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우한 나와 어리석은 백성을 구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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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포커스
  • 승인 2014.07.07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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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둘러보기] 최제우 선생 생가 복원준공에 부쳐

▲ 수운 최제우 선생 복원생가 안내도(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수운의 생가는 몇 차례의 화재로 인하여 아버지 때에 보수와 개수를 하였지만, 그 마저도 수운이 20세가 되던 1843년의 화재로 인하여 생가는 완전하게 소실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일을 계기로 처가인 울산으로 이사하였지만, 선생이 다시 돌아왔을 때 용담의 집을 수리하여 살았던 것을 보면 복원된 이곳의 생가는 다시 개수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 곳 생가 터에는 1969년 11월 9일 문화공보부로부터 비지정문화재로 지정받아 유허비가 세워졌다. 생가의 원래 모습은 [근암집]의 기록 등으로 보아 영세양반의 집으로 추정되지만, 복원된 생가는 양동민속마을에 있는 양반집들을 참고하여 현대적으로 복원한 것이다. <글,사진=김호상>
동학(東學)의 창시자 수운(水雲) 최제우(1824~1864)선생은 순조 24년(1824) 10월 28일 경주 가정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원래의 이름은 제선(濟宣)이었다. 선생의 가문은 7대조인 최진립(崔震立)장군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혁혁한 공을 세워 병조판서의 벼슬을 지냈지만 후손들이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몰락한 양반가였다.

선생은 13세에 결혼하지만, 이미 10세에 어머니를 17세에 아버지 상(喪)을 당한 뒤 과거로 입신출세할 길이 막혀 있는 상황에서 스스로 생계를 찾아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동안 갖가지 장사와 의술 등의 잡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는 등 10여년에 걸친 방황을 하게 되었다.

그런 나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해결방안을 찾을 수 없자 처가가 있는 울산 유곡동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생활도 자신이 추구하였던 삶의 틀을 찾지 못하였다. 다시, 처자를 거느리고 고향 경주 용담으로 되돌아왔지만 절망적인 가세(家勢) 뿐만 아니라 국내 상황마저 삼정(田政, 軍政, 還政=환곡)의 문란과 잦은 자연재해 등으로 인하여 사회가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 김호상
1967년 경북 청송 출생1985년 동국대학교 입학
2003년 대구가톨릭대학교 박사학위 취득
1993.3 ~2005.1 동국대학교 경주박물관 조교, 연구원, 전임연구원2005.1 ~ 2011.12 (재)신라문화유산연구원 조사연구과장, 조사실장2012.3 ~ 현)위덕대학교 박물관 전임연구원2010.3 ~ 현)대구가톨릭대학교 역사교육학과 산학협력교수.
이러한 암울한 시대에 그는 한울님의 뜻을 알아내는데 유일한 희망을 걸고 자신의 이름 ‘제선(濟宣)’을 ‘어리석은 백성을 구한다.’는 뜻을 가진 ‘제우(濟愚)’로 고치고 또한 ‘자신의 큰 뜻을 이루기 전에는 세상을 다시는 나가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고 구도(求道)의 길을 계속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최제우는 양반지배사회가 당면한 국내외적 난국을 극복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전통사상의 재구성을 통하여 보다 더 근본적인 종교윤리와 인간관계의 회복을 주장하는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핵심으로 한 동학을 창시한다. 이를 널리 알리고자 포교를 시작하면서, 많은 신도가 그의 가르침인 동학을 따르게 되었다.

동학이 세력을 얻게 되자 기존의 유림층에서는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져 서학(西學), 즉 천주교를 신봉한다는 지목을 하게 되었다. 이에 조정의 탄압으로 그는 호남에 있던 은적암으로 피신생활을 하면서 동학사상의 이론적인 체계를 세웠다. 선생이 다시 경주에 돌아와 포교에 전념하여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는데, 1862년 사술(邪術)로서 백성을 현혹시킨다는 이유로 경주진영(慶州鎭營)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석방을 청원하여 무죄로 방면되면서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에 이르기까지 교세가 확장되어 1863년에는 13개소의 접소(接所)에 교인 3,000여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관(官)의 압박으로 최시형(崔時亨)을 2대 교주로 삼고,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던 중 철종이 죽자 1864년 1월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심문을 받다가 3월 10일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41세의 나이로 효수(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달아두는 형벌)형에 처해졌다. 이후 동학은 외국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보호하고자 노력이 농민들 사이에 급속하게 퍼져서 일어난 중대한 사회적인 사건이 바로 1894년 농민이 주체가 된 변혁운동이 되었다. 이것을 우리는 동학혁명이라고 부른다.

동학혁명은 신분제도를 폐지하고 봉건체제를 붕괴시켰다는데 큰 의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시대적인 상황에서 반외세 반침략에 대항하는 선구자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선생은 무엇보다도 포교의 방법에 있어 중요시한 것은 교세의 확장이 아니라 마음을 닦는 데 힘쓰며, 오직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을 신도들에게 늘 경계하게 한 것이었다. 선생의 그러한 신념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동학은 한국 근대의 대표적인 종교가운데 하나로서 나라의 잘못을 개혁하고 인민들의 삶을 지키고자 노력했던 것으로 역사에 평가받고 있다.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 선생의 생가복원은 우리의 문화유적을 되살리는 소중한 일이라 생각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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