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신라속의 조선의 향기를 찾아
[2017년 11월] 신라속의 조선의 향기를 찾아
  • 편집팀
  • 승인 2017.11.29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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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취재] 한수원과 함께 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 시즌Ⅱ

[2017년 11월] 신라속의 조선의 향기를 찾아
[동행취재] 한수원과 함께 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 시즌Ⅱ

▲ 탐방단이 양동민속마을 입구에서 박주연 문화유산 해설사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지난달 중순 발생한 포항강진 탓일까.
11월25일 한수원과 함께 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은 참가자들이 눈에띄게 줄었다.
지진충격으로 답사를 신청했던 많은 포항시민들은 일찌감치 취소했고, 인근 울산, 부산지역에서 찾아오던 답사객도 많이 감소한 가운데 진행했다. 

신라천년의 수도로서 찬란한 신라유산을 보유하고 있는 경주는  신라이후 1천년동안의 역사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당연히 조선시대 문화유적도 곳곳에 있다.
11월 답사주제는 ‘신라속의 조선’ 이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역사마을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양동민속마을-옥산서원-독락당-용담정을 두루 살펴보는 일정이었다.
지난해에는 서원을 주제로 동강서원을 방문했었지만, 올해는 동학의 발상지 용담정을 새롭게 답사일정에 포함시켰다.

▲ 옥산서원에서.
다음은 이날 답사한 주요유적.

양동민속마을

▲ 양동마을 전경
2010년 한국의 역사마을로 하회마을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중요민속자료 제189호. 이 마을은 조선시대 초기에 입향(入鄕)한 이래 지금까지 대대로 살아온 월성손씨(月城孫氏)와 여강이씨(驪江李氏)가 양대문벌을 이루어 그들의 동족집단마을로 계승하여 왔다.

먼저 입향한 손씨는 이씨의 외가로서, 손·이 양씨는 지금까지도 상호통혼을 통하여 인척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마을의 대소사에 협동해오고 있는데, 이따금 갈등과 분쟁을 야기시키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마을은 경주시내에서 동북방으로 16㎞쯤 떨어져 있으며 넓은 평야에 임한 거꾸로 勿자형 산곡이 경주에서 흘러드는 형산강을 서남방 역수(逆水)로 안은 지형이다. 이 역수 지형이 마을의 끊임없는 부의 원천이라 믿어지고 있다.
마을의 서편에는 실제로 부의 상징인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고 그 대부분의 지주가 과거에는 손·이 양씨였으므로 ‘역수의 부’는 관념이 아닌 현실이었던 것이다.
이 마을 앞을 흐르는 형산강(兄山江)은 옛날에는 수량도 많고 바닥도 깊어서 포항 쪽의 고깃배들이 일상 내왕하였기 때문에 해산물의 공급이 불편 없이 이루어졌었다고 한다. 지금은 수량도 줄고 바닥도 높아져서 어선의 내왕이 불가능하다.

마을의 형성과정에 대하여 전승되어 온 이야기에 의하면 양동은 역대로 ‘외손이 마을’이라 불렸다고 한다. 즉, 고려시대에는 오태사(吳太師)에서 장태사(蔣太師)로, 조선시대에는 유복하(柳復河)에서 손소(孫昭)로, 다시 이번(李蕃)으로 계속해서 외손 쪽으로 계승되어 왔다고 한다.
일설에는 신라시대에 아산장씨(牙山蔣氏)가 처음 이 마을에 들어와 5, 6호의 작은 마을을 형성하였고, 그 때부터 양좌촌(良佐村)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근거가 분명한 입향조는 손소인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손소는 1459년(세조 5) 문과에 급제하였고, 1467년 함경도 길주이시애(李施愛)의 난 평정에 공을 세워 공신이 되었다.
뒤에 안동부사와 진주목사를 지냈으며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에 장인인 유복하의 상속자로 이 마을에 들어와 지금의 월성 손씨 종가를 지었다고 전한다. 현재 풍덕 유씨의 후손은 절손되어 외손인 손씨 문중에서 제향을 받들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한국의 역사마을 : 하회와 양동

▲ 향단. 호재 이언적이 경상감사로 재직할때 건축한 집이다.
한국의 역사마을에는 씨족마을, 읍성마을 등의 다양한 유형이 있으나 그 중에서 씨족마을은 전체 역사마을의 약 80%를 차지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역사마을 유형이다.
한국의 씨족마을은 조선시대(1392~1910) 초기에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조선 후기에는 전체 마을 중 약 80%를 점하게 되며,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씨족은 성씨와 본관을 같이 하는 부계혈연집단, 즉 조상을 같이 하는 동성동본인들과 다른 혈연집단에서 배우자로 들어온 여성들로 구성된 사회집단을 말한다. 씨족마을은 하나 혹은 소수의 씨족이 전체 주민구성의 다수를 차지하거나 마을의 의사결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마을을 일컫는다.

한국의 대표적 씨족마을이면서 양반마을인 하회와 양동은 모두 조선시대(1392~1910)에 양반문화가 가장 화려하게 꽃피었던 한반도 동남부(영남지방)에 위치하고 있다. 두 마을은 한국의 대표적인 마을 입지 유형인 배산임수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여름에 고온다습하고 겨울에 저온건조한 기후에 적응하기 위한 건물의 형태와 유교 예법에 입각한 가옥의 구성을
양동마을이미지
하회는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양동은 양동마을과 그 주변 관련 건축물인 동강서원, 옥산서원, 독락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 마을에는 양반씨족마을의 대표적인 구성요소인 종가, 살림집, 정사와 정자, 서원과 서당, 그리고 주변의 농경지와 자연경관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이러한 유형 유산과 더불어 이들과 관련된 많은 의례, 놀이, 저작, 예술품 등 수많은 정신적 유산들을 보유하고 있다.

하회, 양동의 두 마을은 아래와 같은 이유로 한국 씨족마을을 대표한다.

첫째, 하회, 양동의 두 마을은 한국의 씨족마을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각각 조선 전기 씨족마을 형성기의 두 가지 전형인 개척입향과 처가입향 유형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둘째, 하회, 양동의 두 마을은 전통적인 풍수의 원칙을 잘 지키고 있으며, 각각 한국 씨족마을 입지의 두 가지 전형인 강가 입지와 산기슭 입지의 대표적이고 우수한 사례이다.

셋째, 하회, 양동의 두 마을은 생산영역, 생활영역, 의식영역으로 구성되는 한국 씨족마을의 전통적인 공간구성을 기능적이고 경관적으로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는 매우 드문 사례이다.

넷째, 하회, 양동의 두 마을은 조선시대의 가장 시기가 이르고 뛰어난 살림집, 정사, 정자, 서원 등의 건축물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 유일한 사례이다.

다섯째, 하회, 양동의 두 마을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학술적, 문화적 성과물인 고문헌과 예술작품을 보관하고, 전통적인 가정의례와 특징적인 마을 행사를 오늘날까지 유지하고 있는 가장 훌륭한 사례이다.


천도교 성지 용담정

▲ 용담정
인내천 사상을 근간으로 한 우리민족의 유일한 자생 종교인 천도교의 성지가 바로 이곳 용담정 일대이다. 동학혁명의 뿌리가 되었고 근세 우리나라 사회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가져다준 천도교의 발생지다.
용담정은 수운 최제우가 도를 닦았을 뿐만 아니라 포교도 한 곳이며 마지막으로 그의 뼈를 묻은 곳이기도 한 천도교의 성지이다. 수운 최제우가 순도 한후 오랫동안 폐허가 되었다가 1960년에 정자를 복원하였으며 1974년에는 새로 크게 지은 곳으로 용담정은 최제우가 포교를 하고 용담유사를 쓴 곳으로 현재 구미산기슭 약 40만평의 땅에 들어선 수도원 시설이다.

입구에서 몇 개의 문을 지나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가장 높은 곳에 용담정이 있다. 용담정 안에는 천도교의 기도의식인 청수봉존(수운 최제우가 참형을 받을 때 청수를 받들고 순교함에 따라 청수를 떠놓고 기도하는 것임)을 할 수 있도록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수운 최제우가 태어난 가정리에는 생가가 남아 있지 않으나 그 자리에 1971년 세운 귀부와 이수를 갖춘 높이 5m의 유허비가 있다. 맞은편 산중턱에는 그의 묘가 있으며, 묘의 왼쪽 골짜기에 용담정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 곳이 모두 1km 이내의 거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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