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 초겨울의 신라왕경 한복판을 거닐다
[11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 초겨울의 신라왕경 한복판을 거닐다
  • 경주포커스
  • 승인 2016.11.28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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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탐방은 소금강산권역

▲ 첨성대에서 참가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한수원과 함께 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 11월 탐방은  26일 대릉원~첨성대~향교~최씨고택~분황사~황룡사터 등 신라왕경의 한복판을 거닐었다.
11월 탐방 행사는,비가 내릴듯한 초겨울의 다소 궂은 날씨속에서도 38명의 시민들이 참여했다.
대부분 어린이들을 동반한 가족단위 참가자가 많았다.

2016년의 마지막 탐방은 12월24일 소금강산 권역을 탐방한다.
굴불사터 사면불, 백률사, 소금강산 마애삼존불, 헌덕왕릉, 알천수개기 석탈해 왕릉, 표암등을 두루 탐방하는 일정이다.

올해 경주로 본사를 이전한 한국수력원자력(주)이 경주시민들에게 경주 바로 알기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후원하는 <경주사랑 역사문화탐방>은 1회 5천원의 저렴한 비용으로 참가할 수 있다.
탐방은 경주 최고의 답사전문 문화단체인 신라문화원이 주관한다. 문의및 참가신청. 774-1950. 

다음은 11월 탐방 주요유적.

신라 왕과 왕비, 귀족들의 무덤....대릉원

▲ 대릉원에서 박주연 문화재 해설사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대릉원이라는 이름은 "미추왕(味鄒王)을 대릉(大陵:竹長陵)에 장사지냈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서 딴 것이다.
총면적은 12만 5400평으로, 신라시대의 왕·왕비·귀족 등의 무덤 23기가 모여 있다. 고분은 모두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시대만의 독특한 무덤군(群)으로, 크게 다음과 같은 7개의 지역으로 나뉜다.

① 신라미추왕릉(사적 175) ② 경주 황남리 고분군(皇南里古墳群:사적 40) ③ 경주 노서리 고분군(路西里古墳群:사적 39) ④ 신라 오릉(五陵:사적 172) ⑤ 경주 동부사적지대(東部史蹟地帶:사적 161) ⑥ 경주 노동리 고분군(路東里古墳群:사적 38) ⑦ 재매정(財買井:사적 246) 등이다.

천마도장니 출토 '천마총'

▲ 천마총 내부
천마총은 1973년 4월 16일부터 8월 20일까지 발굴조사를 했다. 발굴이전까지는 제155호 고분으로 불렸다.
발굴을 통해 장신구류 8,766점, 무기류 1,234점, 마구류 504점, 그릇류 226점, 기타 796점 등 모두 1만 15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특히 금관(金冠)과 천마도장니(天馬圖障泥)가 발굴돼 세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금관은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시대 금관 가운데 금판(金板)이 가장 두꺼우며 금의 성분도 우수한 것으로 판명되었고 국보 제 188호로 지정됐다.

또한 천마도장니는 천마총 출토품 가운데 세상을 가장 놀라게 한 유품이다. 장니란, 말 양쪽 배에 가리는 가리개로, 흙이나 먼지를 막는 외에 장식물로도 사용됐다. 무덤 내부는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사상최대 규모 지진에도 견딘 '첨성대'

▲ 첨성대
역대최대 규모이 5.8규모의 9.12 경주지진에도 끄덕없이 견뎌내 최근에 새삼 더욱 주목 받은 문화재다.
국보 제31호로 신라시대 천문을 관측하던 곳으로, 석조건물 높이는 9.5m다. 먼저 구조면에서 살펴보면 구조는 아래의 기단부, 술병형의 원통부, 다시 그 위의 정자석정상부로 나눌 수 있다. 기단부 아래의 땅속에는 잡석과 받침돌, 그리고 기단부 서쪽으로는 일렬로 자연석이 놓여 있다. 이 기단부는 남쪽변이 정남에서 동쪽으로 19도정도 돌아서서 있는데, 이 방향은 북두칠성을 바라보는 방향과 일치한다.

또 13단에서 15단에 걸쳐서 정남에서 동쪽으로 약 16도가 되는 방향을 향하여 한 변이 약 95cm 정방형의 창구가 나 있다. 창구의 내부 아래쪽은 잡석으로 채워져 있으며 그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은 형태이다. 19단과 20단, 25단과 26단에 동서남북으로 2개씩의 장대석이 걸쳐 있어 정자를 이루고 있다. 제 27단의 원통부위에는 각 네개씩으로 짜여진 정자석이 두단에 걸쳐서 놓여 있어서 정상부의 사각형을 이룬다.

현재 남쪽면이 정남에서 서쪽으로 약 8도 정도 돌아간 방향을 하고 있다. 석재의 갯수는 종래 365개라고 하여 왔으나, 기단석까지를 포함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달라지므로 정확히 365개는 아니다.
1962년 12월 당시 경주박물관장이던 홍사준선생과 정영호, 유문룡등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기단부를 제외한 1-27단까지가 362매, 지대석 8매, 기단석 12매, 상부정자석 8매, 중간정자석 8매, 남측 문주 2매, 27단의 판석1매로서 도합 401매이다.
기능면에서는 1970년대 초반까지는 대체적으로 천문대 즉 천문관측을 하는 곳으로 이해하여 왔다. 그런데 1974년 이후 불교제단, 기념물, 불교관계 건축물 등의 여러 가지 설과 이견이 속출되었다. 그러나 대체로 학계에서는 이러한 說에 대하여 종전의 전통적인 입장인 천문대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제설들이 나온 배경은 다음과 같다.

신라궁궐 '월성'

▲ 월성
월성은 안압지 동남편에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왕궁이었으며 사적 제16호인 신월성이 있다. 흙과 돌로 쌓은 도성으로 현재 부분적으로 성벽과 건물지가 있다. 이러한 신월성은 경주 시가지를 중심으로 보아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주시 인왕동 449-2번지이다.

문천(사천) 북안의 낮은 언덕을 연결하고 자연지세를 최대한 이용해 성벽을 쌓았기 때문에 성곽의 형태가 반월형을 이루고 있다. 동서, 북쪽은 낮은 12개의 산봉을 연결하여 쌓았고 남벽은 자연지세를 많이 활용하여 쌓았는데 지형이 단애를 이루기 때문에 거의 성벽을 쌓지 않았다. 성벽 기저부까지 문천의 물이 와 닿고 있다. 성안의 전체적인 지세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으며 성안지반의 높이는 성밖보다 약 7m가 높고 남천을 접한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세 성벽은 약간 높은 언덕과 같이 토루가 둘러져 있다.
현재 성벽 중 가장 높은 곳은 박물관과 연접한 곳에 있는 동남쪽으로 약 10-18m가 된다. 성의 규모는 동서 860m, 남북 250m, 성 전체둘레는 1841m, 면적은 1830.600m2이다.
일제강점기와 1979년과 1980년에 부분적인 발굴은 한 바 있으며, 2013년 신라왕경핵심유적 복원정비사업이 확정되면서 본격적인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월성안에는 남문과 정문격인 귀정문, 북문, 인화문, 현덕문, 무평문, 준례문 등의 문과 월상루, 망덕루, 명학루, 고루 등의 누각, 왕이 정사를 보던 남당. 신하의 조하를 받고 외국사신을 접견하던 조원전, 양궁, 사량궁, 대궁을 관할하던 새성등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그 흔적만이 남아 있다.

김알지 신화 간직한 계림

▲ 계림
경주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난 곳으로 사적 제19호다.
시림(始林)이라 하던 것을 김알지 탄생의 상서가 있은 뒤로 계림(雞林)이라 부르고 마침내는 나라이름으로 하였다.

탈해왕 9년(65년)에 왕은 밤에 금성 서쪽 시림 숲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신하를 보내어 이를 살펴보게 하였다. 사자가 시림에 이르러 보니 금빛으로 된 조그마한 궤짝 하나가 나무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으므로 돌아와 그 사실을 아뢰었다.

이에 왕은 사람을 시켜 그 궤짝을 가져오게 한 다음 궤를 열어보니 그 속에는 얼굴이 총명하게 생긴 어린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아이가 자람에 따라 아주 총명하고 지력이 많았는데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그 금궤 속에서 나왔으므로 성은 김씨라 하였다. 그리고 시림을 고쳐 계림으로 이름을 바꾸고 또한 나라이름으로 하였다.

13대 미추왕 이후 신라의 왕은 대부분 김씨족에서 왕위를 계승했는데 계림은 시조 탄강지로써 더욱 숭앙되었다. 지금 숲 가운데 비각이 하나 있는데 그 안에 있는 비는 조선시대인 1803년(순조3년)에 세운 계림에 관한 비이다.

신라 국학자리에 세운  '경주향교'
신라 제31대 신문왕 2년(682년)에 최초로 국학을 세워 주역, 상서, 모시, 예기, 춘추, 좌씨전, 문선, 논어, 효경등을 가르키던 교육기관을 두었는데 그 자리가 지금의 향교자리라 한다.
향교는 고려시대 이후 향학으로 되었는데 현재 향교의 창건년대는 미상이나 고려시대 때 현유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 창건 되었다.
그 뒤 1492년(조선 성종 23)에 경주 부윤 최응현이 중수하였고 임진왜란때 대성전이 소실되어 위패를 안강의 도덕산 두덕암으로 옮겼었다.
전쟁후 전사청을 중건하고 위패를 환안하였다.

1614년(광해군 6)에는 부윤 이안눌이 명륜당을 중수하고 동서 양곁채를 중건하였으며 1668년(현종 9)에 보수하였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1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 명륜당, 동무, 서무, 전사청, 내신문등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대성전에는 5성과 송나라 6현,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전답과 노비 전적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다.이 건물에 이용된 초석과 축대석은 안압지주변 건물지에서 옮겨온 것이다.

최씨고택

▲ 최씨고택
경주의 월성 서편에는 교동(校洞)이라는 마을이 있다. 신라때 국학이라는 학교시설이 있었던 마을이며, 지금의 경주향교가 그 터라고 알려진 유서 깊은 마을이다. 또 마을 끝자락에는 월정교라는 신라시대의 석교(石橋) 터가 전하는데, 학교 교육에서는 효불효교로 더욱 유명한 다리이며, 최근 신라시대의 모습으로 복원하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과연 신라시대의 원형을 복원할 수 있을지 의문은 되지만, 역사 유적을 복원하여 후손들에게 전해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의미를 갖기에 충분하다.

이 유서 깊은 마을에는 ‘경주 최부자집’으로 널리 알려진 최씨의 종가도 있는데, 신라시대 요석궁이 있던 자리라고 전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교동은 이 최부자집을 비롯한 몇 채의 한옥들이 마을의 유구한 역사를 이야기해 주는 곳이자 흙담에 기와를 얹은 담장들이 아름답고 인상적인 동네다. 나는 이 마을에 다니면서 담장을 바라보는 버릇이 생겼다. 담장에는 흙과 함께 신라시대의 기와조각, 토기조각, 그리고 조선시대 도자기조각 등 많은 역사 유물이 함께 담장 흙에 쌓여 있다. 담장에만 유물이 있는 것은 아니다. 최씨고택 안마당에는 신라시대 절터나 건물터에서 사용했을 법한 주춧돌과 장대석 등 많은 석조물이 조경석으로 사용되고 있어서 이 또한 즐거운 감상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박물관 다음으로 즐겨 찾는 장소가 되어버렸다.

마을 안쪽 넓은 골목길 안쪽에 경주최씨 종가댁과 소종가의 대문이 시선을 가로막는다. 종가댁은 현재 9대째 대대로 살고 있으며, 1700년경 이 가옥을 지었다고 하지만 확실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지금 집을 지키는 이는 종손이 아닌 관리인이며, 옆집인 소종가는 교동법주라는 전통주를 대(代)이어 생산하고 있다.

교동에는 여러 채의 기와 고택이 있는데, 경주최씨들의 터전이다. 고택과 고택 사이의 골목길에 현대식 건물들이 난립하여 정신이 없던 것을 최근에 정비하였다. 이제는 기와집과 향교 등의 고택들만 남아 경주의 새로운 답사 명소로 거듭나고 있다.

이 마을에서 역시 으뜸인 것은 경주향교의 건축물이고, 살림집으로는 경주최씨 종가댁과 소종가의 고풍스러 기와집이다. 경주최씨 종가댁은 사랑채, 안채, 대문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대문채(문간채)는 중요민속자료 제27-1호로 지정되었으며, 작은 방과 큰 곳간이 있다. 문간채에는 솟을대문을 두고 청지기방을 비롯한 네 칸의 곳간이 딸려 있다. 곳간마다 문의 모양과 크기가 다른데, 이는 모양에 따라 넣는 물건도 달랐음을 짐작케 한다. 외형적으로도 모두 단순하고 똑같은 크기와 모양이 아니어서 변화에 따르는 다양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경주 교동최씨고택 [慶州崔富子屋] (한옥의 미, 2010. 7. 15., 경인문화사)

분황사
경주시 구황동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 말사이다. 전불시대(前佛時代)의 가람터라고 전하는 칠처가람(七處伽籃)중의 하나로서 634년(선덕여왕 3년)에 용궁(龍宮)의 북쪽에 건립되었다.
643년에 자장이 당나라로부터 대장경 일부와 불전(佛殿)을 장식하는 번(幡)·당(幢)·화개(花蓋) 등을 가지고 귀국하자 선덕여왕은 그를 분황사에 머물게 한 뒤 많은 급여를 내리고 호위를 붙이는 등 대접이 극진하였다.

특히 원효는 이 절에 머물면서 『화엄경소(華嚴經疏)』, 『금광명경소(金光明經疏)』 등의 많은 저술을 남겼고, 그의 교학을 이 절을 중심으로 널리 펴게 됨에 따라 분황사는 법성종(法性宗)의 근본 도량이 되었다. 또 원효가 죽은 뒤 아들 설총은 원효의 유해로 소상을 만들어 이 절에 안치하고 죽을 때까지 공경하고 사모하는 뜻을 다하였는데, 언젠가 설총이 옆에서 절을 하자 소상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때까지는 원효의 소상이 남아 있었으며, 그 때까지도 소상이 고개를 돌린 채로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이 절에는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이 있었고 좌전 북쪽벽에 었었던 천수대비 그림은 영험이 있기로 유명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약사여래 입상을 모신 보광전과 승당, 종각등이 있으며 문화재로는 국보 제30호인 분황사 석탑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재97호인 화정국사비대좌,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호인 석정등이 있다. 이 중 석탑은 원래 9층이었으나 현재 3층만이 남아있는 모전탑으로써 임진왜란 당시 왜구들이 이 탑을 반쯤 헐었다고 한다.
뒤 절의 승려들이 탑을 다시 쌓기 위하여 헐었더니 바둑알만한 작은 구슬이 출토되었는데, 그 구슬은 수정처럼 빛나고 투명하였으며 태양을 쪼여 솜을 가까이 대면 불길이 일어났다고 한다. 당시 이것을 백률사에 보관하였다. 화정국사비의 비편은 지금도 가끔씩 발견되고 있는데, 비신을 바쳤던 비대는 절 근처에서 발견되어 김정희가 이를 확인하였다. 현재의 비대에는 '比新羅和靜國師之碑蹟'이라고 쓴 김정희의 친필이 음각되어 있다.

또 탑옆에 있는 석정은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이라고 불리는 신라시대의 우물이다. 우물틀의 외부는 팔각, 내부는 원형인데, 이것은 불교의 팔정도와 원융의 진리를 뜻한다. 이 우물에는 세마리의 호국 용이 살고 있었는데 795년(원성왕 11)에 당나라의 사신이 용을 세마리의 물고기로 변신시킨 뒤 잡아서 길을 떠났다. 하루 뒤에 두 여인이 원성왕 앞에 나타나서 사실을 아뢴뒤 남편을 찾아 줄 것을 호소했다.

왕이 사람을 시켜 당나라 사신을 쫓아가서 빼앗아다 우물에 놓아주고 다시 살게 하였는데, 그 뒤부터, 삼룡변어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밖에도 이 절에는 석등·대석과 많은 초석들이 남아있으며, 1974년 발굴조사에서 금동보살입상과 귀면와, 신라 및 고려시대의 와당등이 발견됐다.

분황사석탑

▲ 분황사석탑
분황사경내에 있는 신라시대의 석탑. 높이 9.3m 국보 제30호이다. 돌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으로서 634년(선덕여왕 3년) 분황사의 창건과 동시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몇 차례 보수되어 어느정도까지 원형이 남아 있는지는 알수 없다.
기단은 한변 약 13m, 높이 약 1.06m의 막돌로 쌓은 토축단층기단인데, 밑에는 상당히 큰 돌을 사용하였고 탑신 밑이 약 36cm 높아져 경사를 이루었다. 기단위에는 네모퉁이에 화강암으로 조각한 사자 한마리씩을 배치하였는데, 두마리는 수컷 두마리는 암컷이라 하기도 한다. 현재 탑신부는 3층까지 남아있으며 회흑색의 안산암을 작은 벽돌모양으로 잘라서 쌓았는데 위의 폭이 아래폭보다 약간 좁다.

탑신 사면에는 입구가 뚫려져 있는 감실을 개설하고 입구 좌우에 거의 원각에 가까운 인왕상을 배치하였으며 두짝의 돌문을 달아 여닫게 하였다. 인왕상은 모두 8구로써 조각의 형태는 인간화가 꽤 많이 진전되었으나 얼굴이나 신체등에서 형태의 불균형한 면을 보이는 등 추상화된 면이 남아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인왕의 역강한 힘을 느끼게 하는 조각으로서 7세기 조각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금 감실안에는 머리가 없는 불상을 안치하고 있으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초층탑신 4면에 감실을 개설한 예는 미륵사지 석탑에서 초층탑신 4면에 통로를 개설하고 그 중심에 찰주를 세운 점과 상통하며 이러한 형식은 목탑에서 초층탑신 내부가 공간이 되고 4면에 내부로 통하는 문을 개설하는 형식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층과 3층 탑신은 초층에 비하여 높이가 현저하게 줄어서 장중한 감을 준다. 옥개석은 벽돌한장의 두깨로 처마를 삼고 아래 위에 탑신을 향하여 감축되는 받침과 낙수면 층단이 있다. 받침은 초층부터 6단, 6단, 5단이며 낙수면 층단은 초층과 2층이 10단이고 3층 상면은 층단으로 방추형을 만들었으며, 그 정상에는 화강석으로 된 앙화만이 남아있다. 동경잡기에 의하면, 임진왜란때, 왜병에 의하여 허물어지고 그 뒤 분황사의 중이 개축하려다가 또 허물어 뜨렸다고 하나 그 실상은 알 수 없다. 1915년 일본인들이 해체, 수리하였는데 현재의 상태는 이때의 현상되로 복원한 것이다.

이 때 제2층과 제3층 사이에서 석함 속에 장치되었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각종 옥류와 패류, 금은제의 바늘, 침통, 가위 등과 함께 숭녕통보·상평오수 등 고전이 발견되어 고려 숙종내지 예종연간에 개탑되었음을 말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지금 분황사 경내에는 이 탑을 수리할 때 남은 석재가 따로 보관되어 있어 지금의 모습이 창건당시의 형태가 아님을 알 수 있으며 『동경잡기』에는 분황사 9층탑이라고 되어있으나 그대로 믿을 근거가 못된다.

황룡사터

▲ 황룡사터에서.
사적 제6호. 황룡사는 진흥왕이 7세에 왕위에 올라 나이 21세 되던 553년에 월성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게 하였으나 그곳에서 황룡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사찰로 고쳤다. 그로 인해 황룡사라 하였다. 553년에 짓기 시작하여 569년에 일단 사찰의 건물배치가 완료된 것 같다. 그 뒤 574년에 5m가 넘는 주존불을 비롯해서 금동삼존불을 만들고 이 삼존불을 모시기 위한 금당을 10년 후인 584년(진평왕 6)에 세웠다.


선덕여왕은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 온 자장의 권유로 구층탑을 건립하게 되는데 당시 신라인의 기술로는 어려워 백제의 장인 아비지를 초청해 용춘이 신라 장인 200명을 인솔하여 645년에 완공하였다. 탑신부 약 65m, 상륜부 15m로 전체 80m에 달하는 구층목탑이 완성됨으로써 4대왕 93년간에 걸친 대역사가 마무리되어 명실공히 국찰로써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신라 3보 중 장육존상과 9층탑이 이곳에 있었고, 화성 솔거가 그린 금당벽화도 여기에 있었다. 또한 강당은 자장이 보살계본을 강의한 곳이고 원효가 금강삼매경론을 연설한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역대의 왕은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이 강당에 친행하여 100명의 고승이 모여 강론하는 백고좌강회를 열어 불보살의 가 호를 빌었다.

9층탑은 완성된지 50년 뒤인 698년(효소왕 7)에 벼락을 맞고 불탄 이래 다섯차례의 중수를 거듭하였으나 1238년(고종 25)에 몽고군의 병화로 가람 전체가 불타버린 참화를 겪은 뒤로는 중수되지 못하고 있다. 특히 경문왕 12년에는 탑을 헐고 새로 세웠는데 그 내용을 찰주본기에 적어 외함에 넣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라 문성왕대에 이르러 이 대탑이 동북으로 기울어지므로 염려하여 재목을 모은지 30여년이 지나도록 고치지 못하였는데 경문왕 11년에 이르러 옛것을 헐고 새롭게 만들도록 하였다. 철반 위에는 무구정경에 따라 소석탑 22기를 안치하였으며 그 소탑마다 사리 1과와 다라니 4종을 넣고 다시 경전과 사리 1구를 함께 봉안하였다.

이 후 경애왕 4년(927) 탑이 북쪽으로 재차 기울어졌으며 고려 광종 5년(954)에 재앙을 입어 현종 3년(1012)에 경주의 조유궁을 헐어 그 재료로 탑을 수리하였다. 그 이후에 3차에 걸친 중수를 하였다.

그리고 이 탑의 중요한 특징은 9층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다.
현재 목탑의 각 초석은 각변 약 1m 내외로 사방에 8개씩 질서정연하게 놓여있는데 중앙에 심초석이 놓여있다. 심초석 위에는 육중한 돌이 있는데 1964년 12월에 도굴꾼들에 의하여 그곳에 있던 사리함을 도난당하는 일이 있었다. 2년 뒤 우여곡절 끝에 도굴단의 적발과 함께 사리함을 회수하였는데 이 유물들을 통하여 탑에 얽힌 역사는 확실하게 입증되었다. 또한 정면 9칸 측면 4칸의 법당인 금당 안에는 장육의 석가여래삼존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10대제자상과 사천왕상과 2구의 신장상이 있었다.

이에 따른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인도의 아쇼카 왕이 철 5만 7천근과 황금 3만분을 모아 석가삼존불을 주조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고 인연있는 국토에 가서 장육존상으로 이루어질 것을 발원하였으며 1불과 2보살의 모형까지 실어 보냈다.

울산만에 도착한 금과 철을 동축사에 모셔 두고 있다가 경주로 실어와 574년(진흥왕 35) 3월에 장육존상을 주조 하였는데 무게는 3만 5천 7근으로 황금이 1만 198분이 들었고 두 보살은 철 1만 2천근과 황금 1만 136분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또한 1238년 몽고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었고 현재는 금당터에 자연석대좌만 남아있다. 이밖에도 이 절에는 성덕대왕신종보다 무게 4배나 크고 17년 앞서 주조된 종이 있었다는 『삼국유사』에 기록이 전해오고 있지만 이 종도 몽고군의 병화 때 없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황룡사터에 대한 발굴 조사는 1970년대에 들어서 본격화 되었다. 발굴 조사 결과 당초 늪지를 매립하여 대지를 마련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사찰의 건물배치는 남문, 증문, 탑, 금당, 강당이 남북으로 배치된 이른바 1탑식 가람배치를 기본으로 하고 탑의 전방으로 좌우에 대칭되게 건물을 세워 종루와 경루를 마련하였음이 확인되었고 금당의 좌우에 거의 같은 규모의 건물을 나란히 세워 금당의 성격을 갖게 했다. 또한 강당의 좌우에도 독립된 건물을 배치하였음이 밝혀졌고 동서남북으로 마련된 회랑이 서로 연결되지 않고 독립된 상태였음이 확인되었다.

이밖에도 발굴 조사 결과 이 절이 그 규모에 있어서도 동양 최대의 사찰이었음이 확인되었고 9층목탑 또한 그 존재를 확인하게 되었다. 또한 목탑지의 심초석 아래에서 발견된 백자의 작은 항아리는 당나라의 작품으로 밝혀져 당시의 문물교류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그리고 높이 182cm, 최대 너비 105cm되는 대형의 치미는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아직까지 발견된 예가 없어 동양 최대의 치미라 할 수 있으며 아울러 이러한 치미가 사용된 건물의 웅장함을 짐작할 수 있다.
최근 개관한 황룡사 역사문화관에서 황룡사에 대해 좀더 상세한 안내를 받을수 있다.

▲ 황룡사 역사문화관에서 전시품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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