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야호(夜好) 경주,신라달밤 나들이>
[2018년 9월] <‘야호(夜好) 경주,신라달밤 나들이>
  • 편집팀
  • 승인 2017.10.01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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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원과 함께 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 시즌Ⅱ

[2018년 9월] <‘야호(夜好) 경주,신라달밤 나들이>
[동행취재] 한수원과 함께 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 시즌Ⅱ

9월23일 진행한 한수원과 함께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 주제는 <‘야호(夜好) 경주,신라달밤 나들이>
서악서원에서 화랑복 체험을 하고 , 무열왕릉, 김유신 묘, 서악서원 고택음악회를 참관한뒤 경주 도심 대표적 문화재인 첨성대와 동궁과 월지를 탐방하는 일정이었다.

14회 역사문화탐방을 이어오면서 오후 3시에 집결한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는 매월네째 토요일 오전 9시에 모여서 답사를 나섰지만, 이날만은 처음으로 오후에 집결, 야간탐방에 나선것.

선착순 40명을 모집한 이날 행사는 높은 관심과 인기를 반영하듯 9월초 신청자 접수가 일찌감치 마무리 된 가운데 진행됐으며, 초가을밤 서원에서의 화랑및 다도체험, 음악회 참관, 동궁과 월지. 첨성대의 야경을 둘러보며 높은 만족도 속에서 마무리 했다.

▲ 태종무열왕릉 일대에서 기념촬영했다.

▲ 서악서원에서 다도체험을 하고 있다.

▲ 서악서원에서 국궁체험을 하기 위해 준비운동을 하는 모습.

▲ 참가자들이 음악회를 보며 즐거워하고 있다.

▲ 첨성대 탐방.

▲ 동궁과 월지에서.

다음은 이날 탐방한 주요 문화재.

[서악서원]

▲ 서악서원 전경
1651년(효종 2년)에 이정(李楨)을 중심으로 한 지방 유림의 공의(共議)로 설총, 김유신, 최치원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서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처음에는 선도산 아래에 서악정사(西岳精舍)로 창건하여 향사를 지내오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 1600년(선조 33년) 서원터의 초사(草舍)에 위패를 모셨다. 1602년 묘우(廟宇)를 신축하고, 1610년에 강당과 재사를 중건하였으며, 1623년(인조 1년) “서악(西岳)“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시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중의 하나이며, 1873년에 중수하여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묘우, 5칸의 시습당, 5칸의 절차헌, 5칸의 조설헌, 영귀루, 3칸의 전사청, 4칸의 고자실, 도동문, 외문, 내문 등이 있다. 묘우에는 설총, 김유신, 최치원의 위패가 봉안돼 있으며, 강당인 조설헌은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시습당과 절차헌은 유생들이 공부하며 거처하는 곳이며, 영귀루는 누각이다. 전사청은 향례 때 제수를 마련하여 두는 곳이며, 고자실은 고자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2월 중정(두번째 정일)과 8월의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은 7변 7두이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물로는 문집 몇 권이 있다. 재산으로는 대지 1,100평, 답 3,600평, 임야 3,400평 등이 있다.

서원에서의 건물배치는 일정한 규범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꼭 있어야 할 공간은 있어야 한다.
즉 사주(祠主)에 제사하는 사(祀)를 위한 공간과 유생들이 글공부하는 재(齋) 공간이 필히 있어야 하며 그 외에 경각, 비각이 별도 또는 재공간에 함께 있다.

사주의 위패를 모셔서 제사하는 사공간에는 묘당을 중심으로 전사청, 제기고가 한 구역을 이루어 담장을 두르고 삼문을 두어 출입하게 되어 있다. 교육을 하는 재공간에는 유생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강당의 기능을 갖는 큰 마루가 있는 건물이 있고, 그 앞에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는 재건물을 마주보게 배치하고, 재 앞에는 휴식을 위한 누각을 두어 이들 건물이 모두 한 구역을 이루어 전체적으로 두 개의 구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또 이 공간 밖의 측면이나 뒷면에 전체를 관리하는 고직사가 별도의 공간을 이루고 있다.

[무열왕릉]

▲ 무열왕릉
무열왕릉은 신라시대의 무덤으로 실제로 그 주인을 아는 몇 안되는 왕릉 중의 하나이다. 능은 높이 12m 밑둘레 약 110m 이며 능둘레에 자연석으로 1m 정도 석축을 쌓고 3m 간격으로 호석을 세웠으나 흙에 묻혀서 잘 보이지 않는다.

무열왕은 25대 진지왕의 아들 용춘과 26대 진평왕의 공주 천명부인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선덕여왕 11년(642년) 백제에 의해 대야성이 함락 되고 사위와 딸이 몰살 당하자 고구려 연개소문 장군에게 군사요청을 하였으나 거절당한 역사적 사건이 있으며 진덕여왕 1년(647년) 비담과 염종이 명활산성에 진을 치고 여왕을 퇴위시키려고 난을 일으켰다.

진덕여왕의 후대가 없자 김춘추를 다음왕으로 추대하였으나 3번이나 사양하다가 수락하여 654년 29대왕으로 등극하였다. 이로써 신라사에서 성골왕대는 끝을 맺고 진골왕대가 시작 되었다. 왕이 되어서는 여러 가지 업적들이 있으나 그중에서도 특히 660년 당과 합세하여 백제를 멸망시킴으로써 삼국통일의 기초를 이루어놓았다.

이 왕릉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귀부가 있으며 귀부는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여 목과 머리는 길게 내밀어 올렸다. 목의 위 아래 머리와 눈 주위에는 보상화문이 양각되어있고 특히 목주위가 붉은 것은 힘을 슬 때 나타나는 것을 생동감있게 표현했다. 거북의 등인 귀갑에는 귀갑문을 조각했으며 귀갑의 둘레에는 비운문을 양각하여 놓았다. 귀갑의 중앙거북등에는 연꽃문을 두르고 네모꼴의 비좌를 만들었다. 귀부의 앞 발가락은 각각 5개인데 뒷 발가락은 각각4개의 발가락으로 조각했다. 이것은 거북이가 움직일 때 뒷발가락 1개를 접어넣는 것은 역동하는 거북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수는 좌우 6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받들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고 가운데는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 라 전서로 양각 되었다.”

김인문은 무열왕의 둘째 아들로 서예와 활쏘기, 말타기, 음악에 뛰어나고 문무를 겸비한 인재였다. 아버지인 태종무열왕의 능비에 글을 짓고 글씨를 쓰고 비액의 전액을 썼다.

1560년(명종15) 경진 9월 22일 통정대부 예조참의에서 경주부윤으로 도임하여 1563년(명종18)정월에 임기 만료로 해임한 귀암 이정 이 부윤으로 재직시에 사부인 퇴계 이황이 이정의 편지에 답하는 간찰에 주목할 글귀가 있다. 『무열왕릉비석의 일은 내가(이황) 전해들었 노라. 그 사람의 무식함을 매우 탄식하노라 비석을 도로 돌려 받아 새겨 새우면 매우 좋겠다. 그러나 내 생각은 이미 잘게 미석을 갂았다하니 옛날 탁본하여 찍은 비문은 아마도 거듭 새기 면 서로 맞지 않을 듯하니 어떻게 할 것인가 어찌하면 좋으리라 그러니 별도의 돌을 써서 그 탁본을 새긴다면 어찌 더욱 좋지 않겠는가』

이것은 이정이 무열왕릉비를 옛 탁본으로 새로 새겨 세우려는 계획을 서찰로 문의하여 고견을 구함에 이황 이 이정에게 보낸 편지의 구절이다. 사제간에 주고받은 서찰이다. 이를 볼 때 당시까지 무열왕릉비 탁본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비석도 넘어져 있었지만 원형은 유지되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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