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신라의 건국, 흥망성쇠의 길을 따라
[2017년 3월] 신라의 건국, 흥망성쇠의 길을 따라
  • 편집팀
  • 승인 2017.03.27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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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취재] 한수원과 함께 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 3월 답사

[2017년 3월] 신라의 건국, 흥망성쇠의 길을 따라서…
[동행취재] 한수원과 함께 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

▲ 양산재 앞에서 참가자들이 기념촬영했다.
▲ 서악서원에서 선비 체험.

▲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들과 별도로 참가한 성인들을 위한 문화재 해설을 별도로 진행했다.
<한수원과 함께 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 3월 탐방은 신라의 건국과 그 흥망성쇠를 따라가는 길이었다.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탄강신화가 깃든 나정, 박혁거세 거서간과 왕비 알영등의 무덤이 있는 오릉, 신라최초의 궁궐터라고 전하는 창림사지, 포석정, 신라궁성 월성과 동궁인 월지등을 탐방했다.

참가 인원 60명의 절반이 유아 및 초등학교 어린이들이어서 신라의 건국과 흥망성쇠를 따라 가는 한편 서악서원에서 선비체험을 하는 시간도 가졌다.

이날 탐방은 포항MBC 전국시대 제작팀이 동행취재 했다.
이날 제작한 방송은 3월30일 오후 6시10분부터 전파를 탈 예정이다.

▲ MBC 방송제작진이 참가 어린이를 인터뷰하고 있다.
한편 지난해 3월 경주로 본사를 이전한 한국수력원자력(주)이 경주시민들에게 '경주 바로 알기'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후원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은 월1회 5천원의 저렴한 비용으로 참가할 수 있다.
탐방은 경주 최고의 답사전문 문화단체인 신라문화원이 주관한다.
4월월에는 <능과 탑 불상의 도시 경주>를 주제로 경주박물관, 괘릉, 불국사, 석굴암등을 탐방한다.
문의 및 참가신청. 774-1950.

아래는3월 탐방에서 만난 주요 문화재.

[오릉]

▲ 오릉을 탐방하고 있다.
4기의 봉토무덤과 1기의 원형무덤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 등 신라 초기 4명의 박씨 임금과 혁거세의 왕후인 알영왕비 등 5명의 무덤이라 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혁거세왕이 임금 자리에 있은지 62년 만에 하늘로 올라갔다가 7일 후에 몸이 흩어져 땅에 떨어지자 왕비도 따라 죽으니, 사람들이 같이 묻으려고 했으나 큰 뱀이 방해해서 몸의 다섯 부분을 각각 묻었는데, 그것을 오릉(五陵) 또는 사릉(蛇陵)이라 했다고 한다.

내부구조는 알 수 없으나 무덤의 겉모습은 경주시내에 있는 다른 삼국시대 신라무덤과 같이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으로, 1호 무덤이 높이 10m로 가장 크며, 2호 무덤은 표주박 형으로 봉분이 두 개인 2인용 무덤이다. 이러한 대형 원형 봉토무덤은 신라에서는 4세기 이후 등장하는 것으로 박혁거세 당시의 무덤 형식은 아니라는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나정]

▲ 나정의 석재.
사적 제245호.
박혁거세(朴赫居世)가 태어난 전설을 간직한 우물.
신라가 세워지기 전의 경주지역 일대는 진한의 땅으로 6명의 촌장들이 나누어 다스리고 있었다. 그 중 고허촌장인 소벌도리공이 양산 기슭 우물가에서 흰 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울고 있는 것을 발견하여 그곳으로 가보니 빛이 나는 큰 알이 하나 있었다. 알 속에서 남자아이가 태어나자 하늘에서 보내준 아이라고 생각하여 잘 길렀다.
박처럼 생긴 알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성을 박(朴)이라 하고, 세상을 밝게 한다는 뜻에서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고 하였다. 아이가 13살이 되던 해인 B·C 57년 왕의 자리에 올라 나라를 세우고 서라벌이라고 이름지었다
2002년 발굴조사에서 대형 8각 목조건물터가 확인됐다.
8각 건물은 지금까지 삼국 가운데 고구려의 탑(塔)형식으로만 알려져 왔으며, 신라에서 8각 건물터가 발견된 것은 나정이 처음이었다.
박혁거세를 모시던 사당일 가능성도 제기됐다.
당시 발굴에서는 몇가가 새로운 사실도 드러났다.
첫째는 화강암에 덮여 있는 우물터가 우물이 아니라는 점. 우물터엔 우물 흔적이 없고, 대신 흙을 곱게 단단히 다진 건물터만 나왔다. 우물이 아니라 건물이 서 있었다.

둘째로 담장 바깥쪽에서 기둥을 세운 흔적이 50여 곳이나 드러났다. 돌무더기를 쌓아 초석(礎石)을 대신하는 적심(積心)들이다. 그림을 그려 연결해본 결과 한 변의 길이가 8m, 폭 20m 가량의 대형 8각형 건물을 세웠던 기둥 자리이다.

셋째는 적심 바깥쪽으로 둥글게 만들어진 돌 기단(基壇 : 집터를 돋우고 둘러싼 구조물)으로 이 역시 매우 중요한 건물이 세워졌던 터임을 확인해주는 증거다.
각종 기와 조각들이 나왔는데,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통일 이전 신라 기와도 섞여있었다. 따라서 삼국시대부터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됐다.
각종 문양이 새겨진 기와 조각의 품질로 미뤄 일반 가옥의 흔적이 아님은 확실하다. 신궁은 『삼국사기』에 따를 경우 487년 소지마립간이 ‘시조가 탄생한 나을(奈乙)에 세웠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정확한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다.

‘시조가 탄생한 나을’이라면 ‘나정’일 가능성이 크지만 객관적인 입증 자료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 이번 발굴 결과 건물터가 확인됨에 따라 나정에 신궁이 건립됐을 가능성은 한결 커졌다.

[양산재]
신라가 건국되기 전에 서라벌을 다스린 여섯 마을 시조들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으로 1970년대에 세웠다.

[창림사지]

▲ 창림사터 3층석탑. 2015년 국가지정 문화재 보물로 지정됐다.
창림사는 남산에 있는 많은 절터 가운데 이름이 뚜렷할 뿐 아니라 남산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탑이 있어 유명한 유적지이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이곳은 신라 건국기의 왕궁 지였던 금성의 옛 터이며 이곳에서 박혁거세와 알영부인이 13세 되던 해까지 성장했다고 전하기도 한다.

이곳에 있는 삼층석탑은 2015년 2월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지정됐다.
이 석탑은 추사 김정희가 창림사 터를 찾았을 때 모사(베낌)한 ‘무구정탑원기(無垢淨塔願記)’라는 신라시대 금석문을 근거로 신라 문성왕 때(855년) 세워졌다고 보지만 더 이른 시기로 봐야 한다는 이견도 적지 않다. ‘무구정탑원기’는 탑의 건립 배경과 참여 인력, 발원 내용을 기록한 금동판이다. ‘무구정’은 불교 경전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뜻한다.

탑은 2중으로 된 기단을 조성한 후 탑신부 3개 층을 얹은 전형적인 신라 삼층석탑 양식을 따른다. 아래층 기단은 돌 하나에 면석과 그것을 받치는 돌인 저석을 나누어 다듬는 한편 각 면석에는 일종의 기둥인 탱주 3개를 표현했다. 불교미술사학계에서는 탱주 개수를 석탑의 변천을 확인할 수 있는 지표로 보기도 한다. 이는 이 석탑을 만든 시기를 통일신라 초기인 7세기 말로 보는 유력한 근거가 된다. 더불어 10개 석재로 구성된 하층 기단부 양식은 8개 석재로 그것을 만든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37호)이나 경주 장항리 서오층석탑(국보 236호)보다 옛날 석탑으로 보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이 석탑에서 특징적인 부분은 상층 기단 면석에 돋을새김한 팔부신중이다. 팔부신중이란 불교에서는 불법을 수호하는 여덟신을 말한다. 창림사지 석탑 팔부신중은 화려함을 자랑하지만 현재는 남면 1구, 서면 2구, 북면 1구만 남았고 그외 면석은 현대에 복원하면서 새로운 소재로 교체됐다.

석탑은 그간 파괴된 상태로 방치되다가 1976년 결실된 부재를 보강해 복원됐다. 이 과정에서 2·3층 탑신과 상층기단의 팔부신중상 4매, 기단 석재 일부가 새로운 부재로 교체됐다. 삼층석탑이 자리한 창림사터에서는 그간 발굴조사를 통해 불국사를 비롯한 다른 통일신라 시대 가람에서 나타나는 독립된 공간들이 확인되기도 했다. 석탑은 사역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새로 넓힌 영역에 세웠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포석정]

▲ 포석정에서.
사적 제1호. 경주 남산 서쪽 계곡에 있는 신라시대 연회장소로 조성연대는 신라 제49대 헌강왕(875~885)때로 본다.
중국의 명필 왕희지는 친구들과 함께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술잔이 자기 앞에 오는 동안 시를 읊어야 하며 시를 짓지 못하면 벌로 술 3잔을 마시는 잔치인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하였는데, 포석정은 이를 본따서 만들었다고 본다.

현재 정자는 없고 풍류를 즐기던 물길만이 남아있다. 물길은 22m이며 높낮이의 차가 5.9㎝이다. 좌우로 꺾어지거나 굽이치게 한 구조에서 나타나는 물길의 오묘한 흐름은 뱅뱅돌기도 하고 물의 양이나 띄우는 잔의 형태, 잔 속에 담긴 술의 양에 따라 잔이 흐르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다고 한다.

유상곡수연은 중국이나 일본에도 있었으나 오늘날 그 자취가 남아있는 곳은 경주 포석정 뿐으로, 당시 사람들의 풍류와 기상을 엿볼 수 있는 장소이다. [문화재청]

[월성]

▲ 월성발굴현장에서.
사적 제16호 . 월성은 신라 궁궐이 있었던 도성이다. 성의 모양이 반달처럼 생겼다하여 반월성·신월성이라고도 하며, 왕이 계신 성이라 하여 재성(在城)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파사왕 22년(101)에 성을 쌓고 금성에서 이곳으로 도성을 옮겼다고 전한다. 이 성은 신라 역대 왕들의 궁성이었으며, 문무왕 때에는 안압지·임해전·첨성대 일대가 편입되어 성의 규모가 확장되었다.

성을 쌓기 전에는 호공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탈해왕이 어렸을 때 꾀를 내어 이곳을 차지했다고 한다. 남해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탈해왕을 사위로 삼았으며, 신라 제4대 왕이 되었다는 전설도 전한다.

성의 동·서·북쪽은 흙과 돌로 쌓았으며, 남쪽은 절벽인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성벽 밑으로는 물이 흐르도록 인공적으로 마련한 방어시설인 해자가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경주 동궁과 월지로 통했던 문터가 남아있다. 성 안에 많은 건물터가 남아있으며, 1741년에 월성 서쪽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석빙고가 있다. [문화재청]
신라왕경핵심유적 복원정비사업의 핵심사업으로 발굴작업이 한창이다.

▲ 동궁과 월지
[동궁과 월지]
사적 제18호.
안압지 서쪽에 위치한 신라 왕궁의 별궁터이다. 다른 부속건물들과 함께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신라 경순왕이 견훤의 침입을 받은 뒤, 931년에 왕건을 초청하여 위급한 상황을 호소하며 잔치를 베풀었던 곳이기도 하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문무왕 14년(674)에 큰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에 3개의 섬과 못의 북·동쪽으로 12봉우리의 산을 만들었으며, 여기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전해진다.『삼국사기』에는 임해전에 대한 기록만 나오고 안압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데,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에서 “안압지의 서에는 임해전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현재의 자리를 안압지로 추정하고 있다.

일제시대에 철도가 지나가는 등 많은 훼손을 입었던 임해전 터의 못 주변에는 회랑지를 비롯해서 크고 작은 건물터 26곳이 확인되었다. 그 중 1980년에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곳을 포함하여 서쪽 못가의 신라 건물터로 보이는 5개 건물터 중 3곳과 안압지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보상화무늬가 새겨진 벽돌에는 ‘조로 2년(調露 二年, 680)’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임해전이 문무왕 때 만들어진 것임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대접이나 접시도 많이 나왔는데, 이것은 신라무덤에서 출토되는 것과는 달리 실제 생활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해전은 별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며 안압지는 신라 원지(苑池)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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