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와 3.1만세운동] 1919년 3월15일 경주장날 거행... 5월까지 3회 이어져
[경주와 3.1만세운동] 1919년 3월15일 경주장날 거행... 5월까지 3회 이어져
  • 김종득 기자
  • 승인 2017.03.02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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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 만세시위에 1700여명 참가 67명 부상 80명 피검

일제치하에 숨죽여 있던 우리민족의 3.1독립만세운동이 경주에서는 어떻게 전개됐을까?

당시 경주에서의 독립 만세운동은,  기독교계 박문홍, 김기원, 윤기순, 박내영등의 주도로 태극기를 만들어 각부락의 신도 및 부락민에게 배부하고 3월13일 경주장날을 기해 거사하려 했으나 일경의 삼엄한 경계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지시를 받은 청년층 박봉록, 성봉룡, 박무훈, 최성열등의 청년지사들로 하여금 3월15일 경주 작은 장날인 오후 4시를 기해 장터에 모여든 군중과 합류해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했다.
잠시후 긴급출동한 일경의 저지로 군중은 해산되고 주동자 이하 13명이 붙잡혔다.

이날 독립만세 시위는 마무리됐지만, 그러나 3월15일 하루에 그치지 않았다. 5월까지 3회가량의 추가 시위가 이어졌다.
3월부터 5월까지 3회에 걸친 시위에 1700여명이 참가, 67명이 부상하고, 80명이 일제 경찰에 검거됐다고 독립기념관 기록은 전한다.
2010년 독립기념관 의뢰로 사단법인 안동독립기념사업회가 조사한뒤 발간한 국내 항일독립운동 사적지조사보고서 경주편에서 기록한 ‘경주에서의 삼일만세운동' 기록,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등재된 경주출신의 독립운동유공자 가운데 3.1운동과 관련된 독립유공자 6명의 행적을 더듬어 보면 대강의 얼개가 나온다.
이들 기록은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재판기록등을 토대로 정리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이들 기록을 토대로 정리해본 경주의 3.1만세시위는 다음과 같다.

▲ 독립기념관이 2010년 국내항일독립운동 사적지 조사보고서를 통해 지정한 경주만세운동 사적지. 신한은행 4거리다.

당시 경주 읍내의 만세운동은 경주 도동리(道東里/최근엔 노동리로 수정) 교회의 영수인 박문홍(1887~1957)선생 등이 3월 9일에 경산(慶山)의 기독교 목사 김기원(金基源)으로부터 3월 8일의 대구 만세운동 소식을 들으면서 구체화됐다.
박문홍선생은 목사 박내영(朴來英) · 윤기효(尹琪涍) 등과 함께 만세운동의 계획을 세우며 동지를 포섭해 갔다.
1919년 3월 11일과 12일 밤 두 차례에 걸쳐 노동리교회에서 청년 5~6명이 모여 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 · 제작했다. 태극기는 3월 12일 밤 박문홍이 책임을 맡아 선생의 집에서 3백여 개를 만들었으며, 3월 13일 새벽을 기해 각처에 배포했다.
그런데 태극기의 배포 사실이 일제의 경계망에 포착되면서, 일제 경주경찰서에서는 3월 13일 새벽에 4대로 편성한 기동대를 투입해 만세주동자들을 체포했다.
박문홍선생은 거사를 불과 몇 시간 앞두고 일경에 체포되고 말았으며, 3월13일의 읍내 장터에서의 만세시위는 불발에 그치고 만다.

그러나 이같은 소식이 경주읍내 군중에게 계승되면서 경주읍내 작은 장날인 3월15일 수천여 명의 군중들이 선생이 만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박문홍선생은 1919년 4월 15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박문홍선생의 집에서 태극기를 만들다 일경에 사전 발각됐던 김철(1896~1978)선생은 3월15일 박봉록(朴鳳祿) · 서봉룡(徐鳳龍) 등과 함께 경주읍 장날에 장터에 모인 다수의 군중을 규합하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였다.
선생은 징역 4월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박문홍선생과 더불어 3월 11일과 12일 밤에 도동리 교회당에서 모임을 갖고 1919년 3월 13일 경주읍 장날에 거사하기로 약속했던 김학봉 선생(1898~1945)은 수상한 기미를 눈치채고 일경을 피했다가 3월 15일 경주 작은 장날이 돌아오자 태극기를 배부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만세시위를 주동했다.4월 15일 징역 10월형을 언도받아 미결기간을 합산하여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최성렬(1893~1938), 최수창(1893~1953)선생도 태극기를 장터에 나누어 주고 시위를 주도하다 각각 체포돼 각각 징역 6월과 8월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5월까지 만세 운동 3회 이어져

▲ 경주장터 지도.
경주읍성 작은장날 거사는 준비 도중 많은 주동인물들이 검거됨으로써 대규모의 만세운동으로 발전되지는 못했지만, 경주지역의 뜨거운 독립운동의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경주에서 독립운동은 그후에도 이어졌다.
독립기념관이 발간한 대구경북 항일 독랍운동 사적지 조사보고서에 자료에 따르면 1919년 3월~5월 사이에 3회의 추가 시위가 이어졌다.
3회에 걸친 시위에 1700여명이 참가, 67명이 부상하고, 80명이 일제 경찰에 검거됐다.

1971년 발간된 경주시지는 당시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전국적 운동이 숙지근하여지는 5월초 천여군중이 군경의 틈을 엿보아 시장의 이 구석 저 구석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또한 해산과 체포를 당하고 그 다음날 또 그러하여 한번더 크게 기세를 올렸다 하기는 어려우나 많은 인사가 체포 또는 구금을 당했다.

2010년 항일독립운동 사적지 조사보고서에서 경주시 동부동 113-6번지 신한은행 4거리일대를 경주의 만세시위가 일어난 항일 독립운동 사적지로 지정했다.  1919년 3월15일 경주읍 장날을 이용해 만세시위를 벌인 당시 경주군 경주읍 장터라는 것이다.
박문홍등의 판결문등을 근거로 이 일대를 사적지로 지정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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