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차경주시경계탐사] 가볼만 한 곳- 내남면 행정복지센터의 선정비 3기
[제8차경주시경계탐사] 가볼만 한 곳- 내남면 행정복지센터의 선정비 3기
  • 김성대 시민기자
  • 승인 2023.09.01 11: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글.사진 / 김성대

왼쪽부터 노영경의 청덕선정비, 영세불망비, 교구송덕비
왼쪽부터 노영경의 청덕선정비, 영세불망비, 교구송덕비

내남면 행정복지센터 정원에 ‘노영경의 선정비’ 3기가 있다.
선정비는 선정을 베푼 관원을 표창하고 그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을 말한다.
노영경의 선정비는 ‘영세불망비(永世不亡碑)’,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 ‘교구송덕비(矯捄頌德碑)’로 각각 조금씩 다르다.
제 각각 흩어져 있었으나 2010년 10월말 경에 당시 내남면장이셨던 김영제 님의 노력으로 지금의 자리에 옮겨졌다.

부윤은 조선시대 지방관청인 부의 최고 책임자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기초자치단체장에 해당된다. 고려시대(1195년)부터 조선시대(1903년)까지 중앙에서 파견된 경주지역 최고 행정 책임자로 재임했던 관리들을 기록한 『부선생안(府先生案)』에 따르면 노영경은 통정대부이며 1890년 2월 16일부터 1892년 1월 2일까지 경주 부윤으로 재임했음을 알 수 있다.
부윤 노영경의 부임 기간은 2년 정도이다. 경주지역에 노영경의 선정비는 13기가 세워졌으나 지금은 6기만 전하고 있다.

 

∎ 부윤노상공영경청덕선정비(府尹盧相公泳敬淸德善政碑)

청덕비는 청렴하고 고결한 덕행을 기리어 세운 비이다.
이 청덕선정비는 1893년 4월에 세워졌다.
원래 위치는 자세하게 알 수 없다고 하며 2010년 10월 말경 내남면행정복지센터로 옮겨지기 전에는 덕천리에 있는 그의 고택에 있었다.

훌륭한 부윤이 오랫동안 재임하여
온 부민이 회생하는 듯하네
정치는 문학에 힘을 썼고
혜택은 조세를 고르게 하는데 있었다.

가난하고 굶주린 백성 구제하고
학교에서 예를 강하였다.
여기 비석에 글을 새겨 무궁한 후세에 전하려 하네.

-조철제 번역-

 

∎부윤노상공영경영세불망비(府尹盧相公泳敬永世不亡碑)

영세불망비는 어떠한 사실을 후세 사람들이 영원히 잊지 않도록 기록하여 세우는 비이다.
이 불망비는 1892년 1월에 세워졌다.
노영경이 1892년 1월 3일 좌부승지로 임명되었으니 떠난 후 곧바로 세워진 것 같다.
경주학연구원에서 펴낸『돌에 새긴 백성의 마음(2010년)』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 소개되고 있다.



공은 왜 이렇게 늦게 오셨소?
백성들이 모두 은혜를 입었다.

칭송은 온 고을에 흘러 넘쳤고
훌륭한 명성은 먼 후세에 전하리
한 조각 정성어린 마음이며
집집마다 어질다는 소리일세
혜택이 이미 흡족하였으니
설산도 오히려 가벼운 것을.

-조철제 번역-

∎부윤노상공교구송덕비(府尹盧相公矯捄頌德碑)

교구(矯捄)는 틀어지거나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고친다는 뜻이므로 교구송덕비는 폐단을 바로잡은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이 교구송덕비는 그의 부임 기간인 1891년 4월에 세워졌다.
‘청덕선정비’와 같이 내남면 덕천리에 있는 그의 고택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겼다.



고을의 폐단을 바로잡으니
그 은혜는 두루 미쳤다.
근심을 나누고 근본은 굳게 할 때
공평하며 사사로움이 없었다.
공의 밝으신 다스림은
맑은 물에 비친 달빛이었다.

--생략--

역참의 폐단을 없애고
잡역을 감면해 주었다.

-조철제 번역-

경주포커스 후원은 바르고 빠른 뉴스제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