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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노동인권변호사 권영국의 경주살이
[노동인권변호사 권영국의 경주살이] ⑧ 얼떨결에 계 탄 날 – 30년 만에 꿈에 그리던 공장 땅을 밟았다.
권영국 시민기자  |  person2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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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4.11  16: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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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7일 토요일은 풍산벚꽃축제가 열리는 날이었다. 경북노동인권센터에서 예정한 정기산행과 일정이 겹쳤다. 다행히 풍산벚꽃축제는 오후 5시 이후로 되어 있어 정기산행을 마치고 서두르면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오전 9시 센터 회원들은 통일전 주차장에서 만나 칠불암을 향해 산행 길에 올랐다. 진달래와 봄꽃들, 연한 녹색의 잎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때맞춰 내린 많은 봄비 덕분에 산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 또한 힘차고 정겹다. 바위벽면을 깎아 만든 일곱 부처님께 경건하게 삼배를 올리고 산 아래로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다 감탄사를 쏟아낸다. 하산하는 길에 식당에 들러 미나리전과 추어탕, 막걸리 한사발로 피곤을 날렸다.

오후 5시 등산복 차림 그대로 ‘나’와 아내는 정종길 초대 풍산노조 안강지부장과 그의 배우자인 이강희 안강・강동 시의원 후보를 만나 풍산벚꽃축제에 참여하러 풍산 안강공장을 향했다. 우리는 안강공장 외곽에 위치한 경비초소 좌우를 따라 펼쳐진 벚꽃 길을 걸으며 축제에 참여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눌 생각이었다. 30년 전인 1989년 1월 방산업체에서 파업을 했다는 이유로 해고된 후 공장 울타리 안으로의 출입은 ‘절대 불허’였기 때문이다. 1988년 풍산노조 안강지부를 설립하고 파업투쟁의 선봉에 섰던 정종길 지부장과 권영국 교선차장, 그의 배우자들이 50대 중반의 나이로 30년 전 투쟁의 현장을 찾은 셈이다.

풍산다리 건너편에 차를 세우고 다리를 건넜다. 다리를 건너면 외곽초소가 나온다. 상춘객들이 하나둘씩 초소 경비들을 지나쳐 초소 안쪽에 위치한 행사장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초소 울타리 안에 위치한 운동장에 행사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노란 외투를 껴입은 우리들을 보고 직원들이 잡지는 않을까 우려했으나 “어디 가시나요”라는 청경의 물음에 “축제에 참여하러 갑니다”라는 답변으로 무사통과했다. 아내는 행여 붙잡힐까 불안한 마음에 저만치 앞서서 갔다. 아무도 잡지 않는데도 지레 제발이 저려 눈치를 살펴야 했다. 우린 아직 30년 전 그날의 기억 속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놀라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펼쳐졌다. 상춘객들은 곧장 행사장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곳을 지나 꽤 긴 거리를 걸어 안강공장 정문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웬일일까 궁금해 하는데 공장 안에 위치한 직원식당에서 저녁식사로 짜장면을 주고 행사장에서는 500인분의 ‘치맥’을 제공한다는 게 아닌가? 벚꽃축제에 참여한 일반 시민들이 공장 안 장소로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해고자 신분인 우리도 들어갈 수 있을까? 묘한 감정이 교차하기 시작했다.

1989년 1월 1일 아침 9시경, 파업 지도부의 일원이었던 나는, 새해가 되면 꼭 집에 들르겠다는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동지들을 남겨두고 차갑게 부서지는 햇살을 바라보며 풍산 안강공장을 빠져나왔다. 안강공장을 나온 다음날 아침 부모님 집에서, 아닌 밤중에 홍두깨마냥 꼭두새벽 5천여 경찰병력이 들이닥쳐 안강공장 파업을 진압하고 지도부를 연행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부랴부랴 안강을 향하던 중 시외버스 안에서 나 또한 수배되었다는 뉴스를 들어야 했다. 나는 오래가지 못해 포항시내에서 체포되어 동지들이 미리 가 있던 경주교도소에 구속되었고 그곳에서 지부장과 나를 포함한 25명의 노조간부들에 대한 해고 소식을 접했다. 그 때부터 우린 안강공장 외곽 초소 안으로 결코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경계 1호의 인물이 되었다.

그런데 나는 ‘오늘’ 경주시민의 한 사람으로 벚꽃 축제에 참가하러 온 상춘객들을 따라 공장 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잠시이겠지만 30년 동안 출입이 불허된 금기의 땅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교도소에서 출소한 후 해고 동지들과 함께 공장 안 노조사무실에 들어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몸싸움을 벌여야 했던가? 그때마다 우리는 경비 초소 앞에서 처절하게 내팽겨 쳐졌다. 정문은 고사하고 외곽 초소 경계조차 단 한 발짝도 넘을 수 없었던 통한의 세월이었다. 실향민들이 두고 온 고향을 잊지 못하듯 해고자들은 두고 온 공장을 결코 잊지 못한다.

살다보면 이렇게 횡재하는 날도 있나보다. 나는 최대한 천천히 정종길 지부장과 나란히 초소에서부터 정문에 이르는 길을 따라 걸었다. 얼마나 오매불망했던 길인가? 정문에 도착하니 국기게양대가 설치된 공장 본관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정문 경계선을 넘어 공장 안 부지로 발을 들여놓으려는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울컥 뜨거움이 밀려왔다. 아, 얼마나 오고 싶었던 곳인가? 초소에서 십 분이 채 안 되는 이 곳,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마치 유리 위를 걷듯 조심스럽게 발을 옮기며 정문 안에서 손님들을 안내하고 있던 청원경찰에게 악수를 청했다. “오랜만입니다. 혹시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라고 말을 건넸더니 “아, 오랜만입니다. 반갑습니다. 그럼요, 텔레비전을 통해서 활동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아직도 우릴 기억하고 있구나... 다시 가슴이 뭉클해졌다. 정문을 통과한 후 공장 본관 앞 국기게양대 옆에 섰다. 공장 본관 앞 공터는 1988년 12월 파업 당시 3, 4천의 조합원들이 모여 집회를 하던 곳이다. 공장 본관을 배경으로 나랑 정지부장, 그리고 아내들이 굳이 짝을 맞출 필요 없이 서로 팔짱을 부여잡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오지 않을 것처럼...

   
▲ 본관앞.
본관 뒤로 돌아 직원식당에 들어서자 상춘객과 풍산 직원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낯익은 얼굴들이 나랑 정지부장을 보자 놀라기 시작했다. “어, 여길 어떻게 들어왔어요? 반갑습니다” “잘 지냈는교. 이게 얼마만입니까?” “안 그래도 활동하는 모습 언론을 통해서 보고 있었습니다” 마치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중년을 넘어선 풍산노동자들이 손을 내밀어 앞 다퉈 인사했다. 식탁에 앉아 짜장면을 먹고 있던 분들도 우릴 알아보고는 일어나 반갑게 손을 잡아주었다. 세월이 무상하다고들 하지만 기억을 지우지는 못하나 보다. 우린 그렇게 30년 전의 기억으로 다시 만났다. 부여잡은 손들에서 반가움이 진하게 묻어났다. 바뀐 것은 기세등등했던 청년의 모습에서 반백의 흰머리 중년의 모습이 되었다는 것...

짜장면을 먹는 동안 오래 전 풍산노조 위원장이었던 박상훈과 지부 사무장을 지낸 이재상이 합석을 하고 식사 후 안강지부 노조사무실에도 가보자고 했다. 헐, 노조사무실까지... 결코 바랄 수 없던 장소였다. 안강공장을 쫓겨나기 직전 파업 지도부가 머물렀던 곳인데 식당 바로 뒤에 위치해 있었다. 식당 후문을 열고 나서자 ‘풍산노동조합 안강지부’라고 새겨진 나무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아! 우리가 안강공장에 노조지부를 설립하면서 지부사무실 문 옆에 걸었던 현판이었다. 세월의 풍파에 빛이 바랜 듯했지만 30년 전의 모습 그대로 아닌가? 변하지 않은 무언가를 발견한 것처럼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옛 동지를 만난 양 나와 정지부장은 현판을 배경삼아 사람을 바꿔가며 연거푸 인증샷을 찍어댔다. 구속과 해고, 이어지는 노조탄압의 세월에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노동조합의 산 역사가 아닌가? 마을의 장승처럼 든든하게 느껴졌다.

   
▲ 노조 사무실앞.
잠시 노조사무실에 들러 지부장, 위원장 등과 차를 마시고 벚꽃축제 행사장으로 나갔다. 행사장에서는 상춘객과 풍산 직원들이 가족과 동료들과 함께 삼삼오오 모여 앉아 치킨과 맥주를 나눠먹으며 무대의 노래와 진행에 흥을 돋우고 있었다. 우리는 행사장을 돌며 풍산 직원들과 악수를 하고 못 다한 인사를 나눴다. 마주잡는 손의 온기가 느껴졌다. 미안함과 반가움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왔다. 그 와중에 무대에 올라간 현 안강지부장이 우리를 소개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개시키지 않을 수 없는 분들이 이 자리에 와있습니다. 권영국 변호사님과 정종길 초대 지부장님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손 한번 흔들어주세요” 풍산에서는 금기어가 된 이름이건만 선배노동자랍시고 이름을 불러주다니... 가슴이 뜨거워졌다. 지나간 30년 세월은 결코 ‘잊혀진 계절’이 아니었다.

꿈속에서도 가고 싶었던 곳,.. 쫓겨난 공장! 그 공장 땅을 밟고 식당에 들러 짜장면을 먹고 노동조합 사무실까지 방문하다니...꿈만 같은 날이었다. 해고자들은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언젠가 공장으로 돌아갈 꿈을 꾼다. 복직은 꿈으로 남을지라도 공장 안 땅을 밟은 이 날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경주에 살게 된 덕분에 만난 행운이라고 해야 할까? 얼떨결에 붓지 않은 계를 탄 날이 되었다.
 
노동인권변호사 권영국은....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배고팠던 어린시절, 역경을 극복하는 과학자의 꿈을 키웠다. 1981년 대학입학 후 사회에 대한 눈을 떴고, 야학에 참여해 공부한 노동법이 계기가 되어 방위산업체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을 설립했다. 그 대가로 두차례 해고되고, 합쳐서 3년6개월의 옥살이를 했다. 출소후 복직투쟁을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보안사 사찰 대상으로 취업이 제한된 처지에서 사법시험을 준비했고, 1999년 11월 제41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2002년 민주노총 법률원 설립에 참여해 노동변호사가 됐다.민주노총 법률원장, 민변 노동위원장 등을 거치며 용산참사, 세월호 진상규명 등 국민들의 편에서 법정투쟁을 벌였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경주에서 출마 했다 낙선했지만, 박근혜 전대통령 탄핵정국에서는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 법률팀장을 맡아 싸웠다. 거리에서 무장경찰과 싸우면서 '거리의 변호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2017년 7월 경주에 법률사무소를 열며 경주에 살기 시작했고,9월에는 경북노동인권센터를 창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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