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차 경주시경계탐사] 가볼만한 곳 ③원성왕릉-신라 왕릉 중 가장 화려하고 완벽한 모습
[제5차 경주시경계탐사] 가볼만한 곳 ③원성왕릉-신라 왕릉 중 가장 화려하고 완벽한 모습
  • 경주포커스
  • 승인 2023.05.31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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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성대. 신라문화 동인회부회장. 교사. 

 

원성왕릉 ⓒ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
원성왕릉 ⓒ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
김성대
김성대

원성왕릉은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있다. 원성왕릉은 신라 제38대 왕인 원성왕(김경신, 785~798)의 능이다. 김경신이 왕으로 등극하는 과정은 신라사에서 드라마와 같은 이야기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전하고 있다. 이 이야기의 배경에는 당시 김주원과 김경신의 치열한 정치적인 관계를 잘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덕왕(宣德王)이 세상을 떠나매, 나라 사람들이 김주원을 왕으로 받들어 장차 궁중으로 맞아들이려 했다. 그의 집은 북천 북쪽에 있었는데 홀연히 냇물이 불어나 건널 수가 없었다. 이에 왕이 먼저 궁궐로 들어가 왕위에 올랐다.  -삼국유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

▪선덕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상대등이 되었다. 선덕왕이 죽었는데 아들이 없자, 여러 신하들이 회의를 한 후에 왕의 집안 조카인 주원(周元)을 옹립하고자 하였다. 주원의 집은 서울에서 〔왕궁으로부터〕 북쪽으로 20리(里) 떨어진 곳에 위치였는데, 마침 큰비가 와서 알천(閼川)의 물이 넘쳐 주원이 알천을 건너 〔왕궁으로〕 오지 못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왕[人君]은 큰 자리라 진실로 사람이 도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 갑자기 비가 쏟아진 것은 하늘이 혹시 주원을 왕으로 세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 상대등 경신은 전왕의 동생으로 평소 덕망이 높고 왕의 자질이 있다.“라고 하였다. 이에 여러 사람의 뜻이 모아져 경신이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그치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만세를 외쳤다. -삼국사기/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사기』에는 원성왕이 죽자 봉덕사 남쪽에서 화장하였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15년간 다스렸으며 능은 곡사에 있으니 지금의 숭복사라고 하였다.

현재 말방리에는 숭복사 터가 남아 있으며 그곳에 최치원에 지은 숭복사 비명이 남아 있다. 숭복사비명(896년)을 확인해 보면 ‘김원랑’이 절을 세웠는데 고니 모양의 바위가 있어 곡사라 하였다. 원성왕이 돌아가시자 곡사를 지금의 숭복사로 옮기고 그 자리에 왕릉을 조성했다. 곡사는 옮긴 후 숭복사(885년)로 절 이름을 바꾸고 원성왕의 명복을 비는 절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신라 멸망 이후 사람들에게 원성왕릉의 존재는 잊힌 것 같다.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전에는 괘릉이나 원성왕릉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인 1669년에 발행된 『동경잡기』에서 처음으로 괘릉을 기록하면서 원성왕릉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그 이후로도 경주지역 지리지인 『동경잡기(1711년)』, 『여지도서(1760년)』 『경주읍지(1933년)』, 『금오승람(1935년)』을 통해 괘릉으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또 1933년에 발행된 『경주읍지』에서는 괘릉을 원성왕릉으로 추정한다고 하였다.

괘릉: 경주부 동쪽 35리에 있다. 누구 왕릉인지 모른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물 속에 장사를 지내고 관을 돌 위에 걸어놓고 흙을 쌓아 능을 만들었다.

한때는 문무대왕릉으로 부르기도 했다. 조긍섭(1873~1933)의 『암서집』에서 괘릉은 문무왕릉으로 추정하기도 하였다.

<조긍섭의 암서집>

掛陵 或稱文武王陵。然按史文武王將薨 按史文武王將薨,遺命火葬東海上,~생략~ 而新羅諸王功德之盛,無如武烈、文武父子,武烈旣自有大龜之陵,則謂此爲文武陵,固亦相傳之可信者。 -한국고전종합DB-

‘삼산오악학술조사단’에 의해 지금의 문무대왕릉이 1967년에 확인되면서 다시 괘릉으로 부르고 수년간 안내되었다. 1973년부터는 삼국유사를 근거로 원성왕릉으로 추정하였으며 숭복사 비명 연구 성과를 통해 2011년 원성왕릉으로 확정되었다.

원성왕릉은 신라 왕릉 중 가장 화려하고 완벽한 모습을 갖추었다. 당시 신라가 당나라뿐만 아니라 서역과도 활발한 문물교류를 하였음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이다.

입구에는 화표석, 좌우에 이국적인 모습이며 역동성을 가지고 있는 석인상 4구, 제각각 바라보는 방향이 다르고 모습도 달라 생동감이 넘치는 돌사자 4구, 혼유석, 능 둘레에는 통일 신라 시대 고분에만 나타나는 12지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렇게 배치한 석상들의 힘찬 조각 수법과 생동감 넘치는 조각 수법은 능의 엄숙한 분위기를 만들 뿐만 아니라 당시 신라인의 문화적 독창성과 예술적 감각을 여지없이 보여 주고 있다.

▶원성왕릉-http://kko.to/9quUF2xrho
 

A표시가 원성왕릉.
A표시가 원성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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