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왕의 비편과 추사 김정희
문무왕의 비편과 추사 김정희
  • 경주포커스
  • 승인 2013.09.03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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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김호상, 문화유산 둘러보기

 
1967년 경북 청송 출생
1985년 동국대학교 입학
2003년 대구가톨릭대학교 박사학위 취득
1993.3 ~2005.1 동국대학교 경주박물관 조교, 연구원, 전임연구원
2005.1 ~ 2011.12 (재)신라문화유산연구원 조사연구과장, 조사실장
2012.3 ~ 현)위덕대학교 박물관 전임연구원
2010.3 ~ 현)대구가톨릭대학교 역사교육학과 산학협력교수.
668년 고구려를 평정한 문무왕은 김유신에게 태대각간(太大角干)을, 김인문에게 대각간(大角干)의 관등을 주는 등 모든 공로자에게 포상을 실시하였다. 그 다음해인 재위 9년(669) 2월 21일에는 백성들에게 사면과 세금감면을 하도록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교서를 내렸다.

지난날 신라는 두 나라 사이에 끼어 북쪽을 정벌하고 서쪽을 침공하여 잠시도 편안할 때가 없었다. 병사들의 해골은 들판에 쌓였고 몸과 머리는 서로 떨어져 먼 곳에 뒹굴게 되었다. 선왕(태종무열왕)께서는 백성들이 참혹하게 해를 당함을 불쌍히 여겨 천승(千乘: 전쟁에 전차 1천대를 동원할 수 있는 제후)의 귀하신 몸을 생각지 않으시고 바다를 건너 중국에 들어가 조회하고 황제께 군사를 청하셨다. 이는 본래 두 나라를 평정하여 영원히 싸움을 없게 하고, 몇 대에 걸쳐 깊이 쌓인 원수를 갚으며 백성들의 가냘픈 남은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심이었다.

선왕께서는 백제를 평정하였으나 고구려는 아직 멸망시키지 못하였는데, 과인이 평정을 이루시려 던 유업을 이어받아 마침내 선왕의 뜻을 이루게 되었다. 지금 두 적국은 이미 평정되어 사방이 조용하고 편안해졌다. 전쟁터에 나아가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는 이미 모두 상을 주었고, 싸우다 죽은 혼령들에게는 명복 빌 재물을 내려주었다. 다만 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죄인을 보고 불상이 여겨 울어주던 은혜를 받지 못하였고, 칼을 쓰고 쇠사슬에 묶여 고생하는 사람들은 아직 새롭게 시작할 은혜로운 혜택을 입지 못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생각하니 먹고 잠자는 것이 편안하지 못하다.

▲ 추사 김정희 고택에 걸린 주련(호고유시수단갈: 옛것을 좋아해 때때로 깨어진 비편을 찾는다.) 사천왕사 터 남쪽 구릉하단 출입구 쪽에는 동서로 마주하여 목이 잘려나간 귀부 2기가 있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경주부윤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가 정조 20년(1796) 문무왕릉 비편 두 개를 선덕여왕릉 아래 신문왕릉 사이에서 확인하였던 것을 알고, 1817년 또는 1824년 경주에 와서 재확인 후 비의 내용과 비편을 비좌에 꽂아보니 크기가 일치하였다고 한다. 한편 추사는 이 비편을 탁본하여 청나라의 금석학자 유희해(劉喜海, 1793~1853)에게 보냈으며, 유희해는 그가 쓴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그 내용을 기록하여 전해져오고 있다. 유희해는 네 장의 탁본을 각각 제 1, 2, 3, 4석으로 호칭하여 4개의 비편으로 파악하였으나, 실제는 2개의 비편 앞뒤 면에 새겨진 것이다.이외에도 추사는 암곡동 무장사 터에서 [아미타여래조상사적비] 비편 두 개를 찾아내어 그 소감을 비편에 기록하였고, 또 분황사로 가서 고려시대에 세운 원효스님의 [화쟁국사비]를 답사하고 역시 짤막한 문구를 비의 대좌에 새겨놓아 현재까지도 그의 서체를 볼 수가 있다.

나라 안의 죄수들을 사면하고자한다. 총장 2년 2월 21일 새벽이전에 5역(五逆: 임금,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를 죽이는 죄악)의 죄를 범하여 사형을 받은 죄목 이하로서 지금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은 죄의 크고 작음을 따지지 말고 모두 석방하고, 앞서 사면해준 이후에 또 죄를 범하여 관작을 빼앗긴 사람은 모두 그 전과 같게 하라.

남의 것을 훔친 사람은 다만 그 몸을 풀어주되, 훔친 물건을 돌려줄 재물이 없는 자에게는 징수의 기한을 두지 말라. 백성들이 가난하여 다른 사람에게 곡식을 빌려 쓴 사람으로서 흉년이 든 지방에 사는 사람은 이자와 원금을 모두 갚을 필요가 없고, 풍년이 든 지방에 사는 사람은 곡식이 익을 때에 이르러 단지 원금만 갚고 그 이자는 갚을 필요가 없다. □□30일을 기한으로 하여 담당관청에서는 받들어 행하라하였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에게 포상을 내렸지만 유독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포상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아술지역(충남 아산시 영인면)의 사찬 구율(求律)인데 [삼국사기]에 구율은 ‘사천 싸움에서 다리 아래로 내려가 물을 건너 진격하여 적과 싸워 크게 이겼는데, 군령을 받지 않고 스스로 위험한 곳에 들어갔기 때문에 공은 비록 제일이었으나 포상되지 않았다.’ 라고 기록되어있다.

오늘날 우리사회에서는 과정보다 결과를 중요시하는 분위기가 대세를 이루고 있지만, 문무왕이 구율에게 포상을 내리지 않았던 이유는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것은 과정이 올바른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성공을 이룩할 수 있지만 그 성공이 가져다주는 의미는 작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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