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원과 함께 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 시즌Ⅱ- [2018년 5월] 신라사찰 기림사에서 서악서원까지
한수원과 함께 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 시즌Ⅱ- [2018년 5월] 신라사찰 기림사에서 서악서원까지
  • 편집팀
  • 승인 2018.05.28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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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원과 함께 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 시즌Ⅱ-
[2018년 5월] 신라사찰 기림사에서 서악서원까지

▲ 탐방단이 서악서원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다.
2018년 5월26일 한수원이 후원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은 선덕여왕 12년(643) 함월산 기슭에 세운 절, 기림사와 골굴암에서 재매정, 월정교등 도심 유적을 거쳐 태종무열왕릉, 서악서원으로 이어지며 진행됐다.

천축국(天竺國)의 승려 광유(光有)가 창건하여 임정사(林井寺)라 부르던 것을, 뒤에 원효가 중창하여 머물면서 기림사라 개칭했따는 유서깊은 신라사찰 기림사와 함월산의 석회 암벽에 여래조상을 양각한 마애불이 있는 골굴암에서 오전 시간을 보낸 탐방단은 최근 복원이 완료된 월정교, 재매정지등 도심유적지를 답사했다.

이어 무덤의 실제 주인을 알수 있는 몇안되는 신라 무덤인 태종무열왕릉과 진흥왕릉을 거쳐 설총, 김유신, 최치원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악서원을 끄틍로 답사를 마무리했다.
6월에는 23일 첨성대-대릉원-월성등 신라왕경에 산재한 유적지를 답사한다.
문의 및 참가신청. 774-1950.

골굴사

▲ 답사단이 골굴사 마애불로 향하고 있다.
석굴사원은 인도나 중국에서는 흔히 보이는 형식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형태이다. 가장 큰 이유는 자연환경 때문이다. 석굴을 조성할 정도의 대규모 암벽이 없고 또 단단한 석질의 화강암이 대부분이라서 석굴을 조성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석굴암만 해도 자연석굴이 아니라 인공으로 만든 석굴사원인 것이다.
이 곳 함월산의 골굴암 석굴에는 수십미터 높이의 거대한 석회암에 12개의 석굴이 나있으며, 암벽 제일 높은 곳에 돋을새김으로 새긴 마애불상이 있다. 조선시대 화가 정선이 그린 [骨窟石窟]이라는 그림을 보면 木造前室이 묘사되어 있고, 숙종 12년(1686)에 우담 정시한이 쓴 {山中日記}에 의하면, 이 석굴들의 앞면을 목조기와집으로 막고 고운 단청을 하여 화려한 석굴들이 마을을 이룬듯하였으며, 법당굴(法堂窟)이니 설법굴(說法窟)이니 하는 구분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 남아있는 굴은 법당굴 뿐인데 굴 앞면은 벽을 바르고 기와를 얹어 집으로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천장도 벽도 모두 돌로 된 석굴이다. 북쪽벽에 감실을 파고 부처를 모셨으나 마멸이 심해 얼굴표정은 알길이 없다. 법당굴 말고는 여러 굴들이 모두 허물어지고 그 형체만 남아있다. 굴과 굴로 통하는 길은 바위에 파놓은 가파른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정상에 새겨진 마애불로 오르려면 자연동굴을 지나게 되어 있다. 절벽 꼭대기에 새겨진 마애불상은 오랜 풍화로 떨어져 나간 부분이 많다. 바위를 이루는 석회암의 약한 성질 때문에 더 쉽게 부셔지고 있다. 지금은 보호각을 설치해 놓고 있다.

골굴암의 연혁은 확실치 않으나 기림사 사적기에 따르면, 함월산의 반대편에 천생석굴이 있으며 거기에는 굴이 12곳으로 구분되어 각기 이름이 붙어 있다고 하였으니 골굴암은 기림사의 암자였던 것 같다. 원효대사가 죽은 뒤 그 아들 설총이 원효의 뼈를 갈아 실물크기의 조상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三國遺事}에 보인다. 또 설총이 한때 아버지가 살고 있던 동굴 부근에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골굴암이 원효대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골굴사 마애불

골굴암이 있는 함월산의 석회 암벽에 정동남향의 여래조상을 양각했다. 이곳은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의 행적이 이어졌음을 지금도 남아 있는 부윤의 이름과 인명의 낙서 등으로 알 수 있다.
이곳의 석질은 모래가 많이 섞인 석회암이어서 비바람에 많이 파손되어 있으며 양어깨와 무릎쪽이 특히 심하다. 몇년의 보호작업 끝에 1988년 비를 맞지 않도록 둥근 돔형의 천정을 만들고 암면에 화학처리를 하였다.
이 여래좌상은 통일신라전성기인 8세기 중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기림사

▲ 기림사 항공사진.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 함월산기슭에 있는 기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이다. 643년(선덕여왕12) 천축국(天竺國)의 승려 광유(光有)가 창건하여 임정사(林井寺)라 부르던 것을, 뒤에 원효가 중창하여 머물면서 기림사라 개칭하였다. 기림사(祇林寺)란 부처님 생존 때에 세워졌던 인도의 기원정사(祇園精舍)를 뜻한다. 즉, 서가모니가 생전에 제자들과 함께 활동하던 승원 중에서 첫손에 꼽히는 것이 죽림정사와 기원정사이다. 특히 기원정사는 깨달음을 얻은 서가모니가 20년 넘게 머무른 곳이다.
이와 더불어 불자들의 수행도 점차 유랑․위주에서 정착위주로 바뀌었고 정서도 점차 수를 널리게 된다. 그 기원정사의 숲을 기림(祇林)이라고 하니 함월산의 기림사는 그러한 연유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신라 제31대 신문왕은 대왕암에 다녀오던 길에 이 절의 서쪽 계곡에서 점심을 들었으며, 고려 말의 각유(覺猷)는 이 절의 주지로 있었다. 그 뒤 1578년(선조11)에 축선(竺禪)이 중건하였고, 정조 때에는 경주부윤 김광묵(金光默)이 사재를 희사하여 크게 중수하였다. 1862년(철종13)에는 대화재로 113칸의 당우가 회진되었으나, 이듬해 봄에 사찰의 승려들이 부윤(府尹) 송우화(宋迂和) 등의 시주를 받아 공사를 시작하여 가을에 복원하였으며, 그 뒤 1878년의 중수를 거쳐 1905년에는 혜훈이 다시 중수하였다. 31본산 시대에는 경주군 일대를 관장하였으나, 현재는 불국사에 그 자리를 물려주었다.

조선시대에 이 절은 대적광전(大寂光殿)을 중심으로 동쪽에 약사전, 서쪽에 오백나한전과 정광여래사리각(正光如來舍利閣)인 삼층전(三層殿)이 있었으며, 남쪽에는 무량수각과 진남루(鎭南樓)가 있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전면 5칸, 측면 3칸의 대적광전을 중심에 두고, 왼쪽에 약사전, 오른쪽에 응진전, 앞쪽에 진남루(鎭南樓)가 사각의 성지를 이루고 있고, 뜰에는 삼층석탑과 새로 조성된 석등이 있다. 조금 떨어져 명부전․삼성각․관음전․산신각․주지실․종무소․요사채․산문․창고 등이 있으며, 특히 大房은 2동이 모두 중후하다. 그밖에 김시습의 사당이 있다.

이들 당우 중에서 대적광전은 절의 본당으로 내부에는 단토상(檀土像)의 비로자나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 불상은 中原(중원) 의 장인이 조성하였다 하며, 불상 조성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1986년 9월에 가운데 주존불의 복장에서 대반야경 등 금․은사경 14권과 조선시대에 마든 불경, 부처님 진신사리 4과 등이 발견되었다. 또 약사전에는 약사삼존상과 사천왕상, 사라수왕(沙羅樹王)의 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이 탱화는 기림사창건의 연기 설화를 보여주는 특이한 불화로서 근래 이를 모사하여 다시 그렸다. 이 밖에도 응진전 안에는 오백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415호로 지정된 건칠보살좌상(乾漆菩薩坐像)과 목탑지․석조미․문적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석조치미는 화강암으로 만든 것으로 花紋이 장식되어 있으며, 신라 때의 것으로 추정이 된다. 또 문적 중에는 『경상도 영주제명기』․『동도역세제자기』․『부호장생생가』등이 있다. 이들은 경상도와 경주의 행정에 관한 것과 행정관에 대한 인적사항, 신라이후의 지방제도의 변혁 등을 기록한 중요한 문헌들이다. 또 이 절에는 조선 역대 왕들의 어필도 보관되어 있으며, 특이하게 석비모양의 나무에 사적을 기록한 목비가 전한다.

이 절에는 원래 오정수가 유명하였다고 한다. 그 중 장군수는 마시면 힘이 용솟음친다하여 인근에 널리 알려졌는데, 조선시대에 어떤 사람이 이곳에서 역적모의를 하다가 발각된 뒤 나라에서 샘을 메워 버렸다고 한다. 나한전 앞쪽 탑 자리에도 샘이 있었다고 하나 이미 자취를 감추었고,또 하나는 절 입구에 있었으나 최근 도로 확장 때 매몰되었으며, 현재는 큰방 옆과 아랫마을에만 보존되어 있다. 이 절에는 천년에 한번 핀다는 '우담바라'라는 한약초가 있었다고 전한다.

월정교

▲ 월정교의 웅장한 모습
월정교가 기록에 처음 나타나는 것은 춘양교와 함께 󰡔삼국사기󰡕에 등장한다. 경덕왕 19년(760) “2월에 궁궐에 큰 못을 팠고 또 궁궐 남쪽 문천에 월정(月淨)과 춘양(春陽) 두 다리를 기공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놓여진 다리는 고려 때에도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충렬왕 6년(1280)에 경주 부유수 노경윤(盧景倫)이 중수하였다고 한다. 이때에 월정교(月精橋)라고 하여 본래의 이름 월정교(月淨橋)가 글자가 바뀌고 있음에 유념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춘양교가 일정교(日精橋)로 불리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즉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춘양교는 일정교로 기록되어 있어 춘양(春陽)이나 일정(日精) 모두 양(陽)을 의미하고, 거기에 대가 되는 음(陰)으로서의 월정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음양을 맞추려는 의도에서 한자 표기가 바뀐 것으로 보인다. 또 이 기록에서는 일정교와 월정교가 모두 고적 부분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 두 다리는 이미 사용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경덕왕 19년에 놓인 월정교는 고려시대 13세기까지 다리로서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음이 확인되고 조선시대 15세기에는 이미 사용할 수 없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태종무열왕릉

▲ 무열왕릉
무열왕릉은 신라시대의 무덤으로 실제로 그 주인을 아는 몇 안되는 왕릉 중의 하나이다. 능은 높이 12m 밑둘레 약 110m 이며 능둘레에 자연석으로 1m 정도 석축을 쌓고 3m 간격으로 호석을 세웠으나 흙에 묻혀서 잘 보이지 않는다.

서악서원

▲ 서악서원
1651년(효종 2년)에 이정(李楨)을 중심으로 한 지방 유림의 공의(共議)로 설총, 김유신, 최치원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서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처음에는 선도산 아래에 서악정사(西岳精舍)로 창건하여 향사를 지내오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 1600년(선조 33년) 서원터의 초사(草舍)에 위패를 모셨다. 1602년 묘우(廟宇)를 신축하고, 1610년에 강당과 재사를 중건하였으며, 1623년(인조 1년) “서악(西岳)“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시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중의 하나이며, 1873년에 중수하여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묘우, 5칸의 시습당, 5칸의 절차헌, 5칸의 조설헌, 영귀루, 3칸의 전사청, 4칸의 고자실, 도동문, 외문, 내문 등이 있다.

묘우에는 설총, 김유신, 최치원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강당인 조설헌은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시습당과 절차헌은 유생들이 공부하며 거처하는 곳이며, 영귀루는 누각이다. 전사청은 향례 때 제수를 마련하여 두는 곳이며, 고자실은 고자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2월 중정(두번째 정일)과 8월의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은 7변 7두이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물로는 문집 몇 권이 있다. 재산으로는 대지 1,100평, 답 3,600평, 임야 3,400평 등이 있다.
서원에서의 건물배치는 일정한 규범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꼭 있어야 할 공간은 있어야 한다. 즉 사주(祠主)에 제사하는 사(祀)를 위한 공간과 유생들이 글공부하는 재(齋) 공간이 필히 있어야 하며 그 외에 경각, 비각이 별도 또는 재공간에 함께 있다.

사주의 위패를 모셔서 제사하는 사공간에는 묘당을 중심으로 전사청, 제기고가 한 구역을 이루어 담장을 두르고 삼문을 두어 출입하게 되어 있다. 교육을 하는 재공간에는 유생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강당의 기능을 갖는 큰 마루가 있는 건물이 있고, 그 앞에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는 재건물을 마주보게 배치하고, 재 앞에는 휴식을 위한 누각을 두어 이들 건물이 모두 한 구역을 이루어 전체적으로 두 개의 구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또 이 공간 밖의 측면이나 뒷면에 전체를 관리하는 고직사가 별도의 공간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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