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원과 함께 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 시즌Ⅱ -6월, 신라왕경을 거닐며 ....
한수원과 함께 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 시즌Ⅱ -6월, 신라왕경을 거닐며 ....
  • 경주포커스
  • 승인 2018.06.27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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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원과 함께 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 시즌Ⅱ 
[2018년 6월] 신라왕경, 경주역사유적지구

참가자들이 첨성대 앞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다.
참가자들이 첨성대 앞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다.

2018년 6월23일 한수원이 후원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은 신라왕경의 핵심구간에서 진행됐다.

대릉원과 첨성대, 계림, 월성, 황룡사역사문화관, 분황사 등 6월 탐방구간은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경주역사유적지구의 핵심 유적들을 탐방하는 구간이기도 했다.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는 6월 넷째 토요일, 그러나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의 높은 인기를 반영하듯 38명이 참가했으며, 초등학생을 동반한 가족단위 참가가 특히 많았다.

지난해 8월 시작한 시즌2는 이번 7월 탐방이 마지막이다. 7월23일 능과탑, 불상의 도시 경주를 주제로, 괘릉-불국사-신라역사과학관-경주박물관을 탐방한다.

한수원 후원으로 신라문화원이 진행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은  1인당 5천원의 비용으로 참가할수 있다.  문의 및 참가신청. 774-1950.

다음은 6월 탐방에서 만난 주요 유적.

대릉원지구

대릉원지구로 부른다. 대릉원이란 이름은 "미추왕(味鄒王)을 대릉(大陵:竹長陵)에 장사지냈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서 딴 것이다.

총면적은 12만 5400평으로, 신라시대의 왕·왕비·귀족 등의 무덤 23기가 모여 있다. 고분은 모두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시대만의 독특한 무덤군(群)이다.

본래 사적 38호 경주노동리고분군(慶州路東里古墳群), 사적 39호 경주노서리고분군(慶州路西里古墳群), 사적 40호 경주황남리고분군(慶州皇南里古墳群), 사적 41호 경주황오리고분군(慶州皇吾里古墳群), 사적 42호 경주인왕리고분군(慶州仁旺里古墳群)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2011년 7월 28일 문화재청이 역사성과 특성을 고려하여 경주 평야 한복판에 서로 인접해 있는 신라 시대의 고분군을 통합하고 사적 제512호로 재지정하였다.

 

첨성대
국보 제31호 (1962.12.20.) 경북 경주시 인왕동 839-1번지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시대의 천문관측대로,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基壇部)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圓筒部)를 올리고 맨 위에 정(井)자형의 정상부(頂上部)를 얹은 모습으로 높이는 약9m이다.

원통부는 부채꼴 모양의 돌로 27단을 쌓아 올렸으며,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외부에 비해 내부는 돌의 뒷뿌리가 삐죽삐죽 나와 벽면이 고르지 않다. 남동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막돌로 채워져 있고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다. 동쪽 절반이 판돌로 막혀있는 정상부는 정(井)자 모양으로 맞물린 길다란 석재의 끝이 바깥까지 뚫고 나와있다. 이런 모습은 19∼20단, 25∼26단에서도 발견되는데 내부에서 사다리를 걸치기에 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옛 기록에 의하면, “사람이 가운데로 해서 올라가게 되어있다”라고 하였는데,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사다리를 이용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문학은 하늘의 움직임에 따라 농사 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농업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관측 결과에 따라 국가의 길흉을 점치던 점성술(占星術)이 고대국가에서 중요시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면 정치와도 관련이 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국가의 큰 관심사가 되었으며, 이는 첨성대 건립의 좋은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으며,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문화재청>

분황사

경주시 구황동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 말사이다. 전불시대(前佛時代)의 가람터라고 전하는 칠처가람(七處伽籃)중의 하나로서 634년(선덕여왕 3년)에 용궁(龍宮)의 북쪽에 건립되었다.

643년에 자장이 당나라로부터 대장경 일부와 불전(佛殿)을 장식하는 번(幡)·당(幢)·화개(花蓋) 등을 가지고 귀국하자 선덕여왕은 그를 분황사에 머물게 한 뒤 많은 급여를 내리고 호위를 붙이는 등 대접이 극진하였다.

특히 원효는 이 절에 머물면서 『화엄경소(華嚴經疏)』, 『금광명경소(金光明經疏)』 등의 많은 저술을 남겼고, 그의 교학을 이 절을 중심으로 널리 펴게 됨에 따라 분황사는 법성종(法性宗)의 근본 도량이 되었다. 또 원효가 죽은 뒤 아들 설총은 원효의 유해로 소상을 만들어 이 절에 안치하고 죽을 때까지 공경하고 사모하는 뜻을 다하였는데, 언젠가 설총이 옆에서 절을 하자 소상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때까지는 원효의 소상이 남아 있었으며, 그 때까지도 소상이 고개를 돌린 채로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이 절에는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이 있었고 좌전 북쪽벽에 었었던 천수대비 그림은 영험이 있기로 유명하였다. 경덕왕때 한기리에 사는 여자 희명의 아이가 5살 때 갑자기 눈이 멀게 되자 희명이 아이를 안고 천수대비 앞에 나아가서 도천수대비가를 가르쳐주고 노래를 부르며 빌게 하였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한다.

755년 경덕왕 14년에는 약사여래 입상을 만들어서 이 절에 봉안하였는데 그 무게는 30만 6천 7백근 이었고, 만든 사람은 본피부의 강고 내말 이었다. 고려시대에는 평장사 한문준이 지은 원효의 화정국사비가 건립되었다. 이 비는 1101년 숙종 6년 8월에 내린 숙종의 조서에 의해서 건립되었다. 숙종은 원효와 의상이 동방의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비기와 시호가 없어 그 덕이 크게 드러나지 않음을 애석히 여겨서 원효에게 대성화정국사라는 시호와 함께 유사로 하여금 연고지에 비석을 세우게 한 것이다. 그 뒤 몽고의 침략과 임진왜란 등으로 이 절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며 자세한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약사여래 입상을 모신 보광전과 승당, 종각등이 있으며 문화재로는 국보 제30호인 분황사 석탑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재97호인 화정국사비대좌,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호인 석정등이 있다. 이 중 석탑은 원래 9층이었으나 현재 3층만이 남아있는 모전탑으로써 임진왜란 당시 왜구들이 이 탑을 반쯤 헐었다고 한다.

그 뒤 절의 승려들이 탑을 다시 쌓기 위하여 헐었더니 바둑알만한 작은 구슬이 출토되었는데, 그 구슬은 수정처럼 빛나고 투명하였으며 태양을 쪼여 솜을 가까이 대면 불길이 일어났다고 한다. 당시 이것을 백률사에 보관하였다. 화정국사비의 비편은 지금도 가끔씩 발견되고 있는데, 비신을 바쳤던 비대는 절 근처에서 발견되어 김정희가 이를 확인하였다. 현재의 비대에는 '比新羅和靜國師之碑蹟'이라고 쓴 김정희의 친필이 음각되어 있다.

또 탑옆에 있는 석정은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이라고 불리는 신라시대의 우물이다. 우물틀의 외부는 팔각, 내부는 원형인데, 이것은 불교의 팔정도와 원융의 진리를 뜻한다. 이 우물에는 세마리의 호국 용이 살고 있었는데 795년(원성왕 11)에 당나라의 사신이 용을 세마리의 물고기로 변신시킨 뒤 잡아서 길을 떠났다. 하루 뒤에 두 여인이 원성왕 앞에 나타나서 사실을 아뢴뒤 남편을 찾아 줄 것을 호소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당나라 사신을 쫓아가서 빼앗아다 우물에 놓아주고 다시 살게 하였는데, 그 뒤부터, 삼룡변어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밖에도 이 절에는 석등·대석과 많은 초석들이 남아있으며, 1974년 발굴조사에서 금동보살입상과 귀면와, 신라 및 고려시대의 와당등이 발견되었다.

분황사 모전석탑
국보 제30호(1962.12.20.)
경북 경주시 분황로 94-11, 분황사 (구황동)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탑은 넓직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벽돌이 아닌 자연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네 모퉁이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있다. 회흑색 안산암을 작게 벽돌모양으로 잘라 쌓아올린 탑신은 거대한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는 현저하게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층 몸돌에는 네 면마다 문을 만들고, 그 양쪽에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인왕상(仁王像)을 힘찬 모습으로 조각해 놓았다. 지붕돌은 아래윗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는데, 3층 지붕돌만은 윗면이 네 모서리에서 위쪽으로 둥글게 솟은 모양이며, 그 위로 화강암으로 만든 활짝 핀 연꽃장식이 놓여 있다.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과도 좋은 대조를 이룬다. 특히,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인왕상 조각은 당시 7세기 신라 조각양식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이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수리 당시 탑 안에서 사리함과 구슬 등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문화재청>

경주황룡사지
사적 제6호(1963.01.21.)
경북 경주시 구황동 320-1번지

황룡사터  목탑자리.
황룡사터 목탑자리.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경주 월성의 동쪽에 궁궐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黃龍)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절로 고쳐 짓기 시작하여 17년 만에 완성되었다. 그 후 574년, 인도의 아소카왕이 철 57,000근·금 3만분으로 석가삼존불상을 만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과 철, 그리고 삼존불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낸 것이 신라 땅에 닿게 되자, 이것을 재료로 삼존불상을 만들게 되었는데, 5m가 넘는 이 불상을 모시기 위해 진평왕 6년(584)에 금당을 짓게 되었다. 선덕여왕 12년(643)에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의 권유로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한 바램의 9층 목탑을 짓게 되는데, 각 층마다 적국을 상징하도록 하였으며, 백제의 장인 아비지에 의해 645년에 완공되었다.

경주황룡사역사문화관
경주황룡사역사문화관을 관람하고 있다.

이와 같이 황룡사는 93년간에 걸친 국가사업으로 조성된 큰 절이었으며, 신라의 3가지 보물 중 천사옥대(天賜玉帶)를 제외한 2가지 보물이 황룡사 9층목탑과 장육존상이었다는 것에서도 황룡사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신라의 땅이 곧 부처가 사는 땅'이라는 신라인들의 불교관이 잘 나타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황룡사는 고려 고종 25년(1238)에 몽고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 없어져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늪지를 메워서 그 위에 지은 황룡사는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으로 길게 배치된 1탑식 배치였다. 그러나 장육존상과 목탑 등이 조성된 후 금당 좌우에 작은 금당이 배치되는 1탑 3금당식으로 바뀌고, 탑의 좌우에 종루와 경루(經樓)가 대칭을 이루어 배치되었다. 또 사방은 복도와 같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독특한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종루에는 거대한 종이 있었는데, 몽고가 침입했을 때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1976년부터 시작한 발굴조사에서 금동불입상·풍탁·금동귀걸이·각종 유리 등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높이 182㎝에 이르는 대형치미는 건물의 웅장한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금당에는 솔거가 그린 벽화가 있었다고 전하며, 목탑지에서 발견된 당나라 백자항아리는 당시의 문물교류를 잘 알 수 있게 한다.<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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