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 소금강산권역
[12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 소금강산권역
  • 경주포커스
  • 승인 2016.12.27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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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원과 함께 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 12월 탐방은 24일 소금강산 권역 일대 문화유적을 답사했다.

소금강산은 경주시의 북동쪽에 있는 용강동·동천동과 천북면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고도 : 177m).
소금강산은 금산, 금강산 등으로 불리었다. 『삼국유사』에 신라 6촌 중의 하나인 금산가리촌(金山加里村)에서의 금산이 "지금의 금강산으로 백률사 북쪽에 있는 산이다."라는 기록과 "6촌 중의 하나인 명활산고야촌장인 호진(虎珍)이 처음에 금강산으로 내려왔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금강산은 신라 수도의 중심지에서 아주 가깝기 때문에 『삼국사기』 이외에도 많은 기록이 전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경주)에도 소금강산이 아니라 금강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세주에는 "경주 중심지의 북쪽 7리에 있는데, 신라에서는 북악(北嶽)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신라 수도의 중심지에서 북쪽에 있는 돌산이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조선시대의 지리지와 지도에는 금강산이 나오는데, 소금강산이라 기록된 것을 찾을 수가 없다. 일제시대 이후 강원도에 있는 금강산이 알려지면서 소금강산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한국지명유래집 경상편>

▲ 야외탐방을 나서기 전 신라문화원에서 박주연 문화재해설사로부터 첨성대의 구조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12월 탐방엔 35명이 참여했다. 경주시민, 한수원 직원뿐만 아니라 서울, 대구, 부산등 경향각지에서도 참가했다.
서울에서 대학생 2명이 이 탐방에 참여하기 위해 경주여행을 왔다고 했다. 또다른 가족 4명은 경주여행길에 이 탐방에 참여했다고 했다. 부산에서는 50대 부부가 참여한 경우가 있었는가 하면, 배반동에서는 연세 지극하신 어르신 한분은 경주의 고적을 더 자세히 알고 싶어 탐방에 참여 했다고도 했다.
탐방은 굴불사터 석조사면불상을 시작으로 백률사~소금강산 마애삼존불좌상 ~표암~탈해왕릉~헌덕왕릉~알천수개기 등을 차례로 들렀다.

2017년 1월 첫 탐방은 넷째토요일이 설 연휴인 관계로 한주 앞당겨 셋째 토요일인 21일 지붕없는 박물관, 남산으로 향한다.
첫 번째 남산 탐방으로, 서남산 삼불사를 출발해 ~삼릉~선각육존불~선각여래좌상~석조여래좌상~마애석가여래좌상~용장사터 삼륜대좌불~용장사터 3층석탑등을 두루 둘러 본다.

굴불사터 사면불, 백률사, 소금강산 마애삼존불, 헌덕왕릉, 알천수개기 석탈해 왕릉, 표암등을 두루 탐방하는 일정이다.

올해 경주로 본사를 이전한 한국수력원자력(주)이 경주시민들에게 경주 바로 알기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후원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은 1회 5천원의 저렴한 비용으로 참가할 수 있다.
탐방은 경주 최고의 답사전문 문화단체인 신라문화원이 주관한다. 문의및 참가신청. 774-1950.

다음은 12월 탐방 주요유적.

굴불사터사면불상

▲ 굴불사터 사면불상을 둘러 보고 있다.

굴불사는 신라 제 35대 경덕왕이 재위 시에 백율사로 행차했을 때 땅 속에서 염불소리가 들려 파게하니 큰 돌에 사면불이 새겨져 있음을 알고 절을 짓고 이름을 굴불사로 하였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사찰이다.
그러나 이 사찰은 언제 어느 시기에 왜 폐사가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고 다만 통일신라시대에 조각된 것으로 판단되는 사면석불만 그 유지에 남아 그런대로 옛 사찰의 터를 짐작하게하고, 아울러 석불만 불자들의 신앙 대상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이 굴불사 사면불에 대해서는 최초로 1910년 이전에 일본인의 손에 의해 현황 조사가 이루어졌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41년에 간행한 관야정의 조선의 건축과 예술 속에서 경주에 있는 신라 시대의 유적이란 제목하에서 굴불사 석불을 설명하면서 1909년 7월에 보고된 동양협회 조사부 학술 보고 제1책에 수록된 것을 다시 옮긴다고 부기하고 있다.

또한 내용과 함께 사면석불이 매몰된 상태의 사진이 실려 있고 내용은 금서룡박사가 반쯤 묻혀 있었던 것을 주변을 파내어 조사했다는 것이다. 또 1917년 3월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 제5책에서는 사면이 노출된 상태의 사진이 있고 해설편의 서언에는 관야정과 곡정제일이 조사한 내용이라고 되어 있다. 이로 1917년 이전에도 조사되었음을 알게 한다. 이러한 사정을 볼때 최초 금서룡이 노출시켜 조사한 해는 적어도 1909년 7월 이전에 이루어 졌음이 분명한 것이다. 아울러 1935년 5월에 보물로 지정이 되었고 1962년 보물 제121호로 재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굴불사지에 대한 발굴 조사는 1985년 8월 3일에 착수하여 10월 29일에 완료함으로써 3개월이 소요 되었다. 발굴 결과 서면에 있는 삼존불의 연화대좌, 동면 약사여래의 무릎 이하 부분이 확인되어 불상의 전체 모습을 알게 되었고 사면석불을 중심으로 조영되었던 정면 4칸, 측면 3칸의 법당터가 확인되었다.

또한 조선 시대의 기와도 수습됨으로써 이 건물은 조선 중엽에 이르기까지 목조기와 건물이 존재하였음이 밝혀졌고 뿐만 아니라 고려 시대 층위에서는 東寺라고 새겨진 명문와편을 비롯하여 많은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발굴 결과 굴불사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같이 통일신라 시대 경덕왕 때 창건되어 신라가 망할 때까지 계속 존속한 것으로 보여지며 고려 시대에는 한때 사명이 동사로 불리워졌을 가능성이 있고 고려 명종 때인 1183년에 한차례의 불사가 이루어졌다.

이때에 사찰명은 굴석사로 불리워지고 있었으며 굴석사의 이름은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할 시기인 1280년대까지 계속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절의 폐사는 몽고의 침략으로 1238년이 아니면 1250년대에 당시 사용하던 중요 불구를 땅에 매장하고 승려들은 사찰을 떠났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후 몽고병란이 끝났으나 사찰을 떠났던 사람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조선 시대에 들어와 숙종 때인 1681년에 다시 불사가 이루어진 후 100년 가량 법등이 존속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후 폐사가 되었고, 사면불은 자연적으로 매몰되고 겨우 머리 부분만 노출되어 있는 것을 1900년대 일본인들이 발굴한 결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 동서남북에 불상을 조각하는 것은 사방정토를 상징하는 것으로 대승불교의 발달과 더불어 성행한 사방불 신앙의 한 형태였다. 불교 경전이나 불상에 나타나는 사방불의 명칭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이 불상의 경우 어느 특정 경전에 의하였다고 하기보다는 당시의 대승불교에서 가장 널리 모셔졌던 불상들을 배치한 것으로 생각된다.

사면석불의 사면에는 서방정토를 주재하는 아미타삼존불, 동면에는 약합을 들고 있는 약사여래, 남면에는 석가삼존불, 북면에는 두개의 보살상이 있는데 왼쪽에는 선각으로 표현된 십일면의 얼굴과 여섯개의 손이 달린 십일면육비의 관음보살상이 있고 오른쪽에는 부조로 표현된 보살상이 있는데 형태상의 특징은 없으나 보살 중 오랫동안 신앙되어 장차 부처가 될 미륵보살이 아닌가 추측된다. 표현 양식면에서 보면 특히 서면의 왼쪽 보살은 한쪽 다리에 무게 중심을 두고 균형을 잡는 삼굴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삼국시대 말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통일신라 시대에 와서는 더욱 유행하는 양식이 된다. 이러한 삼굴자세의 원류는 인도 굽타 시대의 불상에서부터 보이나 그 양식은 중국의 수나라와 당나라를 거쳐서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이다. 남면의 불상은 경주 감산사지 출토 아미타불상과 비슷한 형식의 옷주름을 하고 있어 주목된다.

또 북면의 십일면육비의 관음보살상은 관음상의 변형으로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능력을 발휘하여 다방면의 신통력을 보여 주는 것으로 약간의 주술적인 요소를 띄고 있다. 이렇게 사면석불에 십일면육비의 관음보살상이 표현되어 있는 것은 8세기 통일신라 시대에 신앙된 불상 중에 밀교적 성격을 띠는 불상이 섞여 있음을 보여 주는 매우 귀중한 예이다.

결론적으로 전체적인 조각양식을 보면 경덕왕 대인 742∼765년 사이나 그보다 약간 올라가는 시기에 조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4면 중에서 서면의 아미타여래상은 이들 조각군 중에서는 가장 먼저 제작된 불상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특히 남면의 불상과 보살상은 8세기 후반 일본 불상 양식에서도 보이는데 나라현의 당초제사의 목조불상과 그 양식이 비슷하다.


백률사

▲ 대웅전과 삼성각

대한 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의 말사로 창건 연대에 대해서는 미상이나 이절의 대비관음상은 중국의 장인이 중생사의 관음소상을 만들 때 함께 만든 것이라는 속전이 있고 또 이 관음상에 얽힌 영험이 693년(효소왕 2년)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어 삼국 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한다.

이 절은 상당히 큰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이 되나 임진왜란 때 폐허화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경주의 부윤 유승순이 중수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 이적을 남긴 관음상은 그때 이미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던 국보 제28호의 금동 약사여래상과 이차돈순교 순교 비는 1927년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졌으며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선원, 요사 채가 있으며, 이 중 대웅전은 약 3m 높이의 축대 위에 있으며 선조 때 중창한 것이다.


이밖에 옛 건물에 쓰였던 것으로 보이는 초석과 석등의 옥개석 등이 있고 또한 대웅전 마당에는 대비관음상이 도리천에 올라갔다가 돌아와서 법당에 들어갈 때 밟았던 발자국 터가 마당의 돌 위에 남아 있다. 일설에는 부처님이 부례랑를 구출하고 만파식적을 찾아서 돌아올 때 남긴 것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대웅전에서 서북쪽으로 약 150m 떨어진 산비탈의 암반 위에는 지름 31cm, 깊이 24cm의 원형공이 남아 있는데 이곳이 조선 시대 부도가 놓여 있던 자리이다.

석종 형 부도였던 것 같은데 일제 강점기 때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진 채 있었다 하나, 그 이후로는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또한 향나무로 만든 불상이 있었다고 『동국여지승람』에는 기록되어 있으나 없어졌다.

소금강산 마애삼존불좌상

▲ 소금강산 마애삼존불좌상앞에서 설명을 듣고 있다.

백률사가 있는 금강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30m쯤 내려가면 나타나는, 자연 바위벽에 새긴 삼존불상이다. 중앙에는 본존불이 앉아 있고, 양쪽에는 협시보살이 새겨져 있다.
오른쪽 협시보살의 머리에 쓴 보관(寶冠)에 작은 부처가 조각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미타 삼존불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본존불의 높이가 약 3m에 이르는 거대한 마애불이지만 선각에 가깝게 새겨져있으며, 조각된 옷의 표현과 손의 모습 등은 통일신라시대 마애불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삼존불의 윗 바위에는 목재 구조물을 설치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이곳에 건물의 형태가 있었지 않나 추측을 할 뿐이다. 또 이 마애불과 함께 주목되어지는 곳은 마애불 100m 아래에 사지로 추정되고 있는 넓은 대지가 있는데 이곳과 관련되지 않을까 하고 추정을 할 따름이다. 이곳에는 최근에 들어선 묘들이 있으며 주변에서는 기와 편들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추정 사지는 절집 자체로서의 방향을 동북쪽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좋은 조건은 아니지만 마애불의 위치와 관련하였을 때는 이곳 일대를 자추사지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법흥왕 14년 이차돈이 불법을 포교하다가 순교하였을 때 그의 목을 베자 흰 젖 같은 피가 한길이나 솟았고 그의 목도 소금강산으로 날아가 떨어졌다고 한다.

그때 나라사람들은 이를 슬피 여겨 금강산의 좋은 터에 이차돈을 위하여 자추사라는 절을 지었다고 한다. 현재 혹자는 백률사를 자추사가 변한 것이라고도 하나 정확하지는 않다. 한편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려 시대까지 이차돈의 묘와 비가 유존하고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찾을 길이 없다.

탈해왕릉

▲ 탈해왕릉 앞에서 기념촬영.

사적 제174호이며 높이는 4.5m, 지름은 14.3m이다. 탈해왕릉은 1969년 8월 27일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그 전방에 있는 숭신전은 1980년대 반월성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이 고분은 언제부터 탈해왕릉으로 불리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는 기록이 보이나 조선시대 사료에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선 말기 이후부터 지칭되어 오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시기는 화계 유의건이 말한 경술년(1730년) 이후의 일로 보여진다. 아마 조선 말기에 가서 석씨 문중에서 시조왕의 능이라도 찾자는 결의 아래 삼국사기의 성북을 근거로 하여 현재의 동천동 능을 정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능은 1974년 12월 31일 새벽 도굴꾼에 의해 도굴되었다. 도굴의 사실여부는 당시 능감사원이었던 노봉구씨(당시44)에 의해 다음해 1일 발견 신고 됨으로써 알려졌다.

당시 2~3명으로 추정되는 도굴꾼은 봉분 동북쪽 중간 지점에서 너비 85cm, 깊이 4.4m로 파 들어가 석실 내부를 완전히 뒤졌다. 신고를 받은 정재훈 사적관리사무소장과 국립경주박물관 정양모 관장은 도굴 현장을 확인한 결과 유물의 도난 흔적은 없다고 밝혀 이 능이 문무왕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석탈해 당시와는 관련이 없음을 시사했다.


헌덕왕릉

▲ 헌덕왕릉

헌덕왕릉은 1963년 1월 21일에 사적 제29호로 지정되었으며 면적은 1만 8,007㎡이다. 무덤의 지름은 26m, 높이는 6m이다. 헌덕왕의 성은 김씨, 이름은 언승(彦昇), 왕비는 귀승부인(貴勝夫人)이다.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809년에 왕이 되어 826년까지 18년간 왕으로 재위하면서 농사를 장려하고 친당정책(親唐政策)을 폈다. 김헌창(金憲昌)·김범문(金梵文)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당시의 국내정세는 혼란스러웠다.

승하한 뒤 시호를 헌덕이라 하고 천림사(泉林寺) 북쪽에 장사지냈는데 지금의 위치로 비정되고 있다.

무덤의 외형은 흙으로 덮은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이고 매장추체부는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다. 무덤 밑 둘레를 따라 잘 다듬은 판석(板石)을 사용해 병풍처럼 돌려 무덤의 보호석을 마련하였다.

판석과 판석 사이에는 두 판석을 맞물리게 하는 탱석(撐石)을 끼워 판석을 고정시켰으며 아울러 탱석에는 같은 간격으로 방향에 따라 12지신 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였다. 이들 판석과 탱석 위로 갑석(甲石)을 올려 보호석을 마무리하였다.

12지는 12지생초(十二支生肖)라고도 하는데 중국에서 방위와 시간개념으로 출발한 것으로 불교의 영향으로 12동물로 대응한 것은 후대의 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이 무덤에 있는 것은 방위신(方位神)으로 무덤을 수호한다는 의미에서 만들었다. 신라의 왕릉에는 성덕왕릉·괘릉(掛陵) 등 몇몇 예가 있다. 김유신묘에도 무덤 주위에 12지신 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능에는 12지 중 돼지〔亥〕·쥐〔子〕·소〔丑〕·호랑이〔寅〕·토끼〔卯〕등 5개 상만 남아 있고 그밖에는 없어졌다. 나머지는 무덤 전방으로 흐르는 경주의 북천(北川)이 1742년(조선 영조 18) 8월 22일에 범람해서 무덤의 일부가 유실되었다. 당시 좌의정 송인명이 영조에게 그 사실을 아뢰었으며 그로 인해 경상도관찰사가 수축하였다.

원래는 신라 제42대 흥덕왕릉과 마찬가지로 무덤의 전면에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을 갖추고 무덤의 둘레를 따라 돌난간을 마련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현재 경주고등학교 정원에 놓여 있는 호인상 1구의 머리 부분이 원래 원성 왕릉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헌덕왕릉에는 원성 왕릉과 마찬가지로 무덤 전면에 호인상(胡人像)과 같은 석물들이 배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왕릉의 호석 구조는 앞 시기의 왕릉을 충실히 계승하였으나 면석과 탱석은 각각 48개로 구성되었으며 탱석에도 고유한 방향에 맞게 12지신 상을 부조하였다. 따라서 이웃하는 12지신 상 사이에 들어가는 면석과 탱석의 수는 이전 시기 왕릉보다 각각 1개씩 총 24개가 더 들어간 것이다.

그만큼 봉분의 지름이 커진 까닭에 헌덕왕릉은 12지신 상이 부조된 신라왕릉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남쪽·서쪽 호석과 석난간의 대부분은 1970년대 경주고도 관광종합개발계획에 의해 정비, 보수함으로써 새롭게 마련된 것이다. 왕릉의 남동쪽에 놓인 상석(床石)은 흥덕왕릉의 상석을 모방한 탁자식 형태로 2007년에 설치된 것이다.

왕릉의 피장자에 대해서는 헌덕왕 외에도 조선시대에는 김유신으로 잘못 기록한 문헌도 남아 있으며 최근에는 진평왕으로 추정한 견해도 있어 향후 새로운 연구 대상이 될 전망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주헌덕왕릉 [慶州憲德王陵]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알천수개기

▲ 알천수개기

경주의 북천은 알천 또는 동천으로부터 이어져 왔는데, 예로부터 홍수가 잦아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도 수차례나 기록되어 있다.

이 알천수개기는 동천동 금학 산의 서남쪽 능선 끝에 드러난 바위의 맨 아래쪽에 새겨져 있는 마애비이다. 이 바위는 남서향으로 전체 높이가 약 3.5m이며 크게 3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맨 아래 단의 3폭 병풍처럼 생긴 면에 글이 새겨져 있다.

오른쪽과 왼쪽 면에는 제방의 개수와 관련된 사람의 이름이 가운데 면에는 알천제방을 다시 쌓은 사실이 해서로 음각되어 있는데, 모두 합하여 90자이다.

이 기문은 1980년 11월에 발견될 때 까지 대부분이 흙 속에 묻혀 있었기 때문에 글자가 훼손되지 않아 매우 뚜렷하다.

가운데 면의 크기는 너비 102cm, 높이 120cm, 오른쪽 면의 크기는 너비 50cm, 높이 80cm, 왼쪽 면의 크기는 너비 76cm, 높이 65cm 정도이다. 그리고 가운데 새겨진 글자의 크기는 8.5~13cm이다.

한편 동경통지에는 고려 현종 때에도 3도의 장정을 모아 쌓은 기록이 있으며, 이 알천제방수개기는 조선 숙종 33년 (1707년)에 새긴 것으로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쪽으로 흐르는 알천 물살에 읍 동편 제방이 무너졌다.
나무와 돌로 높은 둑을 쌓은 것은 고려 때이다.
올해 정해 년에 다시 고쳐 지형 따라 잡은 갈래 전에 흐르던 대로 물길 터주고
이 바위 면에 사실을 적어 길이 후세에 전하려한다.⟫

부윤 연안이공(인징)이 쓰고 전희천·권성경·김명웅·임기중이 함께 도왔다.

손여의·서진·김창도·정세정과 스님 위성이 공사의 책임을 맡았으나 실지로는 손여의가 주관하였고, 감독과 관리는 이진명·김시경 등이 하였다."

이 알천제방수개기는 해방 후 북천 상류에 대규모 저수지가 축조되기 전까지는 북천의 홍수가 경주지역으로서는 숙명적인 것이었으며, 반면에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우리 조상들이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 왔음을 보여주는 소중한 금석문 자료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홈페이지 (문화재 학습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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