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우체통 세상으로 보내는 편지 Ⅱ-⑥ 느린 우체통 앞에서
빨간우체통 세상으로 보내는 편지 Ⅱ-⑥ 느린 우체통 앞에서
  • 조정임
  • 승인 2022.03.28 09: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재> 빨간우체통 세상으로 보내는 편지 Ⅱ  ⑥ 느린 우체통 앞에서
글쓴이 : 조정임. 작가.경주우체국소포실장.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시인이 경주에서 교편생활을 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라 유년 시절 나는 이 시를 읽으며 싯구 속의 우체국이 내가 사는 도시에 있는 우체국이었으면 참 좋겠다는생각을 하곤했다. 그냥 푸른 하늘도 아니고 시리도록 빛나는 보석인 에메랄드에 비유된 하늘이 환히 내다보이는 낭만적인 우체국을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그런 우체국에서 일하고 싶었다. 한참 뒤에 알게 되었지만 싯구 속의 우체국은 통영 어느 바닷가 우체국이란 설도 있고, 부산 도심지에 있는 우체국이라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경주라는 이야기는 전혀 들을 수 없어 조금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어쨌든 나는 우체국 직원이 되었고 꿈꾸던 낭만과는 많이 다른 생활이었지만 30년이 지나도록 한결같이 나의 일을 끔찍이도 사랑하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쓰는 고운 손은 이제 없다. e-mail이나 문자메시지에 빼앗긴 자리를 아마도 영원히 되찾을 수 없을 것이다. 군사우편을 제외하고 나면 손편지는 거의 찾아볼 수조차 없다. 약간은 과장된 듯 화려한 컬러의 광고지로, 때론 아날로그를 그리워하며 레트로(retro)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흑백의 전단지며 다양한 DM들과 누구도 반가워하지 않는 천덕꾸러기 각종 고지서들이 편지를 대신해 집배원의 손을 통해 편지함에 꼽히는 것이 대부분이다. MZ세대라고 불려지는 그들은 집배원과 대면하는 것조차 원치 않는다. 보내는 소포도 결제는 모바일로 하고 물건은 문 앞에 내놓고, 받는 우편물도 비대면 수취를 원한다. 소포 상자에 적힌 “초인종을 누르지 마세요”란 문구를 보면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지기도 한다. 고맙다고, 고생했다고 건네던 물 한잔의 인정은 이제는 어디에도 없다. 편지에 대한 향수만 남기고 아쉽게도 우체국은 점점 삭막한 공간으로 변해가고 있다.

나는 늘 과거를 그리워한다. ‘라떼는 말이야’를 입에 달고 다니는 꼰대라 그럴지도 모르지만 아직도 나는 문자나 e-mail보다는 짧지만 직접 쓴 쪽지를 후배들에게 전하곤 한다. 오랜 친구가 문득 그리울 때는 미주알고주알 추억을 곱씹으며 긴긴 편지를 쓰기도 하고 몇 날 몇 일을 가방에 넣고 다니다 골목길에 덩그러니 서 있는 우체통을 찾아 얼른 넣고 오곤 한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을진데도 불구하고 누가 볼까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나곤 한다. 너무 빠른 속도로 변해가는 세상에 그럴싸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편지는 시대를 역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움, 편의점의 가판대에서 추억의 옛날 과자를 보면 한 번쯤 집어보고 싶은 아련한 향수 같은 것이다.

세계 다양한 국가의 우체통. 사진 한국우편진흥원.
세계 다양한 국가의 우체통. 사진 한국우편진흥원.

잔뿌리가 늘어난 화분을 분갈이하듯 나 역시 살아오면서 늘어난 식구나 짐을 담아낼 조금 더 큰 평수의 집으로 몇 번 이사를 했다. 그러면서 나는 추억의 그것들을 대부분 잃어버렸다. 초중고 졸업앨범이 그것이며 어릴 적부터 적어오던 일기장들 또한 사라져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친정집 창고에서 누렇게 얼룩진 오래된 편지 뭉치를 발견했다. 여고시절 단짝친구와 주고받았던 편지였다. 찢겨져 절반은 사라진 것도 있었고 얼룩져 영 글씨를 알아볼 수 없는 것도 있었지만 난 그것들을 집으로 가지고 와서 하나 하나 읽어 보았다. 대화를 나누듯 아귀가 딱 맞는 걸로 봐서 주고받기를 계속했음이 분명했다. 같은 교실에서 공부를 했고 날마다 만났을 텐데 무슨 못 다한 얘기들이 그리 많았기에 이렇게도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을까? 오래된 추억을 곱씹는 건 설레면서도 곳곳에 아쉬움이 묻어나와 나를 멈칫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친했던 친구는 지금 어디서 무얼하며 살고 있는지 그 소식조차 모르고 살고 있다는 사실이 아리듯 아파왔다.

그때 우리들의 우정이란 별것 아닌 일에도 울고 웃고 서로를 위로했던 짧은 단막극처럼 이어졌다 끊어지기를 반복하다 어느 순간 뚝 끊겼다. 내용으로 보아 서로에게 뭔가 조그만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꼬깃꼬깃 구겨진 마지막 편지 한 장은 내가 쓴 편지였다. 결국 보내지 못한 걸 보니 단단히 꼬였던가 보다. 기억조차 희미하였지만 문득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하고 호기심도 생겨 그때 그 주소지로 그때 보내지 못한 그 편지와 함께 짧은 안부를 적은 메모를 넣어 보내고 싶어졌다. 오늘의 내가 과거의 그에게 편지를 썼다.

이럴 때 느린 우체통의 역할이 빛을 발하는 것 같다. 감정을 다스릴 시간을 주는 것, 한 달이든, 일 년이든 내 손을 떠난 편지에 대해 무심해질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느린 우체통은 시간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조절해주는 것이다. 그 친구는 나를 기억조차 못 하거나 아니면 아직도 오해로 나에 대한 마음을 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오래전 주소여서 어쩌면 수취인 불명으로 되돌아올 수도 있지만 그때까지 나는 꽤 긴 시간을 벌었다. 애면글면 답장을 기다리며 안달하지 않을 수 있어 좋다. 익명의 사람들이 수없이 오고 가는 황리단길 모퉁이에 우두커니 서 있는 느린 우체통 앞에서 나는 그리운 이에게 편지를 보낸다. 느리게 느리게 그에게 닿아 다시 그의 소식이 천천히 천천히 나에게로 와 주기를 바래본다.

나의 편지를 삼킨 느린 우체통을 바라보며 유치환 시인의 “행복”이란 시를 읊조리며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대신‘그리워할 수 있어서 행복하였네라’로 바꿔 읽으며 때로는 상대방의 무관심이 감사할 때도 있다는 걸 절실히 깨닫는다.

경주포커스 후원은 바르고 빠른 뉴스제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