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서라벌별곡] ③ ‘인생’이라는 피크닉
[연재-서라벌별곡] ③ ‘인생’이라는 피크닉
  • 경주포커스
  • 승인 2015.07.04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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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유정한것....세상 돌고 돌아 경주에서 살 줄이야...

 
오랫동안 출판기획 및 집필에 종사하면서 문학과 역사의 대중화 작업에 노력해왔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 《숨겨진 역사의 비밀, 조선왕조실록》,《소설 대왕 세종》,《이태준의 문장 강화》,《삼국지》(전 30권) 등 다수가 있고, 《웅진 푸른담쟁이 우리문학》,《내가 만난 역사 인물 이야기》 등 다수의 출판기획 작업에도 참여해왔다. 경주에 내려온 이후 현재 ‘운수좋은날’이라는 식당을 운영하는 한편으로 ‘예술과마을’이라는 출판사를 설립, 지역사회 문화발전에 이바지하려는 꿈을 갖고 있다. 
경주에 내려온 후 정확히 석 달을 아무 생각 없이 놀았다. 그동안 이 지방의 유명하다는 곳은 샅샅이 훑어보는 한편으로 강석경 선생이 쓴 경주에 관한 책 두어 권을 읽었다. 가히 화양연화(花樣年華)의 계절이었다. 이 나이까지 살면서 그렇듯 아무 대책 없이 속수무책으로 놀아보긴 처음이었다.

그 무렵 내가 진실로 존경하는 전직 출판사 사장님 한 분은 경주 우리집으로 놀러왔다가 돌아가시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겼다.
“경주에서는 확실히 삶과 죽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 같어.”
그러고 나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였다.
“돌아가는 지금 내 심정을 말한다면 이승에서의 하루가 또 이렇게 흘러가는구나다.”

이분이 바로 오랫동안 ‘가람기획’이라는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천문학 잡지 월간 《하늘》을 만들었고, 지금은 출판사를 처분하고 강화도 산골짜기에 틀어박혀 집안에다 천문대를 만들고 별을 보며 농사를 짓는 틈틈이 책을 쓰며 살고 계시는 이광식이라는 분이다. 내가 서울에서 편집회사를 할 때 주요 거래처이기도 했던 이분의 삶은 그 자체로 흥미로워 특별히 관련기사를 링크해둔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5/25/2011052502446.html?Dep0=twitter&d=2011052502446

이 무렵 바람 부는 어느 흐린 날 강변 굴국밥집 언저리 어드메쯤에서 우연히 강석경 선생님을 먼발치에서 마주치기도 했다. 나는 문청시절 대구시 북구, 아마도 침산동이나 산격동 언저리 어디쯤 아닐까 짐작되는 그 퇴색한 풍경을 배경으로 한 선생의 어떤 소설을 읽으면서 가슴 먹먹한 애상에 잠겨보기도 했고, 또 20대 초반에는 운동권 여학생을 소재로 한 것으로 기억되는 선생의 소설을 자취방에 틀어박혀 읽기도 했고, 또 1990년대 초반 내가 잠시 《문학사상》 기자로 일할 때는 선생을 직접 만나 경복궁 잔디밭에서 인터뷰를 한 적도 있다. 아마도 선생이 동화집 《인도로 간 또또》를 막 펴냈을 무렵으로 기억된다.

그러고보니 앞서 말한 이광식 사장님과 강석경 선생이 1951년생 동갑이다. 뿐만 아니라 이광식 사장님도 대구시 북구 고성동 달성공원 주변에 얽힌 전후(戰後)의 낡고 쓰라린 추억을 무척 많이 간직한 분이다.

그날 바람 부는 강변 굴국밥집 언저리에서 강석경 선생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면서 나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묘한 생각에 빠졌다. 모름지기 인생이란 유정(有情)한 것, 세상을 돌고 돌아 오늘날 내가 또 경주에 내려와 살게 될 줄이야…….

▲ 김근태형.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또 한 사람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건천 송선리 복두암 근처에서 외롭게 살다가 수년 전 세상을 떠난 조각가 김근태 형이다. 경주에 내려온 직후 인터넷으로 우연히 ‘경주의 예술가’를 검색하다가 형의 소식과 맞닥뜨렸다.

내가 근태 형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80년 전후, 내 나이 20살 무렵이었다. 그때 근태 형은 내 고등학교 서클 한 해 선배인 J형의 자취방에서 함께 뒹굴고 있었다. 당시 J형은 갓 스물을 넘긴 나이에 중앙지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대구 바닥에서는 제법 폼을 잡고 다니고 있었다. 그런 J형과 내가 아주 친했기 때문에 근태 형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려 여러 번 술을 마셨다. 그들이 뒹굴던 방에서, 또 대구의 어느 낡은 주점 구석진 자리에서.

근태 형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래위로 시커먼 군복 스몰 차림이다. 겅중한 키에, 헐렁해 보이는 그 군복 스몰을 입고, 옆구리에는 커다란 스케치북을 끼고, 한쪽 다리를 조금 절며, 여름이나 겨울이나 거의 똑같은 모습으로 술청에 모습을 드러냈다. 한번은 밤을 새워 술을 마신 적도 있었다. 나와 J형과 더불어 셋이서. 그때 학교는 어디를 다녔고, 처자식은 어떠하며, 다리는 왜 저는지 듣기도 한 것 같은데 이제는 모두 잊고 부정확한 기억들뿐이다. 다만 그때도 근태 형은 아저씨처럼 느껴졌다. 나이 차가 나랑 꽤 많이 날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나는 그의 나이를 모른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근태 형이 대구를 떠나 경주 근처 건천 산골짜기에 들어가 산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럼에도 종종 대구의 술집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 함께 술을 마시면서도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이 형은 이 술을 마시고 이 추운 겨울 어떻게 산골짜기 집으로 돌아가 불을 피우고 살까……’ 하고 말이다.

이후 십수 년 근태 형을 잊고 살다가 아마도 1990년대 중반 무렵 인사동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한낮이었는데, 그때도 형은 변함없는 군복 스몰 차림이었다. “형!” 하고 내가 소리치자 그는 어제 만난 사람을 다시 만난 듯 전혀 놀라는 기색 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야, 오랜만이네.”

다시 또 몇 년의 세월이 흘러 우리 집 책장에서 우연히 근태 형을 발견했다. 《예술가로 산다는 것》(박영택, 마음산책, 2001)이라는 책에 근태 형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이 책의 필자는 “그토록 많은 작가들의 작업실을 다녀봤지만 이렇게 산속에 외롭게 버려진 누추한 작업실은 처음이었다. 세상의 모서리에서 겨우 버텨나가는 지상의 방 한 칸, 그곳에는 어떤 절박과 극한이 몸을 섞고 있었다”라고 쓰고 있었다. 이 책에는 근태 형의 약력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김근태ː정식으로 미술교육을 받은 적이 없지만 권진규의 조각을 본 것을 기점으로 그는 예술에의 길로 들어선다. 그는 경주 산속 ‘남애서당’에서 20년 가까이 혼자 살며 판화지 위에 흑연가루를 묻힌 손가락을 수천 번씩 문지르는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고 있다.

이후 또다시 한동안 근태 형을 잊고 살다가 경주에 내려와 우연히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형이 수년 전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형은 가고, 이제 굴러들어온 돌처럼 내가 경주에 내려와 살게 된 것이다. 시인 천상병은 유명한 <귀천(歸天)>이라는 시에서 인생을 소풍에 비유한 바 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 기슭에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뿐만 아니라 앞서 말한 이광식 사장님은 내가 서울에서 살던 시절부터 다음과 같은 노랫말을 짓고 직접 곡도 만들어 흥얼거리곤 했다.

저녁바람에 강물은 헤살짓고 / 새들 바삐 날아가는 서녘하늘엔 / 해말간 샛별이 나를 보고 웃네
저녁바람에 구름은 밀려가고 / 서녘하늘 반짝이는 어느 별 뒤에 / 당신은 말없이 앉아 계시나요
아름다운 세상 영원하여라 / 나 떠나간 뒤에도 영원하여라 / 어디에 이런 세상 다시 있으랴 / 또 다른 내가 와서 살아갈 세상
아름다운 세상 영원하여라 / 나 떠나간 뒤에도 영원하여라 / 어디에 이런 세상 다시 있으랴 / 또 다른 내가 와서 살아갈 세상 / 아름다운 세상 영원하여라

그렇다.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우리들 인생이란 것은 한바탕 소풍 나온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내 인생이란 것도 어느덧 화양연화의 빛나던 시절은 지나가고 다시 고향땅 언저리, 원점에 선 것이다.

요즈음은 술을 마시고 나면 지난밤 술자리가 한차례 환란이나 치정극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내가 쏟아낸 많은 말들이 꽃잎 떨어진 자리가 얼룩덜룩한 것처럼 부끄러운 것이다. 그렇다고 술을 마시지 않고 사람을 만나지 않고 살 수도 없는 일, 이제 나이 50을 넘겼으니 지천명(知天命)을 배우고 싶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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