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멋과 향수 - 6- 골목길 연가 (2)

옹기전 골목, 옹기를 닮은 고집스런 며느리 이야기

2013-04-17     김희동 기자

신라 제31대 신문왕은 왕비를 맞이하면서 예물 품목으로 쌀, 술, 기름, 간장, 포와 젓갈을 등을 왕비의 집에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미루어 보아 이미 삼국이전부터 저장구인 옹기를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읍성 남문 밖 곧 종로 서편 마을을 노서(路西)라 불렀고 옹기전거리는 읍성 남문 서편 회채도랑가에 있었다. 현재 법원 건너편 문화의 거리를 가다 좌측 골목으로 고려다방 쯤에서 시작해 중앙시장으로 내려가는 길 전부가 옹기전이 있었다. 현재 이 일대 노동동, 노서동과 동부동, 북부동, 서부동을 합하여 1998년부터 행정동은 중부동으로 운영되고 있다. 개화기 때 경주에는 갓전, 유기전, 솔전, 나무전 등 전문으로 장이 서는 골목이 따로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둥그런 곡선의 넉넉함과 실용성

 

 

빛바랜 기억 저편에는 장독대가 있는 마당이 있고 키 큰 접시꽃이 햇살을 이고 있거나 족두리꽃이 꽃술을 물고 피어 있다. 마당 한 편을 돋우어 만든 장독대에 크기를 달리하면서 과묵한 흙빛의 독(甕器·옹기)들이 빚어낸 풍경은 그리움이다.

2009년 온 국민의 애도 속에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의 아호는 ‘옹기’다. 김수환 추기경의 부친과 많은 천교도인들은 박해를 피해 산속에서 옹기를 만들어 팔며 신앙을 이어갔다. 옹기는 관용과 배려다. 옹기는 좋은 것과 나쁜 것, 심지어 오물까지도 담는 질박한 용기다.

굳이 광고의 카피를 빌리지 않아도 ‘옹기는 과학’이다. 수많은 모래 알갱이가 섞인 진흙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릇 표면에 작은 숨구멍이 생겨 공기를 드나들게 하여 오래 두어도 음식이 신선하다. 가마에 구울 때 변형이 적고, 태양열을 고르게 받아 내부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볼록하게 만들었다. 장독대에 옹기를 늘어놓으면 옹기 사이에 공간이 생겨 바람이 잘 통하여 온도와 습도를 조절할 수 있다.

상호가 없는 옹기전

     
 
부푼 둥근 몸마다 수북이 봄 햇살을 안고 있다. 가게를 대신한 마당 가득 줄지어 선 수백여 개의 독들은 가슴이 부푼 것은 부푼 대로 또 키가 작은 것은 작은 대로 어울려 있다. 옹기는 혼자 있는 것보다 어우러져 있는 것이 더 보기가 좋다. 오누이처럼 자매처럼 서로 어깨를 기대고 있는 모습이 더 정겹다.

개불알꽃, 제비꽃, 별꽃, 개별꽃, 광대나물꽃, 오랑캐꽃, 앉은뱅이꽃 손톱만한 꽃들도 이름이 있다. 그런데 옹기전은 이름이 없다. 그저 옹기전이다. 오래전부터 아니 처음부터 옹기전에는 이름이 없었다고 한다.

시어머니가 또 그 윗대 시어머니가 운영하던 옹기전을 물려받은 송미자 대표(54)는 ‘옹기전에는 상호가 없다’는 오래된 관습을 깨고 2006년 5월 사업자 등록증을 내면서 ‘일성토기’라고 상호를 만들었다. 영수증을 끊어달라는 소비자들의 요청에 상호를 만들고 사업자 등록증을 만들었지만 그래도 옹기전의 오래된 전통을 지키기 위해 간판은 달지 않았다. 그저 사업자 등록증으로만 존재하는 ‘일성토기’다.

큰며느리 3대째 가업을 이어 받아

3대가 그것도 큰며느리들에게 대물림을 하며 옹기전을 지키고 있는 ‘일성토기’ 사장 송미자씨는 시어머니인 옹기전 2대 나금이할머니(86)의 뒤를 이어 15년째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1대 조모까지 더하면 옹기전의 역사는 80여년 쯤 된다.

장독, 김칫독, 술독, 젓독, 약탕관, 뚝배기, 화로, 주전자, 요강, 등잔, 오줌장군, 똥장군, 시루, 떡살 등 옹기로 된 모든 것들을 팔았다. 1990년 까지만 해도 금장과 불국사부근에 옹기 가마가 남아 있어 옹기장이 들이 옹기를 공급해 주었다. 그러나 가마가 없어지면서 가게의 옹기는 인천과 예산에서 만들어진 옹기로 마당을 가득 채웠다.

주거 환경의 변화와 산업 발달은 옹기를 차츰 우리 생활에서 사라지게 했다. 가볍고 실용적인 스테인리스 용기와 합성수지 용기가 옹기의 자리를 대신했다. 15년 전부터 김치냉장고가 혼수필수품이 되면서 점차 옹기를 찾는 고객은 줄어들면서 옹기의 자리가 좁아지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다 최근에는 웰빙 바람을 타고 쌀독으로 인기를 끌고 있으며 효소 담근다며 매실철에 옹기를 사가는 주부가 늘었다고 한다. 또 사라져 가는 전통 옹기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생기면서 다시 우리 생활 속의 용기로 자리매김하려는 움직임이다. 실용성을 살린 옹기를 제작하고, 그것을 생활 속으로 다시 끌어올리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송 대표는 좋은 독 고르는 법을 귀띔한다. “수박 고를 때처럼 두드려 보아 종소리처럼 청아하고 맑은 소리가 나야 좋은 독이에요. ‘딱’ 하며 소리가 둔탁하거나 끊긴다면 덜 익은 거죠.” 라며 독을 두드리자 한적한 골목에 ‘땡∼ 땡∼’ 독 소리의 여운이 퍼져나갔다. 오래전 이 골목에는 이런 독소리 여운이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송 사장은 “저 둥근 항아리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한없이 넉넉해지고 차분해져요”라고 말하는  진실 된 눈빛에서 천상 옹기전 며느리라는 느낌을 받았다.

옹기전 골목에는 또 다른 상호도 간판도 없는 옹기전이 하나 더 남아 옹기전 골목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일성토기- 주소: 경주시 서부동 255-14, 전화: 010-2862-9074)

우리나라 옹기의 역사

오랜 전통을 이어온 우리의 토기는 신석기 시대때 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기원 전4000~5000년에는 빗살무늬토기, 그 이후 무문토기와 홍도, 흑도, 채도로 발달하였다. 이 중 흑도는 중국 회도의 영향으로 크게 발전하게 되면서 내화도가 높은 흙을 물레를 이용해 섭씨 10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구워낼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그릇을 와질토기라 한다. 와질토기는 4세기에 이르러서는 경도가 매우 높은 토기로 발전하였는데 이를 석기라 한다. 석기는 5, 6세기경 신라와 가야에서 가장 우수한 것을 만들어냈으며 섭씨 1200도의 높은 온도로 환원소성한 것이다.

또한 삼국시대 이후 환원소성한 토기가 주류를 이루지만 산화소성도 연면히 이어졌으며,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는 적색토기가 만들어졌고 고려시대에는 조금 더 단단해진 적색토기가 만들어졌으며, 조선시대에는 오지그릇이 만들어졌다. 결국 옹기는 흑도로부터 시작하여 고화도로 구운 치밀의 토기로 발전하였으며, 치밀의 토기 중 한 갈래가 청자와 백자로 이어졌으며 다른 한 갈래는 옹기로 발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