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개...그 많던 절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
99개...그 많던 절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
  • 김종득 기자
  • 승인 2015.04.05 14: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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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차 둘렛길 기록

 

 

 
일시 : 2015년 3월21일
날씨 : 맑음
이동구간 : 암곡동 주차장~무장봉~성황재 (13.7㎞.5시간 21분)
인원 : 18명

9시30분. 암곡동 주차장을 조금 지난곳에서 23차 둘렛길을 시작했다.

2009년 드라마 선덕여왕이 인기를 끈이후 암곡동 버스 정류장 부근, 무장봉 입구 풍경은 그사이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미나리와 삼겹살, 찻집등 등산객들을 위한 음식점이 즐비하다.

▲ 무장봉을 초입에서.
▲ 불어난 물이 길 곳곳을 개울로 만들었다.


▲ 억새가 시작되는 곳.

암곡동은 동네이름이 여러번 바뀐 것으로 전한다.
원래 깊은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로 내내 빛이 들지 않는 어두운 곳, 암곡(暗谷) 또는 암실이라고 불렀다.
그러다 조선중엽에는 한때 명곡 明谷으로 정반대의 이름으로 변경된다.
그후 다시 조선중엽에 이르러 남해창 공(公)이 암(暗)을 쓰면 밝음(明)이 온다고 하여, 다시 암곡으로 바꾸어 불렀다고 한다.

삼국을 통일한 무열왕이 병기와 투구(무. 鍪)를 묻었다는 절, 평화의 염원이 서린곳으로 해석되는 무장사 (鍪藏寺가 있었다고 해서 산이름 혹은 봉우리 이름이 붙여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무장산과 무장봉으로 뒤섞어 불렸던 봉우리 이름은 2010년 5월 경주시 일요산악회가  동대봉산 무장봉이라는 정상 표지석을 세운 이후부터 동대봉산의 자봉, 동대봉산 무장봉으로 정리가 된듯하다.

1996년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정상 부근 오리온 목장이 사라지고 이 지역 목초지는 거대한 억새밭으로 방치됐다. 그러다가 2009년 드라마 선덕여왕의 촬영지로 시선을 크게 모았다.
그뒤부터 가을이면 경주지역 수많은 산중에서 외부 등산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곳으로 변했다.
사람이 모이니 음식점이 들어섰고, 경주시는 주차장을 확충했다.

 

동대봉산이라는 이름에도 백성들의 아픔이 묻어있다.
산 이름에는 2개의 유래가 전한다.
하나는, 동해를 향해 병품처럼 띠를 두른 듯한 산이라 해서 동대봉(東帶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다른 유래는 백성들의 삶과 닿아 있다.
조선시대 수군의 조선용 자재림이 있던 산이었기 때문에 입산금지의 뜻으로 봉산(封山)이라고 했다. 백성들이 땔감을 하기 위해, 나물을 캐기 위해 함부로 드나들지 못했다는 말이다.
산세가 험하고 봉산이었던 까닭에 자연스레 산림이 울창했다.
수영 통제영에서 파견나온 관리가 산을 감시하고 도벌을 막었는데, 민폐가 심했다고 한다.

▲ 무장봉의 억새는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고 있다.

당시는 밥을 짓거나 난방용으로 땔나무를 쓰던 시절이었으므로 백성 누구나가 단속의 대상이었다.

통제영에서 나온 통영차사는 적딩한 부자를 잡아들여서는 무조건 매를 친다. 그러면 지레 겁을 먹은 다른 부자들은 우선 매맞는 것만 피하고자 통제영의 호출을 받으면 품값을 주고 사람을 구해 대신 매를 맞게 한다. 그 결과 통영 매품간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매안맞기 위해 관리들을 구워삶았음은 자명한일.
이렇게 하여 동대봉산은 민원의 대상이 되었고, 급기야는 고의적인 방화까지 겹쳤다고 전한다.
백성들이 내지른 산불, 동대봉산의 산불은 이 지방의 명물이 되었고 민요의 한 대목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권오찬 선생이 지은 <신라의 빛>에는 “불붙었네, 불붙었네 동대봉산 불붙었네 동대봉산 붙은 불은 동해물로 끄련마는 요내 가슴 붙은 불은 어느님이 꺼줄는고”라는 민요를 채록해 두었다고 한다.

▲ 무장봉 정상표지석.2010년 일요산악회에서 세웠다.

무장봉으로 오르는 계곡으로 접어들자 물소리가 시원했다. 며칠전 내린 봄비 덕이다.
계곡초입에서 징검다리 개울을 대 여섯 번 지나 억새밭 입구 화장실이 있는곳까지 거리는 얼추 4㎞. 그곳부터 무장봉까지 약 2㎞에 걸쳐 억새밭이 장관을 이룬다.5년전 정상석을 세울때만해도 어수선 했던 무장봉은 말끔하게 새단장했다.

무장봉에서 동쪽으로 400m 가량 이동하는 곳에서 포항과 경주의 경게가 만난다.
포항시 오천읍 진전리 경주시 암곡동의 경계는 지난달 22차 둘렛길에서 무장봉으로 접어들면서 잠시 경주쪽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만난 것.

곧장 좁은 산길이 이어진다.
동대봉산 무장봉 억새밭이 고속도로라면 여기서부터는 시골 비포장길이 이어지는 셈이다.

▲ 그 옛날부터 사람들이 다닌 흔적이 쌓이고 쌓여 길이 된다. 

한동안 해발고도 540m대의 완만한 오르막 내리막을 반복한다.
오른쪽으로 저멀리 덕동호가 있을테지만 시야에는 들어오지 않는다.
왼쪽을 포항으로, 오른쪽은 덕동호 방향 경주국립공원 토함지산지구다.

그 호수안에는 마을과 함께 사람들의 기억과 추억이 잠겨있다.
수몰되면서 사라진 덕동은 경주에서 감포로 가는 길목에서 암곡동으로 들어가는 삼거리가 있던 곳에 있었다.
마을사람들의 인심이 후하고 심성이 착해 덕을 이룰수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덕골이라고 불렀다고도 전한다.
명실의 남동쪽에 유리보석을 캣다하여 불렸다던 유리방, 신라 31대 신문왕때 고승 원효가 있었다던 절 고선사도 물속으로 잠겼다. 수천년 내려온 문화유산, 그속에 살던 사람들의 추억과 기억은 모두 물속으로 사라졌다.

 

무장봉을 지나 약 1㎞거리. 출발지에서 7.1㎞ 지점에서 해발고도 620m 높이의 봉우리를 넘는다.
여기서부터 절골까지 약 600m 정도의 이동구간은 제법 경사가 심한 내리막이다.
그 내리막끝, 오른쪽으로 절골로 이어지는 긴 골짜기, 옛길이 희미하게 보였다.

덕동호를 끼고  감포방면으로 향하다 굽이길이 끝나 직선도로를 잠시 달려 황룡교를 건너기 긱전 왼쪽으로 난 길이 절골로 향하는 길이다. 요즘도 황룡사라는 이름의 절이 있는 골짜기다.
신라때는 황룡사 등 99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하여 절골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모차골 서쪽에 있는 이 골짜기는 황룡사 입구에 짚신을 벗어놓고 99개의 암자를 다 돌아보고 나면 짚신이 썩어서 못신을 정도로 많은 절이 있었다고도 전한다.
그 뒤로 양북면 호암리 세수방으로 넘어가던 한팃재가 있다.

▲ 지나온 산길은 돌아보면 지척이다. 삼거리봉에서 무장봉쪽을 바라본 사진.
▲ 삼거리봉에서 휴식을 취했다.

여기서부터는  양북면이다.
절골 갈림길에서 해발고도 585m 삼거리봉까지 800m의 산길은 완만한 오르막이다.
삼거리봉 바로아래, 출발지에서 약8,6㎞지점, 무장봉에서 약 2.6㎞지점에는 산사태의 흔적이 뚜렷했다

출발지에서 8.8㎞, 무장봉에서2.7㎞ 지점의 봉우리가 삼거리봉.
오른쪽으로는 토함산으로 향하는 길, 왼쪽으로는 함월산 기림사 뒤편 포항과 경주의 경계가 이어진다.
여기까지 출발지에서는 2시간30분. 무장봉에서는 약 1시간 가량 소요됐다.

양지 바른 곳, 어김없이 봉분이 닳아 사라진듯한 무덤하나가 있다.
휴식하기에 가장 좋은곳.
2,7㎞를 지나왔지만, 무장봉은 손에 잡힐듯 한눈에 들어온다.

오천읍 향사리와 경주시 황용동을 경계한 둘렛길도 사람 한사람 다닐만한 편안한 길이다.

▲ 산사태 흔적. 왼쪽 포항방면으로 산사태가 났다.
 

삼거리봉에서 약 1.2㎞, 출발지에서 10㎞ 지점은 산사태가 제법 크게 나 있었다.
폭이 족히 30m 넘을 성 싶은 큰 상채기가 포항방면 가파른 경사따라 푹 내려 앉아 있었다.

해발고도 370m 높이 까지 내려갔던 둘렛길은 삼거리봉에서 3.9㎞, 출발지에서 12.7㎞ 지점에서 다시 해발고도 480m 높이의 봉우리까지 가파른 경사길로 이어진다.
약 500m거리의 가파른 오르막이 23차 둘렛길의 고비로 느껴질 정도로 제법 가팔랐다.
그 봉우리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기림사 방향. 왼쪽으로 난 길이 경계다.

완만한 내리막길을 쭈욱 따라가면 어느새 평평한 임도가 나타나고, 그 끝에  기림사에서 포항시 오천읍 진전리까지 이어지는 14번 국도와 만난다.
23차 둘렛길의 종착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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