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우체통 세상으로 보내는 편지 Ⅱ-⑦벚꽃 흐드러진 날에
빨간우체통 세상으로 보내는 편지 Ⅱ-⑦벚꽃 흐드러진 날에
  • 경주포커스
  • 승인 2022.05.02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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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조정임. 작가.경주우체국소포실장.

<연재> 빨간우체통 세상으로 보내는 편지 Ⅱ ⑦벚꽃 흐드러진 날에

글쓴이 : 조정임. 작가.경주우체국소포실장.

 

벚꽃이 만개했다. 경주는 도시 전체가 벚꽃 명소여서 해마다 봄이 되면 여느 상춘객들처럼 꼭 한 번씩은 벚꽃을 즐기곤 한다. 주말이면 방구들과 연애라도 하듯 드러누워서 도통 움직이려 하지 않는 남편을, 지난 주 내내 채근하여 올 해에도 겨우 나들이를 계획할 수 있었다.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이 못마땅해 나무라듯 일으켜 세웠다. 꽃놀이에 신난 건 나 혼자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렇게 가족나들이가 성사된 것이다. 출발부터 순탄하지 않았던 꽃놀이는 보문단지로 진입하는 길에서부터 완전히 헝클어졌다. 햇살이 투명해지자 연분홍 벚꽃은 가지런히 쏟아지는 봄 햇살과 눈이 맞아 밀회를 나누었고, 벚꽃은 마치 사랑에 빠진 여인네처럼 더욱 빛나고 아름다웠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보문단지로 진입하려는 차들로 인하여 도로가 많이 붐볐다. 때문에 교차로에서 신호를 대기하며 한참을 기다려도 줄지어 서 있는 차량이 워낙 많다보니 한 번에 건너지 못하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져 다음 신호가 떨어지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그런데 그 사이를 교묘하게 ‘끼어들기’ 하는 차량이 생겨났다. 하나 둘 그러다보니 차는 도로에서 실타래마냥 마구 엉키기 시작하였다. 그러는 사이 신호는 초록불로 바뀌었고, 한 대의 차가 급하게 끼어드는 다른 차를 들이박아 버려서 이중 삼중으로 차가 부딪쳐서 도로는 순식간에 주차장이 되어버렸다. 사고가 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참 다행이라고 느긋하게 생각하는 나와는 달리 남편은 육두문자를 섞은 욕까지 내뱉으며 짜증을 부렸고, 아이들은 제 아빠에게 다른 사람들처럼 갓길로 빠져 새치기를 하라고 부추겼다.

20여 년 전 그때도 그랬다. 그날은 오늘처럼 내 마음이 이렇게 느긋하지는 않았다. 약속시간이 다가오면서 마음은 급해지고 길은 막혀서 오도 가도 못하고 도로 위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했고나의 업무를 사랑했으며 그에 따른 성과도 뛰어났다. 주변의 상사는 물론동료들에게도 인정을 받으며 공직생활을 했다고 자부했지만 승진 심사에서는 번번이 누락되었다. 승진 심사가 있을 때 마다 기대는 늘 실망으로 바뀌었고, 풀이 죽어있는 나에게 어떤 선배가 은밀히 불러 조언을 해주었다.

‘그 분’께 성의 표시를 하라는 것이다. 승진 할 때가 되면 누구라도 예외없이 그 분께 성의 표시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선배의 말은 능력 여하를막론하고 그래야만 승진할 수 있다는 투였다. 나는 자존심이 상했다. 가정마저 뒷전으로 내팽개치고 일에 매진해왔고 그런 편법을 쓰지 않고도 나는 충분히 일로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에 그런 제안은 나에게 한없이 절망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동료들에 비해 승진이 자꾸 늦어지자 마음이 변하기 시작했다. ‘까짓 자존심이 뭐 대수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하지 않던가?’ 하면서 스스로를 달래며 설득했다. 때마침 승진 심사를 앞두고 그 분이 우리 지역으로 내려오신다고 했다. 그 분 생질의 결혼식이 보문단지에 있는 모 호텔에서 있다고 했다. 나에게 조언을 해 준 선배를 통해 그 날 그곳으로 가서 찾아뵙겠다고 언질을 드렸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내 석연치 않아 불안했다. 한편 그런 결정을 한 나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고 탐탁지 않았다. 도대체 그 놈의 성의라는 것은 왜 꼭 이렇게만 표현되어야 하는 것일까?

나 자신을 납득시키는 일도 쉽지는 않았다. 며칠 동안의 고민 끝에 나는 두눈 딱 감고 남들이 조언해 주는 대로 우리 동네의 특산물인 빵을 사고 그안에 봉투를 끼워 넣었다.

그리고 문제의 그날 나는 그 분을 만나기 위해 약속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 내키지 않는 불편한 행보를 알기라도 하는지 공원으로 진입하는 도로는 사방이 꽉 막혀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약속 시간은 다가오고 하는 수 없이 갓길로 차를 몰아 얌체같이 끼어들기를 시도하다가 정상적으로 신호를 받고 진입하던 차에 부딪쳐 접촉사고가 나버렸다. 안 그래도 주차장 같던 도로는 내가 낸 사고 때문에 완전 마비가 되어버렸다. 차에서 내려 연신 고개를 숙이며 미안하다는 인사를 하고 보험회사에 연락을 했다. 그렇게 사고 수습을 하고 나니 약속시간은 이미 한 시간이 훌쩍 더 지난 후였다. 교통경찰이 도착하여 도로를 완전 소통시킬 때까지 거의 한 시간에 가까운 긴 시간동안 나는 도로 한복판에서 사람들의 비난과 손가락질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 때 중간에서 가교 역할을 해 준 선배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다급하게 전화가 왔다. 그 분은 기다리다 화를 내며 돌아갔다고 선배는 나를 책망했다. 미주알고주알 상황을 설명해보려 했지만 너무 늦은 일이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필때면 경주벚꽃명소마다 교통체증이 발생하고 끼어들기 차량에 의한 사고도 적지 않게 일어난다. 일상에서도 끼어들기 하는 얌체족은 늘 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필때면 경주벚꽃명소마다 교통체증이 발생하고 끼어들기 차량에 의한 사고도 적지 않게 일어난다. 일상에서도 끼어들기 하는 얌체족은 늘 있다.

찌그러진 차는 그 날의 나처럼 구겨진 채 견인차에 매달려 정비공장으로 가고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가로에 혼자 남겨졌다. 꽃은 눈부시게 아름다운데 내 기분은 영 엉망이었다. 앞으로 어떡해야 하나 하는 걱정보다는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비굴해보여 헛웃음이 나왔다. 영문을 알 리 없는 벚꽃만 내 머리위로 그 고운 꽃잎을 분분이 흩날리고 있었다. 문제는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이고 얌체 같은 끼어들기였다. 내 앞에 많은 사람들이 얌체같이 끼어들기를 했고 그래서 나는 승진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늦어졌던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나 역시 그들처럼 끼어들기를 하려했다. 그 결과는 사고였다. 내가 그동안 상처를 받고 결국은 비굴한 선택에 괴로워했으면서 무리한 끼어들기를 시도했고 운이 좋게 성공했다면 나는 성실하게 일하고 정의롭게 살고 있는 많은 동료나 후배들에게 피해를 주고 말았을 것이다. 그날 나는 목적했던 성의 표시를 못했고 말할 것도 없이 바로 이어진 승진 심사에서 보기 좋게 또 물을 먹고 말았다. 당연하지 않았지만 나는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였다. 그 분이 야속하기도 했다. 약속시간에 도착할 수 없도록 길을 막아버린 만개한 벚꽃도 조금은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나는 담담히 결과를 받아들였다. 그날 사고 난 내 차 뒤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뒤엉켜버렸던 자동차에 탄 사람들에게서 비난의 소리를 들으며 또 다른 소중한 무언가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 날 내가 그 분께 성의 표시를 하고 인사 청탁을 했다면 비록 다른 사람들의 수군거림이나 비난을 받았을지는 모르지만 지금보다는 조금 더 높은 직급으로 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지금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나의 능력이나 노력보다는 약삭빠른 나의 처세술만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그 후 그 분은 이런 저런 불미스런 일로 공직을 떠났고 한동안 그 분이 한 일과 그 분과 얽힌 많은 사람들이 회자되었지만 나는 그 해 봄 유난히 화려했던 벚꽃 덕분에 구설수에 오르지 않았다.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지금의 나를 사랑한다. 여전히 공무원으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내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하고 있고 동료들과 정당하게 선의의 경쟁을 하며 후배들의 존경을 받으며 잘 살고 있으니까.

한 20년 훌쩍 거슬러 올라가 옛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교통경찰의 수신호에 따라 차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불만 가득한 아이들에게 나는 한마디 던졌다. “저 차들이 억지로 끼어들기를 하지 않았다면 사고도 안 났을 것이고 그랬으면 우리 모두 지금쯤은 저 벚꽃나무 아래서 꽃놀이를 하고 있겠지?” 맞는 말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며 남편은 여전히 투덜거린다. 그래도 나는 우리 동네 벚꽃이 참 좋다. 해마다 벚꽃이 필 때마다 사람들은 막히는 도로와 넘치는 인파에 짜증을 내곤 하지만 나는 그것들에 감사한다. 그 흐드러진 벚꽃 덕분에 나는 지금 내 아이들에게 이렇게 떳떳하게 말할 수 있으니까. 그날 내가 순조롭게 그 분을 만나고 부정한 방법으로 인사 청탁을 하고 그 덕분에 내가 승진을 했다면 나는 여전히 이 벚꽃의 아름다움은 보지 못하고 살고 있을 것 이다. 정당하게 내 순서를 기다리는 여유보다는 또 끼어들기를 시도했을 것이고 그런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옳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나는 지금 내 아이들에게 정직하고 바르게 살란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인산인해를 이룬 벚꽃 명소에는 가는 곳마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얌체족들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기대한다. 내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사는 세상은 지금보다는 조금 더 정의로운 세상이 될 거라고, 묵묵히 자신의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우대받는 그런 세상이 꼭 왔으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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