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취재] 한수원과 함께 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 시즌Ⅱ -소금강산 권역
[동행취재] 한수원과 함께 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 시즌Ⅱ -소금강산 권역
  • 편집팀
  • 승인 2018.01.29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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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소금강산 권역
[동행취재] 한수원과 함께 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 시즌Ⅱ

▲ 탈해왕릉앞에서.

2018년 1월27일 한수원이 후원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은 소금강산 권역의 문화유적을 답사했다.
굴불사터 사면석불에서 시작, 백률사-소금강산 마애삼존불-마애지장보살상-헌덕왕릉-알천수개기-탈해왕릉-표암 등 소금강산이 품고 있는 다양한 문화유적을 답사했다.

최강한파 속에서 진행된 답사였다.
탐방객은 만원인 40명을 기록하며 회차를 거듭할수록  참가 열기는 더욱 뜨거웠다.
탐방객의 분포는 다양했다.
서울, 부산, 울산, 대구, 포항 등 경향각지에서 신청했고, 남녀노소 골고루 답사에 참가했다.

2017년 8월 2년차 첫 답사를 시작한 한수원과 함께 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은 2년차 반환점을 돌아 다음달부터 4월까지 3개월동안은 '신라인이 만든 지붕없는 박물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경주남산을 찾아 나선다.
2018년 2월24일 삼불사. 삼릉, 선각육존불등을 거쳐 금오봉을 오르고, 삼륜대좌불, 용장사지 삼층석탑등을 만나는 서남산 권역을 탐방한다.
주관 접수 신라문화원 (054-774-1950) 참가비 5000원.

다음은 이날 답사한 주요 문화유적.

<굴불사터 사면석불>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慶州 掘佛寺址 石造四面佛像)
보물 제121호
1963.01.21 지정
경주시 동천동 산4번지

▲ 굴불사터사면석불을 답사하고 있다.

백률사 입구, 굴불사터에 있는 이 불상은 바위의 서쪽에는 아미타여래불, 동쪽에는 약사여래불, 북쪽에는 미륵불, 남쪽에는 석가모니불을 각각 새긴 사방불(四方佛) 형태이다.

『삼국유사』 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이 백률사를 찾았을 때 땅속에서 염불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땅을 파 보니 이 바위가 나와서 바위의 사방에 불상을 새기고 절을 지어 굴불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이 기록만으로는 분명하지 않지만, 여러 가지 여건으로 보아 이때쯤 불상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쪽의 아미타여래는 신체만 돌기둥에 조각했고 머리는 따로 만들어 놓았는데 머리가 얼굴보다 크게 표현되어 꼭 모자를 쓴 것처럼 보인다. 신체는 당당하고 굴곡있게 표현되어 있으며 손과 발 또한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좌우에는 다른 돌로 보살입상을 세워 놓아서 3존불의 모습을 띠고 있다. 동쪽의 약사여래는 양 발을 무릎위로 올리고 앉아 있는데 몸 전체가 앞으로 숙여져 있다. 얼굴 표현은 매우 세련되었으며, 신체는 활기차고 긴장감이 넘쳐 보인다. 북쪽면의 오른쪽에는 도드라지게 새긴 보살입상이 서 있고, 왼쪽에는 6개의 손이 달려있는 관음보살을 얕은 선으로 새겼다. 오른쪽의 보살상은 둥글고 예쁜 얼굴, 굴곡있는 우아한 자세 등 그 표현이 매우 뛰어나다. 남쪽면은 원래 3존상으로 되어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오른쪽 보살을 완전히 떼어 가고 가운데 본존상의 머리마저 떼어갔다고 한다. 미래세계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불을 표현한 것인데, 굴곡이 진 신체의 모습과 얇은 옷주름의 묘사가 매우 뛰어난 솜씨를 자랑하고 있다.

이처럼 입체의 표현, 음각과 양각의 표현, 좌상과 입상의 표현 등을 변화있게 배치한 점은 매우 특이한 경우이다. 풍만하고 부드러우면서 생기를 잃지 않은 솜씨를 볼 때 통일신라 초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문화재청>

굴불사는 신라 제 35대 경덕왕이 재위 시에 백율사로 행차했을 때 땅 속에서 염불소리가 들려 파게하니 큰 돌에 사면불이 새겨져 있음을 알고 절을 짓고 이름을 굴불사로 하였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사찰이다.

그러나 이 사찰은 언제 어느 시기에 왜 폐사가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고 다만 통일신라시대에 조각된 것으로 판단되는 사면석불만 그 유지에 남아 그런대로 옛 사찰의 터를 짐작하게하고, 아울러 석불만 불자들의 신앙 대상으로 오늘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제작 시기가 비교적 확실한 연대를 간직하고 있는 이 굴불사터의 사면불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이 깊은 관심을 보여 왔다.

이 굴불사 사면불에 대해서는 최초로 1910년 이전에 일본인의 손에 의해 현황 조사가 이루어졌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41년에 간행한 관야정의 조선의 건축과 예술 속에서 경주에 있는 신라 시대의 유적이란 제목하에서 굴불사 석불을 설명하면서 1909년 7월에 보고된 동양협회 조사부 학술 보고 제1책에 수록된 것을 다시 옮긴다고 부기하고 있다.

또한 내용과 함께 사면석불이 매몰된 상태의 사진이 실려 있고 내용은 금서룡박사가 반쯤 묻혀 있었던 것을 주변을 파내어 조사했다는 것이다. 또 1917년 3월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 제5책에서는 사면이 노출된 상태의 사진이 있고 해설편의 서언에는 관야정과 곡정제일이 조사한 내용이라고 되어 있다. 이로 1917년 이전에도 조사되었음을 알게 한다. 이러한 사정을 볼때 최초 금서룡이 노출시켜 조사한 해는 적어도 1909년 7월 이전에 이루어 졌음이 분명한 것이다. 아울러 1935년 5월에 보물로 지정이 되었고 1962년 보물 제121호로 재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굴불사지에 대한 발굴 조사는 1985년 8월 3일에 착수하여 10월 29일에 완료함으로써 3개월이 소요 되었다. 발굴 결과 서면에 있는 삼존불의 연화대좌, 동면 약사여래의 무릎 이하 부분이 확인되어 불상의 전체 모습을 알게 되었고 사면석불을 중심으로 조영되었던 정면 4칸, 측면 3칸의 법당터가 확인되었다.

또한 조선 시대의 기와도 수습됨으로써 이 건물은 조선 중엽에 이르기까지 목조기와 건물이 존재하였음이 밝혀졌고 뿐만 아니라 고려 시대 층위에서는 東寺라고 새겨진 명문와편을 비롯하여 많은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발굴 결과 굴불사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같이 통일신라 시대 경덕왕 때 창건되어 신라가 망할 때까지 계속 존속한 것으로 보여지며 고려 시대에는 한때 사명이 동사로 불리워졌을 가능성이 있고 고려 명종 때인 1183년에 한차례의 불사가 이루어졌다.

이때에 사찰명은 굴석사로 불리워지고 있었으며 굴석사의 이름은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할 시기인 1280년대까지 계속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절의 폐사는 몽고의 침략으로 1238년이 아니면 1250년대에 당시 사용하던 중요 불구를 땅에 매장하고 승려들은 사찰을 떠났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후 몽고병란이 끝났으나 사찰을 떠났던 사람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조선 시대에 들어와 숙종 때인 1681년에 다시 불사가 이루어진 후 100년 가량 법등이 존속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후 폐사가 되었고, 사면불은 자연적으로 매몰되고 겨우 머리 부분만 노출되어 있는 것을 1900년대 일본인들이 발굴한 결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 동서남북에 불상을 조각하는 것은 사방정토를 상징하는 것으로 대승불교의 발달과 더불어 성행한 사방불 신앙의 한 형태였다. 불교 경전이나 불상에 나타나는 사방불의 명칭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이 불상의 경우 어느 특정 경전에 의하였다고 하기보다는 당시의 대승불교에서 가장 널리 모셔졌던 불상들을 배치한 것으로 생각된다.

사면석불의 사면에는 서방정토를 주재하는 아미타삼존불, 동면에는 약합을 들고 있는 약사여래, 남면에는 석가삼존불, 북면에는 두개의 보살상이 있는데 왼쪽에는 선각으로 표현된 십일면의 얼굴과 여섯개의 손이 달린 십일면육비의 관음보살상이 있고 오른쪽에는 부조로 표현된 보살상이 있는데 형태상의 특징은 없으나 보살 중 오랫동안 신앙되어 장차 부처가 될 미륵보살이 아닌가 추측된다. 표현 양식면에서 보면 특히 서면의 왼쪽 보살은 한쪽 다리에 무게 중심을 두고 균형을 잡는 삼굴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삼국시대 말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통일신라 시대에 와서는 더욱 유행하는 양식이 된다. 이러한 삼굴자세의 원류는 인도 굽타 시대의 불상에서부터 보이나 그 양식은 중국의 수나라와 당나라를 거쳐서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이다. 남면의 불상은 경주 감산사지 출토 아미타불상과 비슷한 형식의 옷주름을 하고 있어 주목된다.

또 북면의 십일면육비의 관음보살상은 관음상의 변형으로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능력을 발휘하여 다방면의 신통력을 보여 주는 것으로 약간의 주술적인 요소를 띄고 있다. 이렇게 사면석불에 십일면육비의 관음보살상이 표현되어 있는 것은 8세기 통일신라 시대에 신앙된 불상 중에 밀교적 성격을 띠는 불상이 섞여 있음을 보여 주는 매우 귀중한 예이다.

결론적으로 전체적인 조각양식을 보면 경덕왕 대인 742∼765년 사이나 그보다 약간 올라가는 시기에 조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4면 중에서 서면의 아미타여래상은 이들 조각군 중에서는 가장 먼저 제작된 불상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특히 남면의 불상과 보살상은 8세기 후반 일본 불상 양식에서도 보이는데 나라현의 당초제사의 목조불상과 그 양식이 비슷하다.

<백률사>

▲ 백률사 대웅전

백률사는 불교를 국법으로 허용해줄 것을 주장하다 순교한 이차돈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절이다. 이차돈의 목을 베었을 때 머리가 떨어진 자리에 ‘자추사’라는 이름의 절을 세웠다고 한다. 언제부터 ‘백률사’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창건 연대에 대해서는 미상이나 이절의 대비관음상은 중국의 장인이 중생사의 관음소상을 만들 때 함께 만든 것이라는 속전이 있고 또 이 관음상에 얽힌 영험이 693년(효소왕 2년)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어 삼국 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이 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 대비관음상이 언제 조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신이가 많았다고 한다.

692년에 국선이 된 부례랑은 693년 3월에 화랑의 무리를 거느리고 강릉지방에 이르렀다가 말갈족에게 잡혀갔다. 문객들은 당황하여 돌아갔으나 안상만이 그를 뒤쫓아 갔다. 효소왕은 이 소식을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는데 그때 상서로운 구름이 천존고를 덮었으므로 내고를 조사시켰더니 현금과 신적의 두 보물이 없어졌다.

5월 15일에 부례랑의 부모는 이 관음상 앞에서 여러 날 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향나무 탁자 위에 현금과 신적이 있고 부례랑과 안상 두 사람도 불상 뒤에 와 있었다.

부모가 놀라 물으니 부례랑이 적에게 잡혀가서 말먹이는 자가 되어 방목을 하고 있는데 용모가 단정한 승려가 손에 현금과 신적을 가지고 와서 위로하며 "나를 따라 오라"고 하였다. 해변에 이르러 거기서 안상과 만나게 되었다.

승려는 신적을 둘로 쪼개어 부례랑과 안상으로 하여금 하나씩 타게 하고 자기는 현금을 타고 하늘을 날아서 잠깐 사이에 백률사에 왔다는 것이다. 부례랑이 현금과 신적을 왕에게 바치고 이 사실을 아뢰니 왕은 이 절에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과 마납 가사를 바쳐 부처님의 은덕에 보답하였다.

이러한 영험과 함께 이 절은 상당히 큰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이 되나 임진왜란 때 폐허화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경주의 부윤 유승순이 중수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 이적을 남긴 관음상은 그때 이미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던 국보 제28호의 금동 약사여래상과 이차돈순교 순교 비는 1927년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졌으며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선원, 요사 채가 있으며, 이 중 대웅전은 약 3m 높이의 축대 위에 있으며 선조 때 중창한 것이다.

이밖에 옛 건물에 쓰였던 것으로 보이는 초석과 석등의 옥개석 등이 있고 또한 대웅전 마당에는 대비관음상이 도리천에 올라갔다가 돌아와서 법당에 들어갈 때 밟았던 발자국 터가 마당의 돌 위에 남아 있다. 일설에는 부처님이 부례랑를 구출하고 만파식적을 찾아서 돌아올 때 남긴 것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대웅전에서 서북쪽으로 약 150m 떨어진 산비탈의 암반 위에는 지름 31cm, 깊이 24cm의 원형공이 남아 있는데 이곳이 조선 시대 부도가 놓여 있던 자리이다.

석종 형 부도였던 것 같은데 일제 강점기 때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진 채 있었다 하나, 그 이후로는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또한 향나무로 만든 불상이 있었다고 『동국여지승람』에는 기록되어 있으나 없어졌다.

이에 대해 유석우씨는 『경주시지』에서 조선 태종 12년(AD 1412) 10월에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소재 문경사로 이 불상이 옮겨 갔다고 하나 어느 것에 근거하여 그와 같이 말하였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리고 고려 중기의 학자였던 정지상, 전사경, 김효수 등이 지은 시의 내용 중에 서루라는 명칭이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진홍섭 관장은 서루라는 누각이 1917년까지 지금의 종각과 요사채가 자리하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경주에서 가장 훌륭한 곳이었다고 전한다.

▲ 백률사금동여래입상

백률사 대웅전
대웅전은 조선시대의 건물로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대웅전에 모셨던 ‘금동약사여래좌상’은 불국사의 ‘금동아미타여래좌상’, ‘금동비로자나불좌상’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3대 금동불 중 하나로 현재는 국립 경주박물관에서 보관·전시하고 있다.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慶州 栢栗寺 金銅藥師如來立像)
국보 제28호.1962.12.20지정
경주시 북쪽 소금강산의 백률사에 있던 것을 1930년에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
전체 높이 1.77m의 서 있는 불상으로 모든 중생의 질병을 고쳐준다는 약사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머리는 신체에 비해 크지 않은 편이며, 둥근 얼굴·긴 눈썹·가는 눈·오똑한 코·작은 입 등에서는 우아한 인상을 풍기고 있지만, 8세기 중엽의 이상적인 부처의 얼굴에 비해 긴장과 탄력이 줄어든 모습이다. 커다란 체구에 비해 어깨는 약간 빈약하게 처리된 느낌이지만 어깨의 굴곡은 신체에 밀착된 옷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두 팔에 걸쳐 흘러내리고 있으며 앞가슴에는 치마의 매듭이 보인다. 앞면에는 U자형의 주름을 연속적인 선으로 그리고 있는데 조금은 도식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신체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중후해지며 옷자락들도 무거워 보이는데, 이것은 상체를 뒤로 젖힘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솟아오른 단전과 더불어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두 손은 없어졌으나 손목의 위치와 방향으로 보아 오른손은 위로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에는 약그릇이나 구슬을 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소 평면적인 느낌을 주지만 신체의 적절한 비례와 조형기법이 우수하여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26호),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과 함께 통일신라시대의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소금강산 마애삼존불상>

▲ 소금강산 마애삼존불앞에서.

백률사가 있는 소금강산 정상 동쪽에 위치한 자연 바위벽에 새긴 삼존불상이다. 중앙에는 본존불이 앉아 있고, 양쪽에는 협시보살이 새겨져 있다.

오른쪽 협시보살의 머리에 쓴 보관(寶冠)에 작은 부처가 조각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미타 삼존불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본존불의 높이가 약 3m에 이르는 거대한 마애불이지만 선각에 가깝게 새겨져있으며, 조각된 옷의 표현과 손의 모습 등은 통일신라시대 마애불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삼존불의 윗 바위에는 목재 구조물을 설치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이곳에 건물의 형태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알천수개기>

▲ 알천수개기 앞에서.

경주의 북천은 알천 또는 동천으로부터 이어져 왔는데, 예로부터 홍수가 잦아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도 수차례나 기록되어 있다.

이 알천수개기는 동천동 금학 산의 서남쪽 능선 끝에 드러난 바위의 맨 아래쪽에 새겨져 있는 마애비이다. 이 바위는 남서향으로 전체 높이가 약 3.5m이며 크게 3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맨 아래 단의 3폭 병풍처럼 생긴 면에 글이 새겨져 있다.

오른쪽과 왼쪽 면에는 제방의 개수와 관련된 사람의 이름이 가운데 면에는 알천제방을 다시 쌓은 사실이 해서로 음각되어 있는데, 모두 합하여 90자이다.

이 기문은 1980년 11월에 발견될 때 까지 대부분이 흙 속에 묻혀 있었기 때문에 글자가 훼손되지 않아 매우 뚜렷하다.

가운데 면의 크기는 너비 102cm, 높이 120cm, 오른쪽 면의 크기는 너비 50cm, 높이 80cm, 왼쪽 면의 크기는 너비 76cm, 높이 65cm 정도이다. 그리고 가운데 ㅁ녀에 새겨진 글자의 크기는 8.5~13cm이다.

한편 동경통지에는 고려 현종 때에도 3도의 장정을 모아 쌓은 기록이 있으며, 이 알천제방수개기는 조선 숙종 33년 (1707년)에 새긴 것으로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쪽으로 흐르는 알천 물살에 읍 동편 제방이 무너졌다.
나무와 돌로 높은 둑을 쌓은 것은 고려 때이다.
올해 정해 년에 다시 고쳐 지형 따라 잡은 갈래 전에 흐르던 대로 물길 터주고
이 바위 면에 사실을 적어 길이 후세에 전하려한다.⟫

이 알천제방수개기는 해방 후 북천 상류에 대규모 저수지가 축조되기 전까지는 북천의 홍수가 경주지역으로서는 숙명적인 것이었으며, 반면에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우리 조상들이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 왔음을 보여주는 소중한 금석문 자료다.

부윤 연안이공(인징)이 쓰고 전희천·권성경·김명웅·임기중이 함께 도왔다. 손여의·서진·김창도·정세정과 스님 위성이 공사의 책임을 맡았으나 실지로는 손여의가 주관하였고, 감독과 관리는 이진명·김시경 등이 하였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홈페이지 (문화재 학습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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