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 후손들의 몰락을 통해본 권력
김유신 후손들의 몰락을 통해본 권력
  • 경주포커스
  • 승인 2013.10.04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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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김호상, 문화유산 둘러보기

▲ 대릉원지구 위성사진(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자료 인용)대릉원(大陵苑)은 1970년대 초에 조성된 고분공원이다. 일반인들에게는 천마총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대릉’이라는 이름은 미추왕이 죽은 뒤 ‘대릉(大陵)에 장사지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따온 것이다. 이곳에 미추왕의 능으로 전해오는 무덤이 있다. <글, 사진 = 김호상 제공>

[삼국사기]에 의하면 김유신의 아버지 서현(舒玄)이 길에서 갈문왕(葛文王: 왕족 및 왕비족의 남성으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 중요인물에게 왕이 책봉함) 입종(立宗)의 아들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을 보고 마음에 들어 눈짓으로 꾀어 중매를 거치지 않고 결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만명은 아버지 숙흘종이 금관가야 왕족과의 결혼을 반대하자 집을 도망쳐 나와 만노군(萬弩郡: 충북 진천) 태수로 부임하는 김서현을 따라가 김유신을 낳았다.

김유신의 할아버지 무력(武力)과 아버지 서현은 금관가야의 왕족출신이었지만, 신라의 전통귀족들은 금관가야의 왕족을 매우 배타적으로 대하였다. 김유신은 이러한 점을 극복하고자 외부적으로는 김춘추와 손을 잡고 정치적 실력을 쌓았으며 뛰어난 군사활동을 통하여 위기의 신라를 구해 내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내부적으로는 선덕여왕 말년에 일어난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의 반란을 진압하였고, 진덕여왕이 죽자 무력을 배경으로 알천(閼川)의 양보를 이끌어 내어 김춘추를 왕위에 앉힘으로서 당대 최고의 권력자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김유신은 권력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솔선수범하여 전장에 출전하는 등 용맹을 떨쳐 신라인들로부터 삼국통일의 영웅으로 받들어져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되었다.

김유신이 죽은 후에도 자손들은 그의 후광을 입어 높은 벼슬을 지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중앙정계에서 자손들이 소외되어 가던 중, 혜공왕 6년(770) 후손 김융(金融)이 반란사건에 몰려 죽음을 당하는 일이 생겼다. 그로부터 몇 년 뒤인 혜공왕 15년(779)에 갑자기 김유신의 무덤에 회오리바람이 일더니 말을 탄 장군과 군사 40여 명이 나와 미추왕릉(味鄒王陵)으로 들어갔다.

 
1967년 경북 청송 출생
1985년 동국대학교 입학
2003년 대구가톨릭대학교 박사학위 취득
1993.3 ~2005.1 동국대학교 경주박물관 조교, 연구원, 전임연구원
2005.1 ~ 2011.12 (재)신라문화유산연구원 조사연구과장, 조사실장
2012.3 ~ 현)위덕대학교 박물관 전임연구원
2010.3 ~ 현)대구가톨릭대학교 역사교육학과 산학협력교수.


 

잠시 후 무덤 속에서 후손들이 무고하게 핍박당하고 있음을 하소연하며 다른 곳으로 떠날 것을 허락해 달라는 김유신과 그를 말리는 미추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끝내 허락을 얻지 못하자 회오리바람은 다시 김유신의 무덤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 설화를 통해 김유신의 가문이 8세기 후반부터 서서히 몰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삼국통일 최대의 공로자인 태대각간(太大角干) 김유신의 가문마저 시간이 지나면서 몰락해간 것처럼 왕이 바뀌거나 나라가 바뀔 때에는 세대와 세력이 교체되는 것은 역사의 기록을 보지 않더라도 오늘날의 현실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권력은 늘 변화하고 사라진다는 사실을 누구나 다 알고 있으면서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잡으면 그 권력의 속성을 쉽게 잊어버리고 어느 순간 무너지는 자신을 보게 된다면 비애감은 더 없이 클 것이다.

요즈음 정치사회면을 장식하고 있는 권력의 변화를 보면서, 우리사회에 힘 있는 기관의 사람들과 나를 포함한 일반 시민들 역시 이러한 어리석음을 되풀이 하지 않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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