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사업본부 경주우체국 근무 계간 <작가시선> 등단. 초등학교를 졸업한지 30년이 조금 더 지났다. 그동안 여러 번 동창회에 참석해달라는 연락을 받았지만 나는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올해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친구 몇이 대문 앞에 와서 아예 죽치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따라 나설 수밖에 없었다. 동창회는 모교 운동장에서 체육행사와

서랍을 정리하다가 열쇠뭉치 하나를 발견했다. 이사를 다닐 때마다 하나씩 늘어난 것이 한 꾸러미가 되어 있었다. 옛날 집 현관 열쇠를 비롯해 용도조차 분명하지 않은 녹슨 열쇠들을 만지작거리다 보니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들이 문득 생각이 났다. 딱히 쓸데가 없어진 열쇠 꾸러미를 쓰레기통에 훌쩍 던지는 순간 녹슨 열쇠 하나가 나를 큰 소리로 불렀다. 그

우정사업본부 경주우체국 근무 계간 <작가시선> 봄호로 등단. 세탁기가 또 말썽이다. 얼마 전 서비스센터 직원을 불러 부품 하나를 교체했는데도 불구하고 며칠 만에 또 고장이 나고 말았다. 내가 결혼할 때 혼수품으로 사 왔으니 올해로 만 15년째 우리 집 빨래를 도맡아 해온 셈이다. 그 오랜 세월 부려먹었으니 고장이 날 만도 하다. 나는 모든 물건들

우정사업본부 경주우체국 근무 계간 <작가시선> 봄호로 등단. 20 여년 만에 외가에 갔다. 산발치를 따라 걸으면 한나절씩 걸리던 길이 이제는 아스팔트로 포장이 되어 자동차가 대문 안까지 들어가고 마을버스도 하루에 서너 대는 다닌다고 한다. 마을 어귀 당수나무는 아직도 여전한데 이 조그만 시골마을에 아는 이 하나 없다니 갑자기 쓸쓸해진다. 어린 시

나는 꽃을 무척 좋아한다. 용돈으로 생활하던 학창시절에는 점심값을 아껴 꽃을 사곤 했을 정도였다. 이른 봄 노란 후리지어 한 다발을 안고 집으로 가는 길은 그 아련했던 꽃향기에 취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어디 그뿐이랴! 개나리, 목련화, 영춘화, 진달래, 벚꽃, 산수유, 이름 모를 들꽃까지도 꽃만 보면 그렇게 가슴 두근거렸고 좋았었다. 나

우정사업본부 경주우체국 근무 계간 <작가시선> 봄호로 등단. 윤달에 해두면 오래 산다는 말에 미리 지어두었던 할머니의 수의, 솜씨 좋기로 소문난 덧말 아지매한테 웃돈까지 얹어주며 안동포를 끊어다 맞춘 것 치고는 너무 볼품이 없었다. 산 사람 옷과는 다르다는 게 가슴에 와 닿지 않았던 나는 무르자는 말이 목젖까지 올라오는 걸 겨우 참았었다. 바느질

우정사업본부 경주우체국 근무 계간 <작가시선> 봄호로 등단. 이른 아침 현관문 앞에 놓여 있는 신문을 집어 드니 신문지 사이에 끼워져 있던 백화점 세일 전단지가 발등위로 툭 떨어졌다. 설맞이 세일을 하는 모양이었다. 아이들 크는 것은 옷 입혀보면 안다고 하시던 어머니 말씀이 떠올랐다. 작년에 입혔던 옷들을 꺼내 입혀보니 하나같이 팔목이 댕강하고

우정사업본부 경주우체국 근무 계간 <작가시선> 봄호로 등단. 어렸을 때 왼손으로 숟가락을 잡을라치면 이를 노려보고 계시던 할머니의 오른 손이 여지없이 날아와 내 손등을 내리치셨다. 나는 어설픈 왼손 때문에 손등뿐만 아니라 등짝도 낯짝도 많이 맞고 자랐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지금은 오른손을 능숙하게 사용하지만 아직도 다급해지면 어색하고 서투른 왼

우정사업본부 경주우체국 근무 계간 <작가시선> 봄호로 등단. 나와는 육촌지간이면서 초등·중학교 동기인 친구가 있다. 어렸을 때부터 워낙 똑똑하여 전교 1등을 한 번도 놓친 적 없어 우리 마을에서는 수재라고 늘 칭찬이 자자한 아이였다.그 친구가 우리나라 최고 명문대를 입학했을 때는 그의 아버지인 나의 당숙어른이 돼지 한 마리를 잡아 마

우정사업본부 경주우체국 근무 계간 <작가시선> 봄호로 등단. 여섯 살 때였다. 갑자기 배가 불러오더니 쥐어짜듯 아팠다. 집에는 초등학교 6학년이던 큰 언니 혼자 밖에 없었다. 아마도 낮에 얻어먹은 이웃집 고사떡이 문제였던 것 같았다.배를 움켜잡고 온 방을 데굴데굴 뒹굴며 울어댔다. 보다 못한 큰 언니는 나를 들쳐 업고 개업한지 얼마 안 된 동네의

우정사업본부 경주우체국 근무 계간 <작가시선> 봄호로 등단. 불혹을 넘어선 그녀는 아직 미혼이며 소설가가 꿈이다. 소설 쓰기를 독학했다는데도 내가 보기엔 문학적 소양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여상을 졸업하고 대기업 생산직 사원으로 근무하면서 착실히 모은 목돈으로 서점을 운영했지만 인터넷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얼마 못가 서점은 쫄딱 망하여 자본금을

우정사업본부 경주우체국 근무 계간 <작가시선> 봄호로 등단. 할머니의 집 대문 앞 전봇대에는 일 년 내도록 낡은 쪽지 하나가 붙어 있었다.‘빈 방 있슴, 우풍 업고 방 뜨시함. 열낙처 ○○○­××××’굵은 매직펜으로 꾹꾹 눌러 쓴 그 글씨의 임자를 나는 보지 않고도 누군지 단

우정사업본부 경주우체국 근무 계간 <작가시선> 봄호로 등단. 왜 하필 레스토랑이냐며 시종일관 툴툴거리는 남편의 식성과 마주앉아 모른 체 시치미를 뚝 떼고서 밥을 먹었다. 아무리 화가 나 있어도 허기 앞에서는 맥을 못 추는 나는 이 세상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족속임에도 오늘은 영 식탐이 생기지 않았다. 생일날 다친 마음이 아직도 풀리지 않아서 모처럼

그 무덥던 여름이 쫓기듯 도망가 버렸다. 여름을 견뎌낸 곡식들이 들판을 황금빛으로 만들어놓자마자 개선장군 같은 가을이 산과 들을 점령하고 말았다. 화려한 꽃과 단풍에 수많은 사람들이 환호성을 울리며 행락을 즐긴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에게 풍요로운 가을이 온 것이다.나는 어려서부터 농촌에서 자랐기에 행락철인 가을을 즐기기보다는 늘 농사일에 지친 부모님을 도와

몽당연필 하나도 귀해서 침 바르며 글 쓰던 시절, 나는 시인이 되면 참 좋겠다 싶었다. 초등학교 2학년때 지역에서는 꽤 유명한 백일장에 나가서 딸랑 다섯 줄 짧은 동시 한 편으로 대상을 받은 이후부터 어린 나는 시인이 뭔지도 잘 모르면서 여러 사람들 앞에서 시인이 되겠노라고 말하고 다니곤 했었다. 이웃 집 잔치 떡 한 조각에도 입 찢어지게 싸우고 아버지 밥

할머니는 마당가에 꽃 키우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손바닥만 한 땅이라도 있으면 콩이나 채소를 가꾸었다. 잡풀이 수북해도 절대 뽑지 않았다. 쇠무릎, 이질풀, 질경이, 비단풀까지 다 약으로 썼다. 할머니는 어려서부터 몸이 많이 약했지만 약 한번 제대로 써 본 적 없었다. 집은 찢어지게 가난하여 늘 배가 고팠었다고 한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틈만 나면 텃밭을 갈

마흔을 즈음하여 지근거리의 상이 아른거리고 신문이라도 읽을라치면 활자가 겹쳐 보이는 증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시력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자신이 있었는데 흔히 말하는 노안이 나에게 시작된 것이었다. 글을 깨친 이후 무참히 혹사당한 내 눈이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반기를 든 모양이었다.바늘귀를 비켜간 실은 번번이 허공을 꿰었고 배추씨를 뿌려놓은 텃밭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별 쓸모가 없어진 사랑채 방은 창고처럼 허드레 것을 보관하며 그냥 방치해 두었었다. 친정에 드나들 때 마다 그렇게 내버려두는 것이 늘 맘에 걸렸는데 올 여름 휴가 때 들렀더니 내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오빠가 먼저 말을 꺼냈다. “사랑채 빈방 치워서 네 서재로 사용해라. 갑갑한 아파트보단 글쓰기가 좀 더 낫지 않겠나? 자

한 여름의 경주, 갑작스런 소나기가 한바탕 분탕질을 하고 지나갔다. 덕분에 말끔하게 씻긴 산과 들판이 더욱 푸르러 보인다. 오늘이 바로 20여 년 만에 여고시절의 단짝 친구들을 만나기로 한 그 날이다. 요즘 깜빡 깜빡하는 내 기억력 때문에 혹시 잊을까 걱정이 되어 수첩이며 달력이며 날짜가 보이는 모든 것에 붉은 동그라미를 그려두었었다. 약속 시간은 늦은 오

유감스럽게도 나는 쉽게 깨지지 않는 단단한 호도껍데기가 아니다. 비록 호되게 깨지는 순간이 온다고 하더라도 혼자서 실없이 터져버리는 무른 연시 같다. 껍질이 갈라지고 그 틈으로 삐죽삐죽 속살이 삐져나온 형편없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보라. 나는 총알 같은 고추씨를 입 안에 꽉 깨물고 있는 매운 청량고추가 되고 싶을 때가 참 많다. 그런데 이 물러터진 감인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