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우체통 세상으로 보내는 편지 Ⅱ-⑧이런 명함 본적 있나요?
빨간우체통 세상으로 보내는 편지 Ⅱ-⑧이런 명함 본적 있나요?
  • 경주포커스
  • 승인 2022.06.27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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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우체통 세상으로 보내는 편지 Ⅱ-⑧이런 명함 본적 있나요?
조정임 <작가. 경주우체국 소포실장>

사진 네이버블로그  ENJOY YOUR NIGHT
개성을 맘껏 드러내는 명함은 많다. 집에서 잠이든 할머니의 명함은  치맛자락에 또박또박 휴대폰번호를 수놓은 것이었다.  사진 네이버블로그 ENJOY YOUR NIGHT

평상에 누워 마치 당신의 집인 양 곤히 잠이 들어버린 할머니의 치맛자락에서 나는 한 땀 한 땀 정성껏 수놓아진 휴대전화 번호를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치맛자락뿐만 아니었다. 외투 옷섶에도 안에 입은 티셔츠에도 속곳 바짓부리에도 똑 같은 방식으로 곱게 수놓아진 같은 전화번호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만으로도 할머니는 누군가의 극진한 보호를 받는 분이란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아마도 길을 잘못 찾아든 모양이었다.

시골집 마당에는 키 큰 감나무가 제법 너른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어서 그 아래 평상을 내다 놓았다. 녹슨 대문을 떼어버리고 담벼락엔 딸아이와 예쁜 그림도 그려넣었다. 대문이 없어서인지 평상은 공원의 벤치처럼 지나가던 동네사람들도 한번 씩 앉아 쉬었다 가곤 한다. 느닷없는 할머니의 등장이 그리 낯설지만은 않았지만 편안하게 잠이 든 할머니의 옷에 수놓아진 전화번호는 어쩐지 예사롭지 않았다.

나는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는 오랜 소원을 풀기위해 지금 당장은 이사를 할 수 없지만 어른들이 사셨던 시골집을 팔지 않고 이사를 할 수 있는 미래를 꿈꾸며 주말이면 조르르 달려와 이곳에서 주말을 보내곤 한다.

주말에야 한번 씩 들리는 시골집은 곳곳이 사람의 손길을 기다린다. 흙 마당에 우후죽순 자라는 잡풀도 뽑아야 하고 바람이 잘 통하는 대청마루의 구석구석 불법으로 집단 거주하는 먼지들도 내쫓아야만 했다. 집안 일이 서투른 나에게는 쉽지 않은 노동이었다. 마당을 가로질러 감나무에 단단하게 묶어놓은 빨랫줄에 간밤 덮었던 홑이불도 탁탁 털어 햇볕에 널어놓고서 기다란 바지랑대로 빨랫줄을 장난스럽게 하늘로 쑤욱 밀어 올렸더니 그 끝에 잠자리 한 마리가 먼저 날아와 앉았다. 그러고도 나의 노동은 한참 더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조그만 텃밭의 잡초를 뽑다가 지친 몸을 잠시 쉬려고 평상에 털썩 주저앉다가 미처 할머니를 보지 못하고 할머니의 다리 쪽에 부딪히고 말았다.

“아이구 아야,”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옆에 있던 지팡이를 들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내리칠 기세였다. 순간 우리 집인 것도 잊고 내가 줄행랑을 칠 뻔했다. 뭔가 잘못되었지 싶어 겁에 질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할머니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행색은 그다지 남루하지 않았다. 백발의 머리는 귀밑까지 단정하게 정돈되었고 어디 마실이라도 나온 것처럼 매무새도 고운 편이었다.

“할머니 누구세요? 집은 어디세요?” 하고 여쭤보았지만 할머니는 했던 말만 계속 반복하는 것이 어쩐지 이상해보였다. 그러더니 아이처럼 집안 구석구석을 살피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정색을 하며 “니는 누고?” 하시며 내 손을 잡더니 눈물을 글썽였다. 아무래도 무슨 사연이 있어 보였다.

나는 할머니를 겨우 달래고 진정시켜 평상에 앉혀놓고 간식거리를 조금 챙겨나와 마주 앉았다. 그리고 나는 할머니와 통하지 않은 대화를 시도했다. 할머니는 치매를 앓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우리 집과 할머니는 무슨 인연이 있는 걸까? 하지만 할머니에게서 더 이상의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다. 내가 내온 음식을 정신없이 드시더니 이내 평상에 있던 목침을 베고는 곤히 잠이 들어버렸다.

아무래도 정신은 온전치 않아 보였고 보호자에게 연락을 해봐야 할 것 같았지만 소지품 하나 가지고 있는 것이 없었다. 여기까지는 어떻게 왔는지 궁금했지만 마냥 내가 보호하고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아 주무시는 할머니의 주머니를 살펴보았다. 지갑은 물론이거니와 손수건 한 장도 없었다. 낭패다 싶어 당황하고 있는데 순간 치맛자락에 또박또박 수놓아진 휴대전화 번호가 내 눈에 들어 왔다. 다시 보니 입고 있는 옷가지마다 같은 번호가 수놓아져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그 번호를 눌러 ‘통화’버튼을 꾸욱 눌렀다. 통화 연결음 신호가 울리자 바로 다급한 목소리의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여보세요.”

“저,저”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다시 채근하듯“ 여보세요, 말씀하세요.”하고 재촉을 했다. 할머니를 보호하고 있다고 말하고서 집주소를 알려주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단아한 차림의 아주머니 한분이 할머니를 찾아왔다. 며느리라고 했다. 사연인즉 10년 전에 아들이 사기를 당해서 집을 포함하여 전 재산을 탕진하고 죄책감에 자책하다 집을 나간 후 연락이 끊겨버렸단다. 아주머니는 시어머니와 월세 방을 전전하며 서로 의지하며 살고 있다 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할머니는 치매를 앓기 시작했고 자꾸만 혼자서 가출을 하신다고 했다. 생계 때문에 아주머니는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어 할머니의 간병에만 전념할 형편이 되지 않았다고 했다. 휴대폰을 목에 걸어드리기도 했고, 전화번호가 적힌 명찰을 달아드리기도 해보았지만 번번이 어딘가에 벗어 던져 버려서 하는 수없이 옷마다 전화번호를 새겨놓았다고 했다. 그것도 어떤 때는 외투를 잃어버리기 일쑤라 속옷까지 번호를 새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것은 할머니의 명함인 셈이었다. 덕분에 할머니의 가출은 번번이 실패했다고 한다.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받은 명함 중에서 가장 의미있고 특별한 명함이었다.

아주머니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고 이리저리 둘러보시던 아주머니는 옛날에 살던 집이 우리 집과 아주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한다. 그래서 할머니가 처음 온 이곳에서 그렇게 편안하게 잠들었던 것 같다 하셨다. 사람들은 남편과 소식 끊긴지 오래인데 치매를 앓고 있는 시어머니는 그만 요양원에 보내라고들 한다지만 아주머니는 친정어머니보다 더 깊은 정이 들어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 사이 잠이 깬 할머니는 며느리를 보더니 어린아이처럼 엄마한테 그러듯이 한껏 어리광을 부린다. 아주머니는 가지 않겠다고 떼를 쓰는 할머니를 겨우 달래서 데리고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명함으로 일컬어도 좋을 치맛자락을 살포시 휘날리며 자꾸만 머뭇거렸다. 나는 더 이상 쓸모없을 줄 알고 구겨 넣어 두었던 사용하지 않는 명함을 찾아 휴대폰 번호에 굵은 선을 긋고 대문을 나서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언제든 놀러 오시라며 명함을 쥐어 드렸다. 아이처럼 손을 흔들며 떠나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조그만 종이 조각 하나가 바람에 날려 마치 종이비행기처럼 날아가더니 집 앞 마을회관 옥상에 설치된 전파 기지국에 가서 걸렸다.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내가 쥐여 준 명함을 할머니가 놓쳐버린 모양이었다. 하필이면 전파 기지국에 가서 걸렸으니 할머니의 소식은 끊임없이 전파를 타고 흘러 나에게로 또 다시 올 것 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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