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 영웅화랑의 삼국통일 이야기
[10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 영웅화랑의 삼국통일 이야기
  • 경주포커스
  • 승인 2016.10.24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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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원과 함께 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 10월 탐방은 22일 김유신장군묘를 출발~태종무열왕릉~진흥왕릉~서악서원~재배정~천관사지까지 이어지는 구간에서 진행됐다.
영웅화랑의 삼국통일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행된 탐방이었다.

10월탐방 행사에 참가한 시민은 총 40명.

김유신장군묘, 무열왕릉, 진흥왕릉, 서악동 삼측석탑등 오전 탐방에 이어 서악서원에서 점심식사를 한뒤 조선시대 유생들의 의복을 갖추고 시습당에서 선비체험을 하고, 이어 푸전국악 공연예술단체인 가람예술단의 공연을 관람하는 색다른 경험도 했다.

다음달 탐방은 11월26일 월정교, 최씨고택, 향교, 첨성대, 대릉원, 황룡사지, 분상사등 신라왕경의 주요유적을 탐방한다.

이날 주요 탐방 유적지.

김유신 장군묘

▲ 김유신 장군묘

김유신 장군 묘는 직경이 30m나 되는 큰 무덤으로 봉분 아래에는 병풍처럼 호석을 설치하였고, 이 호석 

▲ 김유신 장군묘의 호석

중간 중간에는 평복 차림에 무기를 든 12지신상을 배치하였다.
호석의 밖으로는 여러 개의 돌기둥을 세워 난간을 돌렸으며 호석의 12지신상과는 별도로, 높이 약 30cm의 납석에 정교하게 새겨진 12지신상이 묘의 주변에서 출토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묘 앞에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세워진 비석이 있고, 묘 아래쪽에는 묘를 지키는 금산재가 있다.

김유신 장군묘의 큰 특징은 바로 이 12지신상이 새겨진 호석이다.
대개 다른 능이나 묘를 보면 호석에 갑옷을 입은 조각들이 새겨지게 마련인데 김유신 장군묘의 호석의 복장은 평복차림이다. 호석의 의미가 능이나 묘를 지키는 수호신의 성격을 띤다고 봤을 때 분명 차이가 난다. 그리고 12지신상에 새겨진 12지신의 형태는 몸체는 정면을 보고 서 있으나, 머리는 오른쪽으로 돌려 주시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어 역시 특이하다.

한국 역사상 신하로는 최초로 군왕으로 추봉

▲ 김유신 장군묘를 살펴본뒤 진입로에서 박주연 문화재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삼국사기>에 보면, 김유신은 당나라와의 전쟁이 한창이던 문무왕 13년(673) 음력 7월 1일 7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김유신이 죽자 문무왕은 채색 비단 1천 필과 2천 석의 조(租)를 내리고 군악대(북과 나팔수) 100명을 보내 금산원에 안장하고 유사(有司)로 하여금 비(碑)를 세워 그의 공적을 기리고 민호(民戶)를 배정하여 묘를 수호하게 하였다. 그러나 현재의 묘역에 이 비는 없고, 1710년 경주 부윤이 세운 '신라태대각간 김유신묘(新羅太大角干 金庾信墓)'의 비(碑)가 서 있다.
그 뒤 835년에는 흥덕왕이 김유신은 흥무왕으로 추봉했으니, 왕족이 아닌 신하로서 군왕으로 추봉된 사람은 한국 역사에서 김유신이 유일한 경우였다.

태종무열왕릉

▲ 무열왕릉 전경

태종무열왕릉은 신라왕릉 가운데 피장자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왕릉 중 하나이다.
능 동쪽에 서 있는 능비의 이수에 적혀있는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列大王之碑)'라는 전액 때문이다. 무열왕릉의 위치가 정확하기 때문에 다른 왕들의 능의 위치를 비정하는데 기준이 되고 있다.

▲ 무열왕릉 호석.

무열왕릉 봉분을 빙둘러서 삐죽삐죽 튀어나온 자연석이 둘러져 있다. 바로 호석이다. 무열왕릉에는 90여 개의 호석이 둘러져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호석은 원래 고구려 나 백제의 고분군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현재 집안의 장군총이나 태왕릉 등에서 빗돌처럼 세워놓은 호석을 발견할 수 있고, 서울 석촌동의 백제 고분군에서도 역시 볼 수 있다. 이 문화가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신라에도 유입되었다. 물론 이전에도 냇돌로 쌓은 호석은 있었지만 무열왕릉처럼 빗돌로 만들어 세우는 것은 없었다. 성덕왕릉이후 신라 능묘에 나타나는 십이지신상 장치의 기본틀이 무열왕릉의 호석에서부터 출발한다.
무열왕릉 동편에는 한국 능묘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상석이 있다. 하지만 상석의 솜씨가 다소 조잡하여 후대에 만들었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제기하기도 한다. 

태종무열왕릉 귀부

▲ 태중무열왕릉비 귀부.
▲ 무열왕릉비 앞에서 설명을 듣고 있다.

무열왕릉에는 이전까지는 없었던 능비를 처음으로 세웠다. 물론 중국의 제도에서 수입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무덤의 방향이 남북이다. 즉 남쪽으로 머리를 두고 북쪽에는 다리가 오도록 안장하였다. 그리고 황제의 신도비는 동남쪽 해 뜨는 방향에 세웠다. 그러나 신라에서는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되 신라의 전통이 아직 남아있어 시신의 방향을 동서로 두고 능비는 동북쪽에 세웠다. 이 전통은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비의 양식은 당나라의 것을 그대로 이어받아 귀부와 비신 그리고 이수를 갖추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세워진 비의 완성도가 아주 높아서 아시아 최고의 조각으로 꼽힌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당나라 장인이 와서 조각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비신은 사라지고 없지만 이수에는 당나라에서 당시에 유행하던 현침자(懸針字)로 제액을 새겼다. 비각의 초석은 4개였고 왕릉의 비이기에 지표면보다 더 높게 조성하였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전 김인문묘의 비는 신하의 묘이기에 지표면보다 더 낮게 조성하였다. 비각 계단의 받침돌이 통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양식이 백제의 미륵사나 신라의 감은사에서 조립하여 계단을 만들던 것에 비하여 좀더 발전한 것이라 할 것이다. 태종 무열왕 능비의 필적은 김인문의 글씨이다.

서악동고분군

▲ 서악동 고분군.

경주 서악동 무열왕릉 바로 뒷편의 구릉에 분포하는 4개의 대형 무덤을 가리킨다. 이곳의 무덤들은 경주분지의 대형 무덤과 비슷한 형태로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이다.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내부구조 시설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봉분이 거대한 점, 자연돌을 이용해 둘레돌을 두른 점 및 무열왕릉보다 높은 곳에 있는 점으로 보아 안에는 나무로 된 네모난 방을 만들고 그 위와 주변에 돌무더기를 쌓은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형식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들 무덤이 분포한 지형은 선도산에서 서남으로 뻗은 능선상에 있고, 뒷산과 동서의 계곡 건너에 있는 능선 등을 종합해 볼 때, 풍수지리사상의 영향하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무덤의 주인에 대해 첫 번째 무덤은 법흥왕릉, 두 번째 무덤은 진흥왕릉, 세 번째 무덤은 진지왕릉, 네 번째 무덤은 문흥대왕릉 등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진흥왕릉

▲ 진흥왕릉.
▲ 문성왕릉앞.

신라 24대 진흥왕(재위 540∼576)의 무덤이다. 진흥왕은 지증왕의 손자로서 고구려가 점령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빼앗아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졌다. 562년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을 확보하였고, 함흥평야까지 진출하여 신라 역사상 최대 영토를 차지한 왕으로 점령지에 척경비를 세웠다. 거칠부에게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으며, 신라 최대의 절인 황룡사를 세웠다. 또한 삼국통일의 중추세력인 화랑도를 창설하였다.
높이 5.8m, 지름 20m의 원형 봉토무덤으로 된 이 무덤은 자연석을 이용해 둘레돌을 돌렸으나 현재 몇 개만이 남아있다. 내부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으로 추측된다.
신라 왕 중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왕의 무덤으로서는 규모가 작은 편이며, 기록상 법흥왕과 같은 곳에 있어야 하므로 서악리 무덤들 중 위에서 두 번째 무덤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인근에 신라 제25대 진지왕릉(재위576년~579년), 제46대 문성왕릉(재위 839~857),제47대 헌안왕릉(재위 857~861)이 존재한다.

서악동 삼층석탑

 
▲ 서악동 삼층석탑주변에는 구절초 2만7000송이가 만개해 장관을 이루고있다.
▲ 탐방에 나선 시민들이 구절초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한뒤 확인하고 있다.
▲ 서악동 삼층석탑.

통일신라시대 모전탑 계열에 속하는 탑으로, 무열왕릉 동북쪽 비탈진 곳에 서 있다. 모전탑은 전탑(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모방한 것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것이다. 기단은 주사위 모양의 커다란 돌덩이 8개를 2단으로 쌓은 독특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 윗면에 1층 몸돌을 받치기 위한 1장의 평평한 돌이 끼워져 있는데, 남산리 석탑에 3단의 층급이 있는 것에 비하면 간략화된 것이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1장의 돌로 되어 있고, 1층 몸돌에는 큼직한 네모꼴 감실(불상을 모시는 방)을 얇게 파서 문을 표시하였다. 문의 좌우에는 1구씩의 인왕상이 문을 향해 조각되어 있다. 왼쪽의 상은 허리를 문쪽으로 내밀면서 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려 위를 쳐다보고 있으며, 오른손은 허리에 걸치고 왼손은 어깨까지 들어 주먹으로 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오른쪽의 상은 왼쪽의 문을 향한 얼굴의 측면관인데,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 금강저의 끝을 잡았으며, 왼손은 왼쪽 허리께로 비스듬히 내려간 금강저의 끝부분을 잡아 아래쪽으로 내지르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지붕돌은 하나의 돌에 밑받침과 윗면의 층급을 표시하였으며, 처마는 평행을 이루고 있다. 이 탑은 독특한 기단 형식으로 미루어 보아 경주 남산리동삼층석탑(보물 제124호)을 모방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남산리동삼층석탑이 기단 위에 3단의 층급을 둔 것에 비해 여기서는 1장의 돌로 이루어진 생략된 형식을 하고 있어 통일신라 후기의 퇴화되는 과정에서 성립된 석탑으로 추측된다.
각 층의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커서 균형이 맞지 않고 둔중한 느낌을 주며 보존상태도 좋지 못하다. 높이 5.07m, 기단폭은 2.34m이다.
이 탑과 같은 양식의 탑들은 모두 분황사 탑에서 출발하여 의성 탑리오층석탑, 빙산사지오층석탑, 선산 죽장동 오층석탑과 낙산동 오층석탑, 그리고 경주 남산리 동삼층석탑 등과 같은 양식으로 발전했다가 신라 말기의 퇴화된 모습이 바로 서악동 삼층석탑과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서악서원

▲ 태종무열왕, 서악서원이 있는 주변에는 지도에서 보는 것 처럼 많은 유적들이 산재해 앴다.


▲ 서악서원에서 가람예술단의 퓨전국악공연을 관람하고 있다.

서악서원은 1561년(명종 16)에 경주 부윤 이정이 김유신장군을 후세에 길이 새기고자 건립했는데, 당시 지방 유림들의 의견을 따라 퇴계와 협의해 설총. 최치원의 위패도 1563년에 함께 모시게 되었다.
동경지에 의하면, 퇴계는 서악정사라 이름 짓고 손수 글씨를 쓴 현판을 달았으며, 강당을 시습, 동재를 진수, 서재를 성경, 동재를 절차헌, 서재를 조설헌, 누문을 영귀루, 문을 도동문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서원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0년(선조 33) 경주 부윤 이시발이 옛 서원 터에 초가 집 만을 짓고 위패를 봉안했는데 ‘영귀루중건기’에 의하면 그 후 1602년(광해군 8)에 부윤 최기가 사당, 제실, 강당, 장서실 등을 중창하였다. 1623년(인조 1)에 최동언 등의 청원으로 ‘서악(西岳)’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1646년 영귀루를 중건했다. 서악서원은 임진왜란으로 서원이 모두 불타버렸는데 현재의 서악서원이라고 현판에 쓰인 글씨는 당시의 명필로 알려진 원진해가 쓴 것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경주에서 옥산서원과 서악서원 단 두 곳만이 살아남을 만큼 유서 깊은 서원이다.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 탐방단이 서악서원에서 조선시대 선비체험을 하고 있다.

신라문화원은 시설물을 수리, 정비하여 고택숙박은 물론 다도예절, 의복체험, 국악공연, 화랑체험, 민속놀이, 출판기념회, 음악회, 전통혼례 등 문화재 활용의 대표적 장소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2014년부터는 문화재청, 경상북도(경주시)에서 후원하는 ‘서원활성화 프로그램’을 상시 진행하여 숙박객은 물론 일반 참가자들에게도 경주만의 특색있는 체험거리를 제공하고 활용을 통한 문화재 보존정책에도 기여 하고 있다.

재매정

▲ 재매정을 방문한 탐방단.

신라의 김유신 장군 집에 있던 우물이다.
화강암을 벽돌처럼 쌓아 올려 만들었는데, 이 일대가 장군의 집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 김유신 장군이 오랜 기간을 전쟁터에서 보내고 돌아오다가 다시 전쟁터로 떠날 때, 자신의 집 앞을 지나면서 가족들을 보지도 않고 우물물을 떠오게 하여 말위에서 마시고는, “우리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구나”하고 떠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1993년 재매정을 중심으로 사방 70m 지역을 발굴조사하였다. 우물의 깊이는 5.7m이며, 가장 넓은 부분은 1.8m이고, 바닥의 지름이 1.2m로 벽돌같이 다듬은 돌로 만들었다. 우물 옆에 비각이 있고 비각 안에 조선 고종 9년(1872)에 이만운이 쓴 비석이 있다.


천관사터

▲ 10월 탐방의 마지막 유적지 천관사터에서.

도당산 서쪽 기슭 논 가운데에 있는 절터로서 현재 석재와 기와조각들만 남아 있다. 통일신라 전기에 있던 절로, 김유신과 천관이라는 기생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청년시절에 김유신은 천관이라는 기생과 사랑에 빠져 지내다가, 어머니의 꾸중으로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를 한다. 어느날 말이 술에 취한 유신을 천관의 집 앞으로 데려가자, 유신은 말의 목을 베고 냉정하게 천관을 뿌리친다. 이를 슬퍼한 천관이 자살을 하고, 후에 유신은 천관이 살던 집에 천관사를 지어 그녀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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