라 변하는 왕릉의 아름다움에는 변함이 없다.<사진및 글 = 김호상>
그러한 아버지의 염려덕분에 신문왕은 어수선한 상중에 일어난 반란사건이었지만 무사히 반란군을 진압하고 병부령(兵部令)을 맡으며 반란의 기미를 알아차리고도 조취를 취하지 않은 이찬(신라17관등 중에서 2관등) 군관(軍官)을 본 보기로 목 베고 교서를 내렸다. 교서에 이르기를 ‘임금을 섬기는 법은 충성을 다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벼슬살이하는 도리는 두 마음을 가지지 않는 것을 으뜸으로 여긴다. 군관은 반열의 순서에 따라 마침내 높은 지위에까지 올랐으나, 임금의 실수를 챙겨주고 결점을 보충하여 결백한 절개를 조정에 드러내지 않았고 임금의 명령을 받음에 제 몸을 잊으면서 사직(社稷)에 붉은 충성을 표하지도 않았다.

이에 역신(逆臣) 흠돌과 사귀면서도 일찍이 반역을 알리지 않았으니, 이는 이미 나라를 걱정하는 생각이 없을 뿐 아니라 공사(公事)를 위하여 몸 바칠 뜻도 없는 것이니, 어찌 중요한 재상자리에 두어 국가의 규범을 함부로 흐리게 할 것인가? 마땅히 반역의 무리들과 함께 처형함으로써 뒷사람들을 경계시키노라. 군관과 그의 친아들 한 명을 자살케 할 것이니 멀고 가까운 곳에 포고하여 이것을 함께 알게하라!’ 하였다.

신문왕은 즉위 3년에 태종무열왕과 출전하여 백제와의 양산(陽山)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김흠운(金欽運)의 작은딸을 최상의 예를 갖추어 두 번째 왕비로 맞아들여 종묘사직을 이었다. 또 그는 재위기간 중에 봉성사와 망덕사를 완성하였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예기(禮記)와 문장(文章)을 청하였다. 이에 측천무후(則天武后)는 담당관청에 명하여 길흉요례(吉凶要禮)를 베끼고 문관사림(文館詞林) 가운데 모범으로 삼을 만한 글을 골라 50권의 책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는 신문왕 2년 6월에 설치한 국학(國學)운영을 활성화하여 인재를 길러내고 나라의 수준을 높이고자 하는 뜻으로 생각되어진다.

이외에도 중앙과 지방관리들의 녹읍(祿邑)을 폐지하고 해마다 조(租)를 차등 있게 주어 일정한 법으로 삼았으며, 도읍을 달구벌(達句伐: 대구광역시 중구)로 옮기려는 시도를 하는 등 신라 중대의 왕권 강화와 나라의 융성을 도모하였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혼란하자 재위 7년(A.D687) 조상의 무덤에 신하를 보내어 제(祭)를 올리며 전하기를 ‘요즈음 임금으로서 할 바 도(道)를 잃고 의리가 하늘의 뜻에 어그러졌음인지, 별의 형상에 괴변이 나타나고 해는 빛을 잃고 침침해지니 몸이 벌벌 떨며 마치 깊은 못과 골짜기에 떨어지는 것만 같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미미한 정성을 밝게 살피시고 하찮은 이 몸을 불쌍히 여기시어 사철 기후를 순조롭게 하시고 오사(五事: 자신을 잘 다스리고, 여자를 잘 다스리며, 신하를 바로잡고, 功과 賞의 실질을 얻고, 관리에게 후덕하여 그들을 선량하게 하는 것)의 징후에 허물이 없게 하시며 곡식이 잘 되고 질병을 없게 하며 입고 먹는 것이 넉넉하고 예의를 갖추며 안팎이 편안하고 도적이 사라지며 넉넉한 것을 자손들에게 남겨 길이 많은 복을 누리게 하여 주십시오’ 라고 빌었다.

이러한 신문왕의 뜻이 [삼국유사]에 기록된 만파식적의 설화가 탄생되는 배경이 아닌가 생각된다. [삼국유사]에 신문왕의 즉위 이듬해 5월 초하루 해관(海官)으로부터 ‘동해안에 작은 산이 떠서 감은사(感恩寺)로 향해 오는데 물결을 따라 왔다 갔다 합니다.’ 라고 보고받았다. 이를 이상히 여겨 일관(日官)에게 점을 치게 하였더니 바다의 용이 되신 아버지 문무왕과 33天의 한 아들인 김유신 두 성인께서 나라를 지킬 보물을 주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동해바다로 가서 대나무를 얻었다. 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낫고, 가물 때는 비가오고, 비올 때는 비가 개고, 바람이 가라앉고, 물결이 평온해져서 이 피리를 만파식적(萬波息笛:온갖 파도를 가라앉히는 피리)라고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는 기록은 우리들에게 익숙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아버지의 상중(喪中)에 왕비의 아버지가 반란을 일으키고, 가장 믿었던 신하가 암묵적으로 반역에 가담한 것을 알았을 때 신문왕이 느꼈을 인간적인 배신감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그에 굴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나라를 반석위에 올려놓았다. 신문왕은 솜털 같이 가벼운 권력과 달팽이 뿔에 올라앉은 듯한 위태로운 현실을 겸허하고 또 조심스럽게 극복해 냄으로써 오늘날의 우리에게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 또 하나의 본 보기를 제시해 주고 있다.

신문왕의 이야기를 오늘날에 비추어 본다면 대통령은 험난한 길을 헤쳐감에 있어 무엇보다도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여야 할 것이며,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하더라도 자식에게 지는 부모님의 마음을 가진다면 좋은 대통령이 될 것이다. 반면에 대통령을 견제하는 국민의 대표 국회역시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이므로 한발 물러서서 인내를 갖고 일할 수 있는 시간과 권한을 인정해 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국회와 대통령이 이와 같은 마음으로 두 손을 마주친다면 우리에게 새로운 新만파식적의 평화로운 시대가 돌아오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어제 여야는 정부조직법 개정안 협상을 타결하였다. 늦은 만큼 국민들이 원하는 국회와 정부가 되길 바래본다.
 

경주포커스 후원은 바르고 빠른 뉴스제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