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속에서 역사를 찾아내는 연구자들
흙속에서 역사를 찾아내는 연구자들
  • 경주포커스
  • 승인 2013.04.24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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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김호상 문화유산 둘러보기
▲ 국비지원 발굴현장(경북 상주시 성동동 81). 발굴조사 대상지는 상주 복룡동유적(사적 제477호)과는 92.4m로 인접해있으며, 발굴조사결과 통일신라시대 건물지 2동, 지진구(건물의 기단부를 조성할 때 땅속에 있는 나뿐 기운을 진압하려는 목적으로 넣는 물건) 2기, 냇돌로 채워 만든 건물지 기둥자리 12기, 담장흔적 1개소, 도랑흔적 3개소, 구덩이 1개소가 확인되었다. 4월12일 부터 5월 24일까지 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서는 성동동 81-1번지 유적에 대하여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있으며, 조사에 방해가 되지 않는 한 시민들의 발굴현장 견학은 가능하다고 합니다. 출처) 한국문화재보호재단, 2013. 4, [상주 성동동 81번지 자문회의 자료집] 기타) 국비지원 발굴조사의 대상은 단독주택과 개인사업자의 사업용 건축물(대지면적 792제곱미터 이하의 건축연면적 264제곱미터 이하), 농업인과 어업인 또는 공장부지 사업목적에 필요한 건축물(대지면적 2,644제곱미터 이하의 건축연면적 1,322제곱미터 이하)에 대한 발굴조사비용은 문화재보호법에 근거하여 국비를 지원받을 수 있다.

고고학의 한 분야인 발굴조사는 역사책이나 금석문에서 확인할 수 없는 다양한 역사적 유적(遺蹟)이나 유물(遺物)을 찾아내고 그 것을 분류 정리하여 연구자들에게 실증적이고도 물증적인 기초 자료를 제공한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고대의 문헌자료가 극소수에 불과한 나라에서 이러한 작업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일반적으로 발굴조사는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를 거쳐 실시되는 매우 힘들고 인내력을 요하는 과정이다.

혹한의 겨울 볕 하나 없는 산 속에서, 그늘 한 점 없는 폭염의 허허벌판에서 오로지 책임감 하나로 턱없이 부족한 발굴비용과 촉박한 시간을 감수하며 개인으로서의 생활은 포기한 채 현장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발굴조사에 참여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이러한 힘들고 고된 과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발굴조사가 종료될 즈음 현장지도위원회를 통해 전문가와 일반인들에게 조사와 관련된 자문을 구하는 동시에 유적과 유물을 공개하게 되는데, 그때 매스컴 등으로 공개되어지는 현장은 말끔하게 정리되고 정돈되어 지금껏 조사자와 인부들이 쏟아 부었던 땀과 얼룩의 과정은 자취를 감추고 그 결과만 보여지게 되기 때문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일반인들이 흔히 생각하듯 고고학은 광활하기만 한 현장을 붓 한 자루 달랑 들고 세월도 없이 붓질하는 정적인 공간도 아니며, 그렇다고 연구자들이 하루 종일 토기편만 붙들고 완성된 하나의 토기를 만들어내기만 하는 간단한 과정도 아니라는 것이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땅속의 보이지 않는 유적과 유물을 찾아내고 그것이 땅속에 묻히기 전과 같은 형태와 상황으로 보여 지고 이해되어 질 수 있도록 수많은 생각과 고뇌를 반복하고 수많은 삽질과 노동으로 노출되어지는 고통의 과정이며 결과물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문화재발굴조사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인 연구자들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이후 수많은 우여곡절과 열악한 여건을 견뎌내 현재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얻어내고 있고 더 나아가 세계적으로도 중요한 조사 성과를 이끌어 내고 있다. 특히 1980년대부터는 다수의 대학박물관이 발굴조사에 참여하게 되었고, 1990년대 중반부터는 급격한 국토개발에 의해 발굴조사업무의 폭증이 야기되면서 전국에서 다수의 문화재조사연구기관들이 설립되었다.

이로인하여 전국적인 국토개발에 따른 대규모 발굴조사가 진행되어 이전까지 국내에서 잘 조사되지 않았던 제철유적, 생활유적, 생산유적, 도시유적을 비롯해 선사유적이 확인되어, 우리의 역사연구에 많은 새로운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문화재조사연구기관들이 속속들이 문을 열어 현재 약 70여 개에 이르는 기관들이 매장문화재의 조사와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분야도 그렇겠지만 갑작스런 규모의 팽창은 그에 수반된 만만치 않은 반작용을 야기하기 마련이며, 현재 문화재조사연구기관들이 바로 이러한 문제점에 직면해 있다. 양적 팽창에 따라가지 못하는 질적 팽창은 기존의 제도로는 더 이상 효율적인 기관의 운영을 기대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는 수적인 팽창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연구수준의 향상보다는 의뢰인과 의뢰기관에 휘둘리고 민원 등으로 인하여 설립의 목적에 서 벗어나게 되면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발생되었을 뿐만 아니라 연구자들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졌다.

 
1967년 경북 청송 출생
1985년 동국대학교 입학
2003년 대구가톨릭대학교 박사학위 취득
1993.3 ~2005.1 동국대학교 경주박물관 조교, 연구원, 전임연구원
2005.1 ~ 2011.12 (재)신라문화유산연구원 조사연구과장, 조사실장
2012.3 ~ 현)위덕대학교 박물관 전임연구원
2010.3 ~ 현)대구가톨릭대학교 역사교육학과 산학협력교수
2007.9 ~ 현)동국대학교 국사학과 겸임교수
2005.8 ~ 현)(사)신라문화진흥원 부이사장.
발굴조사의 기법과 성과는 괄목할 만한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였지만 매장문화재의 조사에 대한 행정적 지침이나 법률적 지원은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 국토의 무분별한 개발 속에 쏟아지는 매장문화재의 조사량을 힘겹게 감당해 오던 문화재조사기관들이 뒤돌아 볼 시간적 여유도 없었던 현실을 이제서야 감당하게 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는 국가 주도의 경제성장정책이 나은 맹점인 동시에 현실에 안주하고 여지껏 개선의 여지를 보이지 않았던 문화재조사연구기관 모두의 안일함이 나은 결과인 것이다.

더불어 기술의 발달에 따른 각종 장비의 투입 등은 현장의 연구자들에게 많은 위안이 되고 있지만 정작 현장에서 힘든 현실을 견디며 묵묵히 문화재 조사에 여념이 없는 연구원들의 낮은 보수와 열악한 처우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직접적인 복리와 후생에 있어서는 십여 년 전과 비교해 전혀 개선되지 않거나 개선되어지는 타분야와 비교해 오히려 열악해 지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비단 어느 한 기관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내외의 모든 문화재기관들의 현상이 되고 있다.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소중한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보호하여 후손들에게 전해주어야 하는 것이 현재의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임무이다. 그러나 매장문화재의 연구와 조사에 있어 국민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한다면 지난 수 십 년간 문화재보호법으로 인하여 피해를 감수했던 그 아픔과 인내가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가는 허망함을 느낄런지도 모른다. 적극적 민원의 해결을 통해 개인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노력하는 것이 모든 문화재 조사연구기관의 우선적으로 해결해야할 과제이며 마땅한 역할이다. 그와 동시에 질적 성장 없이 덩치 큰 어린애가 돼버린 우리 연구기관들이 스스로 성장하고 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을 지켜봐주고 격려해주는 국민들의 아량을 기대하는 것이 욕심이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오늘도 이 글을 쓰면서 문화재청이나 문화재조사연구기관을 운영하는 분들에게 애처롭고 가냘 푼 후배연구자들의 요구와 불만을 목 놓아 대변해주지 못하고, 떠나지 말고 조금 더 참고 견디어주기를 바라는 나 자신이 너무 비겁한 선배라는 사실을 지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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