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인권변호사 권영국의 경주살이] ⑤ 신라의 건국신화를 찾아서
[노동인권변호사 권영국의 경주살이] ⑤ 신라의 건국신화를 찾아서
  • 권영국 시민기자
  • 승인 2018.01.04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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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새해를 경주에서 맞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차가운 겨울의 한가운데서 말이다. 해를 넘기며 새해를 경주에서 맞았으니 이제 물어볼 것도 없이 경주시민이다. 다만, 국민의 힘으로 불의한 권력을 파면한 정유년을 보내기가 아쉬웠는지 해를 넘기기 이틀 전부터 감기몸살로 자리보전까지 해야 했다. 어쩌면 작년 여름 서울에서 경주로 내려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다 보니 모르는 사이 몸에 과부하가 걸렸나보다. 다행스럽게 아내의 간호로 새해를 맞이하기 몇 시간 전부터 몸 상태가 호전되기 시작했다. 새해를 다시 건강하게 맞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 나정에서

경주에서 맞는 새해 첫날, 무엇을 할까 궁리해보다가 문득 신라의 기원을 찾아보고 싶어졌다. 아내와 상의하니 좋다고 했다. 우리는 점심으로 떡국을 끓여먹고 신라의 시조왕인 박혁거세의 탄생설화가 서려있는 나정(蘿井)과 왕이 사후에 묻힌 오릉(五陵)을 가보기로 했다. 박혁거세가 왕이 된 유래를 더듬어 올라가면 신라의 기원이 보일 것 같아서였다.

황성동에서 7번 국도를 타고 울산방면으로 가다 경주국립박물관을 조금 지나 경주 IC방향으로 접어들어 얼마간 가다보니 나정과 양산재라는 표지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이 양산재 사당이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옛날 한반도 동남쪽 진한(辰韓) 땅(지금의 경주지역)에는 고조선의 유민이 산골짜기마다 씨족 부락을 이루어 여섯 마을로 나뉘어 살았는데, 알천의 양산촌, 돌산의 고허촌, 취산의 진지촌, 무산의 대수촌, 금산의 가리촌, 명활산의 고야촌 등 사로 6촌(六村)이 바로 그것이다. 6부촌(六部村)으로도 불리어지는데 이는 사로6촌이 신라 6부로 발전하면서 붙여진 명칭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중국 전한의 선제 5년(BC 69년) 3월 초 하루에 6부의 조상, 즉 6촌의 촌장들은 각기 그 자제들을 데리고 양산촌의 알천가 박바위(표암 瓢巖)에 모였다. 표암이란 빛나는 바위라는 뜻이다. 그곳에서 이들은 자신들을 다스릴 군주가 없으므로 백성들이 각자 제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여 질서가 없음을 지적하고 덕이 있는 이를 찾아내 군주를 세우고 나라의 틀을 마련하기로 결의했다.
그 결의에 따라 6부의 촌장들은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의 나이 13세가 되던 해인 BC57년에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고, 박혁거세는 즉위하자 왕호를 거서간으로, 국호를 서라벌(徐羅伐)이라 했다. 서라벌에서 ‘서라’는 신라를 다른 한자로 표기한 것이며, ‘벌’은 신라의 지명 어미에 많이 붙는 것으로 원, 국(國), 성을 의미한다고 한다. 결국 서라벌은 ‘신라국’을 의미하는 것으로 6부 촌장의 합의로 왕을 추대함으로써 마침내 신라가 탄생한 것이다.

신라의 3대왕이었던 유리왕은 신라를 탄생시킨 6부 촌장들의 건국 공로를 기리기 위해 알천 양산촌장인 알평에게 이씨, 돌산 고어촌장인 소벌도리에게 최씨, 무산 대수촌의 촌장 구례마에게 손씨, 취산 진지촌의 촌장 지백호에게 정씨, 금산 가리촌의 촌장 지타에게 배씨, 명활산 고야촌의 촌장 호진(설거백)에게 설씨로 고유한 성을 내렸고 이들은 각 성씨의 시조가 됐다. 이처럼 신라를 탄생시키는데 공로가 지대한 6부 촌장들을 모신 사당이 바로 양산재이다.

양산재에 바로 인접한 곳에 나정(蘿井)이 있는데, 신라의 시조왕 박혁거세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깃든 우물이다. 현재 사적 제245호로 지정되어 있다. 나정과 관련하여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일시조혁거세거서간(第一始祖赫居世居西干)에 이 우물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어느 날, 진한 6촌(六村)의 하나인 고허촌(高虛村)의 촌장 소벌공(蘇伐公)이 양산 밑 나정 우물 곁에 있는 숲 사이를 바라보니 이상한 빛이 하늘로부터 드리웠는데, 그 빛 속에 흰 말 한마리가 무릎을 꿇고 울고 있으므로 그곳으로 찾아가 보니 그 말은 간 곳이 없고 다만 불그스름한 큰 알이 있을 뿐이었다. 그 알을 이상히 여겨 깨어보니, 그 알 속에는 신기하게도 예쁘고 통통한 어린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다. 소벌공이 즉시 이 아이를 데려다가 길렀더니, 날로 자라나 나이 열셋에 이르렀을 때 남들보다 유달리 뛰어나게 되었다.

이에 여섯 마을 사람들은 그 아이의 출생이 이상하였던 까닭에 그를 높이 받들어 임금을 삼았는데, 그 알이 바가지만 하였으므로 성을 박(朴)이라 하고, 빛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으로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 하였으니, 그가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요, 경주박씨(慶州朴氏)의 시조이다.”

우리는 여기서 2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신라의 건국은 타민족에 대한 정벌을 통해서나 피비린내 나는 내부 권력투쟁을 통해서 이룩한 것이 아니라 6부 촌장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정치적 결정은 다른 나라 역사에서는 유래를 찾기 어렵다. 6부 촌장이 건국을 위해 한곳에 모여 회의를 한 것이 바로 화백제도의 시초로 볼 수 있다. 신라는 건국 초부터 힘을 통한 통치가 아니라 화백제도를 통해 민주적인 의사결정제도를 정착시킨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현재 경주시는 대한민국에서 청렴도가 꼴찌인 지역으로 전락했다. 경주시는 박정희 정권 이후 수십 년간 풀뿌리 민주주의를 발전시키지 못하고 기득권 세력을 옹호하는 일당이 지역의 정치・경제・사회・문화를 독점하는 체제를 지속시킴으로써 안으로부터 썩고 있는 것이다.

둘째, 알에서 태어났다는 난생설화는 박혁거세가 토착민이 아닌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6개 촌락에서 각기 씨족을 이루며 살고 있던 사람들이 신라 땅의 주인이었으나 알에서 태어난 이방인을 시조왕으로 추대했던 것이다. 이는 현재 외지인에게 배타적인 정서가 유난히 강한 경주에서 그 시사(示唆)하는 바가 크다.
신라는 외지인을 왕으로 추대하고 나라를 세울 만큼 개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지역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6부 촌장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지 않고 덕이 있고 더 지혜로운 자를 왕으로 세운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왜국의 동북쪽 천리되는 곳에 있다는 다파니국 출신 석탈해왕의 신화와 금궤에서 나와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가 된 김알지 설화(김씨 최초로 왕위에 오른 이가 알지의 7대손인 미추왕이다)를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그런데 지금의 경주는 어떠한가? 경주 태생이 아니면 그 사람의 덕목이나 능력과는 무관하게 단지 외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인습이 팽배해 보인다. 출신과 태생을 모든 것의 우위에 두려는 닫힌 태도를 지속하는 한 경주는 발전하기 어렵다. 인재의 유입을 두려워하는데 어찌 변화와 발전을 기약할 수 있겠는가?
 

▲ 오릉에서

난생설화가 깃든 나정에서 느끼는 착잡한 감정을 뒤로 하고 약 1㎞ 가량 떨어진 오릉(五陵)으로 향했다. 오릉은 아무런 장식이 없는 원형토분으로 사적 제172호로 지정된 곳인데 경주 포석로(황리단길) 왼편에 위치해있다. 따사로운 햇살과 함께 다섯 개의 서로 다른 크기의 능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부드러운 능선이 무척이나 포근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오릉에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지는데, 〈삼국유사〉에서는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가 승천하였다가 오체로 나뉘어 지상에 떨어진 시신을 합장하고자 하는데, 큰 뱀이 쫓아와 방해하므로 오체를 각각 나누어 장사지냈으므로 오릉이라고 하며, 사릉(蛇陵)이라고도 일컫는다.’라고 전하며, 〈삼국사기〉에서는 ‘오릉은 박혁거세왕, 알영왕비, 남해왕(2대), 유리왕(3대), 파사왕(5대)과 같이 박씨 왕가의 초기 능묘’라고 전한다.

오릉 둘레를 천천히 걸으며 나는 아내에게 물었다. “경주가 다시 신라의 영광을 되찾아올 수 있을까? 경주 주민들이 닫힌 마음을 열고 인재를 중심으로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내가 말했다. “그야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달렸겠지...” 오릉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새해 첫날이 서쪽으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 권영국 변호사

필자 권영국은....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배고팠던 어린시절, 역경을 극복하는 과학자의 꿈을 키웠다. 1981년 대학입학 후 사회에 대한 눈을 떴고, 야학에 참여해 공부한 노동법이 계기가 되어 방위산업체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을 설립했다. 그 대가로 두차례 해고되고, 합쳐서 3년6개월의 옥살이를 했다. 출소후 복직투쟁을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보안사 사찰 대상으로 취업이 제한된 처지에서 사법시험을 준비했고, 1999년 11월 제41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2002년 민주노총 법률원 설립에 참여해 노동변호사가 됐다.민주노총 법률원장, 민변 노동위원장 등을 거치며 용산참사, 세월호 진상규명 등 국민들의 편에서 법정투쟁을 벌였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경주에서 출마 했다 낙선했지만, 박근혜 전대통령 탄핵정국에서는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 법률팀장을 맡아 싸웠다. 거리에서 무장경찰과 싸우면서 '거리의 변호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지난 7월 경주에 법률사무소를 열었고, 9월 경북노동인권센터를 창립했다. 지난해 7월부터 경주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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