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김종철선생 공적비 제막...고향 양북면민 따뜻한 축하속 뜻깊은 기념행사
독립운동 김종철선생 공적비 제막...고향 양북면민 따뜻한 축하속 뜻깊은 기념행사
  • 김종득 기자
  • 승인 2019.11.15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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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막식에 앞서 양북면복지회관 대강당에서 기념행사가 진행됐다.
제막식에 앞서 양북면복지회관 대강당에서 기념행사가 진행됐다.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출신의 항일 독립운동가 김종철 선생의 동상 및 공적비 제막식이 15일 열렸다.
제막식 전체 영상보기-유튜브 경주포커스 TV
https://youtu.be/WXWbzE0X6FM

경주출신 독립유공자 가운데 유일한 의열단원으로 활약한  선생의 공적비 제막행사는 성대했다.
양북면행정복지센터가 주최하고 양북면발전협의회가 주관해 제막식에 앞서 양북면 복지회관 대강에서 열린 기념행사에는 주낙영 경주시장,박차양 도의원, 엄순섭, 김승환 시의원, 양북면내 각급 기관단체장들이 총 출동해 축하했다.

양북면 허남권 면장을 비롯해 면사무소(행정복지센터) 직원들은 행사준비를 도왔다.
경과보고를 통해 선생의 일생을 소개하고 주낙영시장의 기념사, 유족대표 김영만씨의 답사가 이어졌다.
양북면발전협의회 김재동 회장은 "공원에 있는 공적비의 비문은 한문이 많아 읽기 곤란할 것 같아 식순에  비문낭독을 넣었다"며 단상으로 나와 공적비문을 낭독했다.
양북면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종철 선생의 공적비 제막에 대해 양북면민들의 진심어린 축하가 온전히 느껴지는 기념행사였다. 

주낙영 시장은 기념사를 통해 “3,1만세운동 100주년, 대한민국 정부의 뿌리인 상해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한 뜻깊은 해에 경주의 자랑스런 애국자시이자 불세출의 영웅 김종철 선생의 공적비와 동상 제막식을 갖게 된 것을 뜻깊게 생각한다”면서 “오직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김종철 선생님을 비롯한 모든 애국지사분들께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선생의 활약상을 설명한 주 시장은 “한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선생의 위대한 업적은 후손들에게 영원히 살아남아 기억될 것”이라면서 “공적비 제막을 계기로 유족들께서는 자랑스런 독립유공자 후손으로서 자부심으로, 면민들과 시민들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김종철 선생의 위국헌신 정신을 기리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유족대표 김영만씨(김종철선생의 장손)가 답사를 하고 있다.
유족대표 김영만씨(김종철선생의 장손)가 답사를 하고 있다.
김재동 양북면발전협의회장이 비문을 낭독하고 있다.
김재동 양북면발전협의회장이 비문을 낭독하고 있다.

김종철 선생은 슬하에 성태,현태 등 2남을 두었다. 
공적비를 세우는데 사재 3천만원을 들인 김영만씨는 선생의 장손이다.
유족을 대표해 답사한 김영만씨는 "무한한 기쁨과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감격해 했다.

이어 “정부가 조부님께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으나 함께 활동하신 분들 대부분은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면서 “현재까지 조부님의 공적거증 자료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해 수 없어 서훈 승격인정을 받을 수 없는 것이 후손으로 매우 안타까운 심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조부님의 훌륭한 뜻을 받들어 우리나라를 더욱 사랑하고 지키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설 것을 다짐한다”고 말했다.

공적비와 동상.
공적비와 동상.

기념행사를 마친뒤 양북면 복지회관 마당에 마련된 동상 및 공적비 제막식을 가졌다.
동상과 공적비가 서 있었고, 그 옆에는 건립취지문을 새긴 조형물도 설치돼 있었다.
감포나정리, 팔조리등에 만들어진 직사각형 모양의 일반적인 공적비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남미경 경주시 복지정책과장은 “경주시가 지원한 예산은 5천만원이지만, 전체적으로 8천만원이 들었다”면서 “동상과 공적비등은 손자 김영만씨가 3천만원을 내놓았기 때문에 이같은 조형물을 설치할수 있었다”고 말했다.

동상과 공적비를 덮어 두었던 흰천을 걷어 낸 뒤 주낙영 시장의 선창으로 만세삼창이 이어졌다.
"대한독립 만세, 대한민국 만세, 양북면 만세"

주낙영 시장의 선창으로 만세삼창을 하고 있다.
주낙영 시장의 선창으로 만세삼창을 하고 있다.
선생의 유족들이 절을 하고 있다.
선생의 유족들이 절을 하고 있다.

유족들은 제막식 행사를  마친뒤 미리 준비해온 음식과 술을 동상 앞에 차려두고, 정성스럽게 절을 올렸다.

이날 제막행사에는 김종철선생의 국내 독립자금 모금활동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던 감포읍 팔조리 출신 애국지사 정내영 선생의 손자 정영화씨, 감포읍 나정리 출신 김봉규 선생의 손부 정연옥 여사도 참석했다.

독립운동을 결의하고 행동까지 함께 했던 동지였으나 살아서는 끝내 만나지 못한 3명의 감포, 양북출신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선생의 공적비 제막식에서 극적으로 만난 것이다.

愛國志士 金鍾喆先生 功績碑(애국지사 김종철선생 공적비) 전문

金鍾喆先生은 구한(舊韓)말에서부터 일제(日帝)강점기(强占期)에 이르기까지 생애를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한 삶을 살아 오셨다.

1916년 휘문의숙(현 휘문고) 졸업앨범에 있는 김종철 선생.사진
1916년 휘문의숙(현 휘문고) 졸업앨범에 있는 김종철 선생.사진

선생은 1888년 12월 12일 경북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道藏谷)에서 父 김영배(金英培)님과 母 영일정씨(迎日鄭氏)의 2남으로 출생하였고 자는 순일, 본관은 김해, 이명은 중길(重吉)·규산(奎山)·지산(芝山)·춘산(春山)·춘화(春花)·임원학(林元學) 등이다. 선생은 새로운 시대조류를 접할 수 있는 신학문을 배우고자 서울의 휘문의숙(徽文義塾)(현: 휘문고교)에 입학하였다. 1916년 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조국의 국권회복을 염두에 두고 국내외의 항일전선을 연결하는 활동을 하였다.

3·1운동 이후부터 무력항쟁으로 전술을 바꾸어 무기를 구입하고 대구와 신의주에 독립운동 거점을 구축하였고, 1919년 11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방문하여 임시정부 요인들과 만났다.

그리고 의용단(義勇團)에 가입하고 독립투쟁을 위한 동지규합과 무기구입, 독립자금모집 등 국내활동을 협의하고 12월 귀국하였다.

1920년 선생은 동지 송두환․정두희․최윤동 등과 비밀결사단체를 조직하여 김봉규․노기용․정내영 등을 동지로 규합하였다.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자금 모금을 위해 선생은 직접 김봉규와 함께 동년 12월 8일 경남 의령의 부호 남정구에게 독립군 군자금을 요구하였다. 남정구의 계략으로 일경에 잡혀 연행되던 중 선생은 일제경찰 甲斐[가이] 순사를 사살하고 피신하였다. 이후 수사망을 피해 만주로 망명한 선생은 다시 상해로 가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보다 조직적이고 투쟁적인 항일독립운동에 나섰다.

1923년 2월 선생은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건설파 부속대표로 참가하였으나, 동년 6월 안창호(安昌鎬) 등이 속한 임정옹호파인 개조파(改造派)로 소속을 바꿔 활동하였다.

1924년 4월 청년단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 방안모색, 일제의 고관암살, 주요시설 파괴 및 독립자금모집 등 상해임시정부를 지원 활동하는 상해 청년동맹회가 결성되자, 선생도 합류하여 청년동맹회의 중추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입법기관인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임된 선생은 1924년 7월 청년동맹회원인 의원들과 함께 제안한 독립운동단체 통일운동인 「독립당대표회의안(獨立黨代表會議案)과 법제개정(法制改正) 및 정무쇄신 연구조사위원 선정안」이 대표적 의정활동이다.

1924년 8월 상해임시정부 자금조달을 위해 당시 의열단원이고 임시의정원 의원 이었던 선생은 동지 장덕진(張德震)·김문희(金文凞) 등과 함께 중국 지나인(支那人) 도박장을 습격해 자금을 강탈하다가 장덕진은 중국인에게 저격되었고 김문희·이승춘(李承春) 등은 징역 5년형을 받았으나, 선생은 구사일생으로 피신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권회복을 위해서 하나의 통일단체가 되기를 희구한 선생은 김일주(金一柱)·김영호의 주재로 영남 유림대표의 중진 김창숙(金昌淑)과 의열단 간부 양건호(梁建浩)·권중환(權重煥) 등과 함께 1927년 9월 한국유일독립당 남경촉성회를 창립하였다.

당시 선생은 일제경찰이 정한 요 시찰인물(1935년 10월)과 요 수배인물(1936년 7월)로 지목되어 감시와 체포 대상이었으나 검문과 경찰 수사망을 신출귀목하게 피하여, 상해를 비롯한 중국 각지를 누비며 활약하였다. 선생은 반평생 동안 항일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여 조국의 자주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광복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선생의 생사를 모르고 있으나 호적 상에는 1941年 3月 10日 사망으로 정리되었다. 국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슬하에 장남 성태(成泰), 차남 현태(玄泰)가 있고, 손자녀는 영만외 7인이 있다. 이 동상과 공적 비는 장손 영만이 주선하여 건립하였다.

선생의 투철한 애국정신과 희생정신은 후세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큰 귀감(龜鑑)이 되고 있다. 우리 모두는 김종철(金鍾喆)지사님의 거룩한 애국애족정신을 마음에 새겨 더욱 부강한 대한민국의 건설을 위해서 노력할 수 있기를 비는 마음 간절하다.

애국지사 김종철선생 동상(공적비) 건립 취지문

애국지사 김종철선생이 오롯이 독립운동에 이바지한 삶에 경의를 표하고 귀감으로 삼기 위하여 고향인 경주시 양북면 소재지(와읍리)에 동상과 공적비를 세운다. 이 공적비에 새겨져 있는 김종철선생의 독립운동에는 나라 위한 희생과 헌신이 담겨 있다. 우리 후손들에게 나라의 소중함을 되살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2019년 11 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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