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서라벌 별곡] ⑤ 동부동 77-7번지
[연재- 서라벌 별곡] ⑤ 동부동 77-7번지
  • 경주포커스
  • 승인 2015.08.03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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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새해가 밝았다. 신정 연휴 이틀을 쉬고 1월 3일부터 가게 리모델링 공사를 시작했다. 시급한 것은 나무기둥이 썩어 건물이 주저앉은 것을 일으켜세우는 일이었다. 이 일을 비롯해 슬레이트 지붕을 갈고, 선생님의 숙직실로 쓰였던 방의 구들을 까서 교실과 나란히 바닥높이를 맞추고, 숙직실과 교실 사이를 가로막았던 칸막이도 없애는 등 가장 기본적인 일은 통째로 떼서 업자에게 맡기고 나머지는 내가 직접 하거나 아니면 틈틈이 요소요소를 떼서 전문업자에게 맡기는 식으로 공사를 진행했다. 예컨대 전기는 전기업자에게, 배관은 배관업자에게, 타일시공은 역시 타일업자에게 맡기는 식으로 말이다. 그외 소소한 잡일이나 인테리어 관련 일은 모두 내 손으로 직접 했다.

특기할 만한 일은 쓰레기 치우는 데만 무려 300만원이 넘는 돈이 들었다는 사실이다. 건축물 폐자재보다도 그동안 이웃주민들이 버려서 쌓이고 쌓인 생활쓰레기가 더욱 골치였다. 연탄재, 플라스틱병, 생활가구, 가전제품, 삼각빤쓰, 사각빤쓰, 죽은 동물의 시체 등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 쓰레기더미에서 발굴(?)되었다.

▲ 리모델링 공사 당시의 모습. 꼬박 11개월이 걸렸다.
경주시 동부동 77-7번지(북성로 94), 이곳이 우리 가게 겸 현재는 나의 출판 작업실로도 쓰고 있는 장소의 주소다. 외우기 쉽다. 쓰리 세븐. 이곳 사람들은 이 일대를 가리켜 ‘성안마을’이라고도 부른다. 까닭은 그 옛날 경주읍성이 온전했을 때 이곳은 성내(城內, 성안)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경주읍성은 한 변의 길이가 대략 600미터쯤, 그러므로 사방 2.4킬로쯤 되었다고 한다. 이 일대에는 조선시대 및 근대의 문화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왕조시대가 몰락하는 그 순간까지 경주 동헌(慶州 東軒, 현재 경주문화원 자리)이 이 읍성의 중심부에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벌써 오래전에 경주시청은 강 건너 동천동으로 옮겨갔지만, 지금도 이 주변에는 경찰서, 법원, 상공회의소 등이 있어서 은성했던 한 시절을 증언해주고 있다.

▲ 경주읍성문화지도(출처:한겨레신문)

▲ 경주읍성 주변에 흩어져 있는 근현대 문화유산들
공사를 하면서 내가 몰랐던 재미난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한번은 포크레인을 불러 대로변과 접해 있는 높다란 블럭 담장을 허물어뜨릴 때다. 노신사 한 분이 달려와 말씀하셨다.

“이 흙담도 허물 작정이오?”
지금은 잘 보이지 않지만 가게 뒤편으로 이웃집과 경계를 지은 흙담이 있었다. 일부 허물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10미터가량은 온전히 남아 있었다. 내가 대답했다.
“아뇨.”
그러면서 노신사 분을 바라보니 어디선가 뵌 적이 있는 분이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경주에 내려온 직후에 공부삼아 경주문화원에 들른 적이 있는데, 그때 무척이나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어서 머릿속에 인상 깊게 남아 있던 분이었다. 노신사 분이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이 경주읍성 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내가 알기로 현재 경주읍성 안에 조선시대 흙담이 남아 있는 곳은 여기뿐이니 제발 허물지 마시오.”

이분이 바로 현재 경주문화원 원장으로 재직하고 계시는 김기조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올해 여든을 훨씬 넘긴 분으로, 나중에 알고보니 대학시절 나의 은사였던 장윤익 선생님(동리목월문학관 관장)이 경주중학교 재학시절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니 단순히 족보상으로만 따지면 나의 은사의 은사가 되는 셈이다. 나는 우리 가게에 남아 있는 흙담이 진짜 경주읍성 안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조선시대 흙담인지 조사해보지는 않았지만, 김기조 선생님의 말씀대로 허물지 않고 대신 그후 일부 허물어진 흙담을 보수했다.

또 하나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공사가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던 한여름 무렵으로 기억된다. 그날은 마침 일요일인 데다가 비도 오고 해서 실내 바닥에 스티로폼을 깔고 드러누워 쉬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일어나보니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와 60대 전후로 보이는 턱수염의 남자, 2명이 우산을 들고 유리문 바깥에 서 있었다.

“무슨 일로 왔어요?”
40대의 남자가 대답했다.
“안.뇽.하.세.요.”

일본인이었다. 이 사람이 지금은 통일전이 있는 앞동네, 남산한의원이 있는 동네 안쪽에서 우동집을 하고 있는 아라키 준(荒木潤)이었다. 그리고 그 옆의 턱수염의 남자는 당시 한양대 건축학과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던 토미이 마사노리(富井正憲) 교수님이었다. 나중에 아라키 준의 우동집 한옥건물도 이 교수님이 짓게 된다.

40대의 남자가 명함을 내밀며 스스로를 소개했다. 요약하면 이렇다.
자신은 일본에서 교토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던 중 한국문화에 매력을 느껴 퇴사, 그후 일본주재 한국대사관에 근무하면서 더욱더 한국에 대해 공부하고 싶은 열망으로 급기야 한국으로 건너와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박사논문 제목이 <식민지기 경주의 사회관계>라서 얼마 전부터 아예 경주에 내려와 살면서 자료조사를 하고 있는데, 마침 우리 가게 자리가 자신의 논문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가 살았던 집이어서 방문하게 되었다고 했다. 아라키 준이 계속 말했다.

“일제강점기 지금의 경주문화원 자리는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이었는데, 그때 초대관장 격으로 모로가 히데오가 부임하면서 선생님이 있는 이 가게 자리를 관사로 쓰고 있었어요.”
나는 태도가 일변했다. 호기심이 풍선처럼 부풀어올랐다.
“우와, 재미있겠다. 사실 나도 경주에 내려오기 전 책 만들고 글 쓰던 사람인데, 자료가 모아지면 나도 좀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순간적으로 내가 재미있겠다고 생각한 까닭은 논문의 주제상 어느 정도 소설적 접근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라키 준이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앞으로 자주 찾아오겠습니다. 그런데 그 모로가 히데오가 나쁜 짓도 많이 해서….”

아라키 준 일행을 보내고 나는 모로가 히데오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그 결과 ‘나쁜 짓’이란 금관총에서 나온 유물을 일부 일본으로 빼돌린 사실을 말하는 것이었다. 모로가 히데오는 미술품에도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 관장으로 재직하면서 금관총 발굴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는데 그 결과 출토된 유물 중 일부를 일본인 재력가에게 팔아넘겼으며, 이때 일본으로 넘어간 유물이 오늘날 유명한 ‘오구라 컬렉션(일제강점기 때 사업가인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 1896~1964)가 한국에서 수집해 간 유물 1,000여 점을 일컫는 말. 현재 혜문스님이 반환운동을 벌이고 있음)’의 일부를 이룬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에게 더욱 놀라운 사실은 모로가 히데오가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본떠 만든 옥피리의 소유자였다는 점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 ‘자유교양’ 도서의 하나로 나온《삼국유사》를 흥미진진하게 읽은 기억이 있다. 그 속에 나오는 금척(金尺)이며 진평왕의 옥대(玉帶) 이야기도 재미있었지만, 나의 상상력을 무진장 부풀려준 것은 단연 ‘만파식적’ 이야기였다. ‘온갖 파도를 잠재우는 피리’라, 이 얼마나 시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인가!

 

▲ 모로가 히데오와 만파식적을 본떠 만든 옥피리,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사진 위). 1930년대 ‘경주읍내시가약지도(慶州邑內市街畧地圖, 사진 아래. 제공:아라키 준).
화교소학교였던 건물을 음식점으로 리모델링하는 지난한 공사가 마침내 마무리되고 오픈을 한 것이 2012년 11월 30일이었다. 꼬박 1년이 걸렸다. 공사를 하는 동안 여러 사람이 여러 말을 했지만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말 한 마디가 경주 토박이 출신의 어느 후배가 한 말이었다.

“행님, 경주사람이라면 행님같이 이런 미련한 짓 안 합니데이….”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오늘도 경주읍성 안 동부동 77-7번지에 틀어앉아 꿈을 꾸고 있다. 내가 볼 적에 이 집은 동트는 아침 무렵이 가장 아늑하다. 정동향의 이 집에 아침햇살이 스며들어 목조의 내부를 환히 비추면 정말이지 내 혈관까지 환해지는 듯하다. 이 속에서 나의 상상력은 실타래처럼 얼기설기 피어오른다.

▲ 이렇게 변했다. 가끔씩 출판기념회도 열리고, 드라마 촬영장소로 쓰이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은 화려했던 옛 시절이 무색할 정도로 날로 낙후되고 공동화되어가는 이 주변을 살리는 일이다. 내가 가게를 열고 이런 내 생각을 말했을 때 가장 열렬히 지지해주었던 분은 명사마을에 사시는 곽대기 교수님(경일대 외국어학부 일본어 전공)이었다. 명사마을에서만 수십 년째 살고 있는 곽대기 교수님은 나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이 골목에 관심을 가지고 일일이 사진을 찍어 기록으로 남기시는가 하면, 어느 날 갑자기 옛 건물이 사라지거나 성업하던 가게가 문이라도 닫을라치면 못내 안타까워하며 한번은 이런 말도 하셨다.

“김선생, 일본의 유후인(由布院, 온천지대로 유명하며 주민들의 노력으로 비교적 옛 모습을 온전히 보전하고 있음)이 별건가! 내가 보기엔 이 골목도 잘만 연출하면 유후인보다 결코 못하지 않아.”

그렇다. 사실 지금 전국의 뜻있는 지자체나 시민단체에서는 ‘도심재생프로젝트’라 하여 재래시장을 비롯, 낙후된 도심을 살리려는 노력을 부단히 하고 있다. 예컨대 서울 영등포 문래동 철강단지가 지금은 예술인들의 집단 창작촌이 된 경우가 그렇고, 부산의 감천마을, 대구의 김광석거리, 통영의 동피랑마을 등 일일이 예를 들기가 힘들 정도로 많다. 이들 사업의 공통점은 말할 것도 없이 발상의 전환을 통해 스스로의 약점을 강점으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요컨대 ‘낡고 퇴색한 풍경’ 그 자체에 스토리를 입혀 ‘상품’으로 만든 것이다.

내가 보기에 현재 경주의 감은사지 3층석탑․왕의 길․동해구(東海口)․대종천․문무대왕 수중릉 등이 있는 동남부 권역은 전국에서도 제일가는 스토리텔링의 보고(寶庫)다. 그리고 근현대 문화유적들이 산재해 있는 성안마을, 우리 가게 주변도 내 머릿속에는 무궁무진한 이야기들이 피어난다. 아시다시피 대구의 ‘김광석 거리’가 옛날에는 그 무슨 ‘가수 김광석’과 살뜰한 인연이 있었던가. 원래 대구사람인 나도 김광석이 대구출신이라는 걸 안 것은 불과 10년 안쪽의 일이다. 그럼에도 지금은 훌륭한 관광상품으로 변모되어 지역민들의 경제 활성화에도 적잖은 기여를 하고 있지 않은가!

때 묻은 말이지만 ‘꿈은 혼자서 꾸면 단순히 꿈일 뿐이지만 여럿이 꾸면 현실이 된다’라는 말이 있다. 바라건대 부디 나의 꿈이 현실이 되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그리하여 경주가 단순히 역사문화유적들이 즐비한 정적인 관광도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볼거리․먹을거리도 쏠쏠한 활력이 넘치는 관광도시로 거듭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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