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최초 의병창의 임란의사 김호장군 영정제작 봉안...장군의 숭고한 정신 기려
경주 최초 의병창의 임란의사 김호장군 영정제작 봉안...장군의 숭고한 정신 기려
  • 김종득 기자
  • 승인 2017.05.15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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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정 봉안에 앞서 김호장군 고택에서 축하공연이 진행됐다.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 경주에서 후학을 양성하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59세의 나이로 의병을 일으켜 경주성 탈환등에 혁혁한 전공을 세운 월암 김호장군의 영정이 제작돼 14일 경주시 탑동 속칭 식혜골에 있는 그의 고택에서 뜻깊은 봉안식을 가졌다.

영정은, 살신성인으로 나라와 백성을 위기에서 구하고자 장렬히 순절한 김호 장군의 불천위 사당( 不遷位.나라에 큰 공훈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으신 분에 대해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祠堂)에 영구히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神位)를 말한다/편집자) 에 영정이 없음을 부끄럽게 여긴 경주의 뜻있는 인사들이 뜻을 모아 제작했다.

2013년 3월 김윤근 현경주문화원장을 위원장으로 김병호 경주임란의사 추모회장, 동국대 경주캠퍼스 허만욱 교수(화가), 월암김호장군 숭모회 관계자등이 모여 영정제작 추진위원회를 결성한지 만 4년여만에 영정제작을 완료하고 봉안식을 하게 된 것.

14일 오후 열린 봉안식은 월암 김호장군의 후손들과 향토 문화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축하공연과 고유제등이 진행됐다.

김윤근 영정제작추진위원장은 경과보고를 통해 장군의 충절과 고귀한 정신을 기렸다.

▲ 김윤근 영정제작추진위원장이 경과보고를 하고 있다.
“고향에서 작은 초당 월암정을 짓고 후학지도에 전념하던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59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경주에서 맨먼저 의병을 일으켰고, 경주 노곡전투등 여러전투에서 대승하여 왜군의 북상에 치명적 타격을 입히고 경상도 의병장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으며, 경주성 탈환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여 경주의 역사와 문화를 지키고 보존하는데 절대적으로 기여한 인물이었다.
더욱 거룩한 것은 나라가 그의 공을 높이 치하하여 절충장군으로 부산진 첨절제사로 명했으나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고 부임하겠다며, 적을 물리침에 최선을 다하다 장렬히 전사한 것이다.

장군은 주어진 벼슬길에 나가 안전을 도모하지 않고 살신 성인하여 나라와 백성을 위기에서 구하고, 순절했지만 불천위 사당에 영정이 없음을 부끄럽게 생각한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의법한 영정을 제작해 불천위 사당에 봉안한다.오직 국난타계의 선봉자로 오직 충의로서 헌신한 의병도대장 김호장군의 숭고한 정신을 추모하고 기리고자 한다."

김하술 월암김호장군 숭모회장은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국가를 생각하여 분연히 떨쳐 일어난 김호장군의 살신성인 정신을 가슾깊이 새기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며 영정제작 추진위원회등에 깊은 감사의 뜻을 전했다.

▲ 허만욱 화백.
이 영정을 제작한 허만욱 화백은 김호 장군의 전기와 관련 서적을 섭렵하고 후손 30여 명의 얼굴을 분석하고 종합해 이미지를 도출해냈다고 한다. 천안독립기념관, 용산전쟁기념관, 진천, 안동, 상주등 전국의 유명한 의병들의 영정 자료를 수집하는등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영정제작에만 1년6개월 걸렸다고 한다. 
봉안식에서 만난 허만욱 화백은 “의병장으로서 창의를 주도한 정신과 기개, 업적에 주안점을 두고 영정을 제작했다”고 밝혔다.

▲ 고유제를 위해 영정을 단상에 모시고 있다.
봉안식 참가자들과 문중후손들은 경주최초로 의병을 규합해 여러 전투에 참가해 승리하고 왜군의 북상로를 차단하고, 경주성 탈환의 계기를 마련했으나 장렬히 전사한 김호장국의 업적과 기개, 호국정신을 널리 알리는 계가 되기를 한목소리로 기원했다.

 월암 김호장군은?
임란당시 경주 최초 의병 창의...왜병 북상 저지에 큰 공세워

▲ 14일 봉안한 김호장군 영정
조선 중종 29년(1534년) 경주부 월남 식혜동(지금의 탑동)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경주. 자 덕원(德元). 호 월암(月庵).
1570년(선조 3) 무과에 급제하고, 20년의 관직생활 끝에 훈련원봉사(訓練院奉事)를 끝으로 사직, 하향헸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던해는 59세.
경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에 의해 의병도대장(義兵都大將)에 임명되어, 경주 부근의 각 군현을 돌아다니면서 민심의 안정을 꾀하고 의병을 모아 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수시로 적진을 공략하여 적지 않은 전과를 올렸다. 전곡과 전천 등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부산첨사에 제수되었다.

의병 1400여 명을 이끌고 경주 노곡(奴谷: 蘆谷)에서 적군과 맞부딪쳐 많은 전공을 세웠다. 적군의 북상을 저지하다가 언양에서 진격해 온 약 500기에 달하는 적군과 싸워 적을 섬멸했다. 그러나 그도 큰 부상을 입고 전사했다(경주노곡리 전투). 이 싸움에서 의병은 경주 일원의 적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고, 끝까지 추격을 감행하여 그 전과가 컸다.
1758년(영조 34) 다시 형조참판에 추증됐다. 

경주 식혜골에 있는 김호장군 고택 (국가민속문화재 제34호)

▲ 김호장군 고택.
경주시 식혜골길 35 (탑동)에 있는 김호장군의 고택은 17세기전후에 세운 것으로 추정하며 집터는 신라시대 절터였다는 설이 있다.
주변에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여러 석조물이 있고 마당의 우물돌은 지금까지도 사용하고 있다.

대문을 들어선 정면에 안채, 왼쪽에 아래채, 안채 오른쪽 뒤편으로 가묘(家廟)가 배치되어 있다. 원래 사랑채가 동쪽에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자리만 남아있다.
안채는 앞면 5칸·옆면 1칸 규모에 왼쪽부터 부엌, 방, 대청, 방으로 단순한 구성을 이루고 있다. 집을 처리한 기법들은 옛 법식을 따르고 있고 대청 앞에는 문짝을 달았다. 대청에 문짝을 다는 예는 안동지방 북쪽에서 드물고, 경주, 월성 일대에 집중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발견되며, 그 중 에서도 특히, 이집은 오랜 수법을 보이는 예로 주목받고 있다.
아래채는 앞면 3칸·옆면 1칸이며 지붕은 초가지붕이다. 왼쪽부터 방, 방, 부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굴뚝을 부뚜막 한쪽에 설치하여 구성의 특이함을 보이고 있다.

가묘는 따로 담장을 둘러 세운 맞배지붕집으로 안쪽을 모두 터 놓은 통칸으로 만들었다.
가장 오래된 민가 건물 중 하나로 옛 건축 수법과 독특한 구조를 지니고 있어 중요한 연구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지정 당시 명칭은 '경주탑동김헌용고가옥(慶州塔洞金憲容古家屋)'이었으나,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순국한 김호 장군의 고택임을 감안하여 2007년 1월29일 김호장군 고택'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2013년 영정제작추진위원회가 구성된뒤 경주시 한옥체험프로그램 공모에 채택돼 한옥을 체험하는 민박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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