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서라벌별곡] ⑥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연재-서라벌별곡] ⑥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 경주포커스
  • 승인 2015.08.24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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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혼자 술을 마시는 버릇이 생겼다. 10년은 족히 넘었고, 30년은 못 된 듯하다. 날이 갈수록 이 증세는 더욱 심해져서 요즘은 ‘십중팔구’는 아니더라도 ‘십중육칠’은 책상 앞에 앉아서 홀로 마신다. 이를 두고 어떤 친구는 알코올중독이라고 놀려대지만 나는 짐짓 ‘모니터 앞의 좌선(坐禪)’이라고 너스레를 떤다. 어째서 이런 버릇이 생겼을까.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술자리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인생행로를 걸어온 사람이라도 각자 성향이 다르면 술자리가 조심스럽고 불편하기 일쑤인데 하물며 나이와 직업과 배움과 살아온 환경이 다른 여러 사람이 어울린 술자리에 적응하기가 내겐 여간 고역이 아니다. 그렇다고 멀거니 앉아 남의 이야기만 듣고 있을 수만은 없어 맞장구를 치다보면 ‘오바’하기 마련이고, 그리하여 술이 깨고 나면 지난밤 내가 쏟아놓은 많은 말들이 새벽안개처럼 자욱한 부끄러움으로 몰려드는 것이다. 그래서 혼자 마신다. 그게 홀가분하고 시간도 비용도 경제적이다.

혼자 술을 마실 때 시쳇말로 내가 보여주는 ‘혼자놀기의 진수’는 두어 가지가 있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즐겨 시전하는 묘기(?)는 ‘지도 보면서 놀기’이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와 같은 옛날 지도는 물론이요, 가까이는 자동차에 비치된 도로교통지도, 인터넷 지도, 심지어는 구글이 제공하는 ‘구글 어스’를 확대․축소하거나 아니면 지구를 거꾸로 돌려 남반구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보기도 한다. 이때 지도 속에 나타난 도시와 강과 산맥과 바다와 대양(大洋)을 들여다보노라면 그 공간과 공간 혹은 이 지점에서 저 지점으로 이르는 여백 속에서 마치 먼 들판에서 저녁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듯 꼬물꼬물 이야기가 기어나오는 것이다.

우동집 사장 아라키 상이 주고간 1930년대 ‘경주읍내시가약지도(慶州邑內市街略地圖)’도 마찬가지다. 이 지도가 발행된 때가 ‘소화(昭和) 6년’으로 되어 있으니 1931년이다. 그러고보니 이 해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내 어머님이 태어나신 해다.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약실마을 파평윤씨댁 막내딸로 내 어머님이 막 눈을 떴을 무렵, 혹은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이 완공되고 욱일승천하던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켰던 해에 조선반도하고도 남녘땅 경주읍 소재지 풍경은 이러했구나. 짐짓 이렇듯 시대배경을 머릿속에 세팅한 후 다시 지도를 들여다본다.

▲ 1930년대 경주읍내 상세지도. 붉은색 박스 안이 모로가 히데오가 살았던 집.
우선 지도상의 ‘모로가 히데오 댁(諸鹿央雄 宅)’, 즉 현재 우리 가게를 중심으로 주변을 살펴본다. 우선 대문 앞 길 건너 원자력환경공단(구 경주여중) 자리는 그 시절 ‘심상고등소학교(尋常高等小學校, 초등학교)’였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경주문화원 자리는 ‘경주박물관(慶州博物館)’이 있었는데 위치는 오늘날과 거의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 관장을 지낸 모로가 히데오는 이 사이 300미터가량을 오가며 출퇴근을 한 것이다.

원자력환경공단에서 지금의 신한은행네거리에 이르는 길은 그 시절 ‘시장통(市場櫻)’이었음도 알 수 있다. 그리고 현재 화랑수련원 건물은 ‘야마구치의원(山口醫院)’ 자리였고, 명사마을로 꺾어지는 커브길 모퉁이 현재 ‘온국시’라는 칼국수집이 있는 자리는 ‘야마구치의원 치과부(山口醫院 齒醫部)’였다. 경주경찰서나 법원 등은 크게 자리이동을 하지 않았으나, 현재 신한은행 자리에는 ‘경주극장(慶州劇場)’이 있었구나. 그 시절에는 무슨 영화를 보았을까. 1931년이라면 유성영화가 들어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을 텐데 ‘이수일과 심순애’나 ‘장화홍련전’, 아니면 도저한 엑조티시즘의 소유자 소설가 이효석(李孝石, 1907~1942)이 즐겨 보았다는 ‘파리의 지붕 밑(Sous Les Toits De Paris)’이나 ‘망향(Pépé le Moko)’처럼 외화가 걸려 있었을까.

▲ 1930년대 영화 포스터 ‘수일(守一)과 순애(順愛)’

경주읍성 자리는 그대로인데 이때만 해도 동쪽 성벽은 거의 온전히 보전되어 있었고, 길 건너 성동시장(웃시장)은 ‘경주보통학교(慶州普通學校)’ 자리였는데 전화번호는 ‘40번’이다. 아마도 니은(ㄴ)자처럼 생긴 손잡이를 빙빙 돌려 “교환, 교환!”을 외치던 유서 깊은 자석식 전화기였겠다. 그런데 마땅히 있어야 할 경주역이 보이지 않는다.

옳아, 당시 ‘경주역(慶州驛)’은 지금의 내남네거리 부근에 있었구나. 그렇다면 일제강점기 최고의 문장가라는 소리를 들었던 작가 이태준(李泰俊, 1904~?)이 벼르고 벼르던 고도순례(古都巡禮)를 하기 위해 하필이면 삼복지경에 길을 나서 경성역에서 차표를 끊고 밤기차에 흔들리며 가뭇가뭇 졸며 내려오다가 마침내 맥고모자에 단장(短杖)을 짚은 채 내렸던 경주역은 바로 이곳이었을 성싶다. 그의 단편소설 <석양(夕陽)>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남북이 그냥 여름의 한중간이라 차는 달려도 봄새(봄철이 지나는 동안)나 가을처럼 철다툼 한 군데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여러 번 지나본 경부선이라 차창은 별로 매력 없이 저물어버렸다. 대구에서 갈아탈 때는 아직도 어두웠고 두어 역 지나서부터야 창밖은 낯선 풍경을 드러내주었다. 길은 푸른 벌판이나 이슬빛이 찬란해 아침다웠다. 반야월(半夜月)이란, 시흥을 돋우는 역명도 지나갔고 김이 피어오르는 강가엔 농부보다도 부지런한 어부의 낚싯대 드리운 모양도 시골맛이었다. 볕이 차츰 따가워 창장(窓帳, 창에 둘러치는 휘장)을 내려버릴까 할 즈음에 경주에 닿은 것이다.

▲ 소설가 이효석(왼쪽)과 이태준(오른쪽)
그 위로 ‘봉황대(鳳凰臺)’와 ‘금관총(金冠塚)’은 그대로다. 하기야 무덤이 옮겨다닐 리는 만무하다. 그런데 봉황대 맞은편에 ‘아사히신문 지국(朝日支局)’이 있는 게 이채롭다. 하기야 한국으로 건너온 일본인들도 본국 소식은 알아야 했을 테니. 아울러 금관총 옆에는 ‘기생조합(妓生組合)’이 있다. 그러고보니 또 생각나는 글이 있다. ‘서울에 딴스홀을 허(許)하라’라는 유명한 글로서, ‘끽다점 비-너스 매담’ ‘대일본 레코-드회사 문예부장’ ‘조선권번기생(기생조합 격)’ ‘여배우’ 등이 공동으로 작성해서 1937년 1월《삼천리》라는 잡지에 기고한 것이다.

▲ 일제강점기 기생들은 당대의 연예인이자 모던걸이기도 했다.
우리들은 이제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여 줍시사고 연명(連名)으로 각하께 청하옵나이다. 일본제국의 온갓 판도내(版圖內)와 아세아의 문명도시에는 어느 곳이든 다 있는 딴스홀이 유독 우리 조선에만, 우리 서울에만 허락되지 않는다 함은 심히 통한(痛恨)할 일로 이제 각하께 이 글을 드리는 본의도 오직 여기 있나이다.

‘각하(조선총독)’를 향해 ‘딴스홀(댄스홀)’이 없다는 게 ‘통한할 일’이라는 의기양양한 표현이 재미있다. 이들 당대의 연예인이자 모던걸이기도 했던 기생들이 비록 서울이나 평양만은 못했겠지만 이곳 경주에서도 당당히 자리잡아 뭇 남성들의 심금을 울리는가 하면 난봉꾼들의 주머니에서 돈깨나 알겨내었겠다. 그리고 시내 한복판에 일본인들의 과수원이 두엇 자리잡은 것이 눈에 띄고, 지금의 경주역 앞 황오동 일대는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이 지도가 발행된 것이 1931년이니 지금으로부터 80여 년 전이다. 화려했던 잔치가 끝나면 하나하나 등불이 꺼지고 술기운에 취했던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지듯이 이 시절을 주름잡았던 사람들도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되고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다시 세월은 흘러 해방이 되고, 6․25를 거치고, 군사정권과 문민정부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동안 은성했던 옛 경주읍내 중심가도 조금씩 활력을 잃어 지금은 저녁 8시만 되어도 시내 중심상가는 평일에는 인적이 뜸하고 우리 가게가 자리잡은 성안마을 일대도 자못 적막강산인 감이 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바닷가 백사장에서 모래성을 쌓으며 놀다가 해질녘 모두들 돌아가고 홀로 남겨진 아이처럼, 혹은 꽃밭처럼 무리지어 환하게 불을 밝혔던 가게들이 초저녁부터 하나둘 불을 꺼뜨린 채 어둠 속에서 스스로의 공허한 내면을 응시하고 있을 때 나는 생각한다. 사람은 ‘밥’으로써 살기도 하지만 ‘인정(人情)’으로 살기도 하는 것이다. 밥은 우리들 육신을 일으켜세우고, 인정은 뜬구름 같은 우리들 인생을 잠시 지상에 뿌리내리도록 해주는 ‘닻’과 같은 것이다.

타관객지 서울에서 살 때 나는 문득 내가 왜 서울에서 사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다. 다른 이유가 없었다. 오직 하나, 내 목구멍에 밥을 떠넣어주는 그러나 언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거래처가 서울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곳 경주에 사는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제백사하고 ‘돈줄’이 이곳에 있기 때문에 사는 사람이 허다할 것이다. 이렇듯 오늘날 우리들의 인생은 보잘것없고 때로는 부박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다시 생각하는 것이다. 벌써 오래전 우동집 사장 아라키 상은 어느 술자리에서 현재의 경주박물관은 신라시대 유물만 취급하고 이후 조선시대 및 근현대 유물은 지금의 경주문화원 같은 곳에서 취급하는 것도 생각해볼 만하다고 조심스레 자신의 의견을 말한 적이 있다. 그가 경주를 사랑하고, 어떻게 하면 좀더 나아질까 궁리하는 모습은 내가 만난 다른 누구들보다도 못하지 않았다. 또 내가 아는 어떤 여자후배는 서울의 출판사에서 편집자 겸 번역자로 일하다가 수년 전 경주로 내려와 지금은 뜻을 같이하는 다른 친구 두엇과 힘을 합쳐 거의 사비(私費)를 들여 마을잡지를 만든다는 소식도 들었다. 또 있다. 우리 가게에서 조금만 걸으면 닿는 시내 청와갤러리 주인장 교수님 부부도 소공연도 유치하고 ‘인문학 강좌’도 개설하는 등 지역사회에 보탬이 되고자 애쓰고 있는 줄 알고 있다. 그외 내가 빠트리거나 내가 모르는 많은 분들이 있을 것이다.

이들 모두가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에 불을 당기는 불씨이다. 그리하여 해가 지고 땅거미가 슬슬 깔리기 시작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골목골목의 가게들이 일제히 불을 밝힌 채 왁자지껄하게 손님들을 맞이하고 한쪽으로는 좌판을 벌여 이야기꽃을 피우는 그런 모습을 상상한다. 그야말로 인생과 예술을 이야기하고, 우리 아이들의 미래도 걱정하고, 뜻 맞는 사람들끼리 다음에는 어디로 여행을 갈까 계획도 짜는 그런 ‘인정의 거리’ 말이다. 앞으로 이곳에 연재하는 어쭙잖은 내 글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 되는 방향으로 쓰여질 것이다. 때로는 인터뷰도 들어가고, 때로는 지역사회 대한 푸념도 늘어놓는 등 형식에 구애됨이 없는 자유로운 글쓰기가 될 것이다.

 
필자 김종년

오랫동안 출판기획 및 집필에 종사하면서 문학과 역사의 대중화 작업에 노력해왔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 《숨겨진 역사의 비밀, 조선왕조실록》,《소설 대왕 세종》,《이태준의 문장 강화》,《삼국지》(전 30권) 등 다수가 있고, 《웅진 푸른담쟁이 우리문학》,《내가 만난 역사 인물 이야기》 등 다수의 출판기획 작업에도 참여해왔다. 경주에 내려온 이후 현재 ‘운수좋은날’이라는 식당을 운영하는 한편으로 ‘예술과마을’이라는 출판사를 설립, 지역사회 문화발전에 이바지하려는 꿈을 갖고 있다.

*연제제목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프랑스의 소설가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제목에서 따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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