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차 경주시경계탐사] 가볼만한 곳 ②홍씨일문양부인열행비-호랑이 때려잡은 부인들의 이야기
[제5차 경주시경계탐사] 가볼만한 곳 ②홍씨일문양부인열행비-호랑이 때려잡은 부인들의 이야기
  • 김종득 기자
  • 승인 2023.05.31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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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씨일분양부인열행비 비각. 왼쪽에는 남양홍씨세천이라고 쓴 큰 바윗돌이 서 있다.
홍씨일문양부인열행비 비각. 왼쪽에는 남양홍씨세천이라고 쓴 큰 바윗돌이 서 있다.

경주시 외동읍 방어리 35번지.
마을 입구에 남양홍씨세천(南陽洪氏世阡)이라는 글씨를 한자로 새겨놓은 큰 돌옆에 돌과 흙으로 만든 담에 둘러쌓인 비각이 하나 있다.
남양홍씨 집성촌이기도 하고, 조선시대 경주 울산을 잇는 큰 길가에 원사(院舍)를 지어 식량과 취사도구, 신발등을 두고, 행인에게 제공해준 원(院)이 있었으므로 원골, 원곡, 원동이라 부르는 자연부락 입구다.

비각 속에는 홍씨일문양부인열행비(洪氏一門兩夫人烈行碑)라는 비석과 기문, 상량문, 정렬각, 1729년 정려받은 ‘열녀 홍계발 전처 김씨지려와 열녀 홍계발 정씨지려를 쓴 5개의 현판이 있다.
홍일문이라는 사람의 2명 부인의 훌륭한 행실을 기리는 비와 그 비석을 보호하기 위한 비각(碑閣)이 있고, 작은 출입문이 있다.

정렬각 정문(旌門)은 훼손된채 방치돼 있다.
정렬각 정문(旌門)의 문 한짝은 떨어져 나갔다.

예전에 충신 효자 열녀등을 기리기 위해 그 동네에 정문(.붉은문) 세워 표창하던 것을 정려(旌閭)라고 했으니 정려각으로 불러야 할 것 같지만, 비각안에 정렬각(旌烈閣)이라는 현판이 있으니 기자는 정렬각으로 쓴다. 
정려와 효열을 합친 말이 정렬각이고,이 비석이  두 부인의 열행을 칭찬하는 것이므로 정렬비로 불러도 무방할 것도 같다. 

경주풍물지리지(김기문 편저)에는 ’조선 영조때 홍계발(홍일문)의 처 경주김씨와 후처 나주정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영조5년(1729년)에 정려하고, 그 다음해에 비각을 세웠다‘고 한다. 홍계발 부인 2명의 훌륭한 행실을 1729년에 칭찬하고 그다음해에 비각을 세웠다는 뜻이다.

이어서 전해오는 이야기도 실었다. 다음은 경주풍물지리지의 내용.

  김씨와 정씨는 남편이 병들자 병구완을 하며 김쌈을 하고 있는데, 어느 여름날 호랑이가 나타나 남편을 해치려는 것을 보고, 김씨는 홑이불로 호랑이를 덮어      씌우고, 정씨는 방망이로 호랑이를 때려잡아 남편을 구했다고 한다.

정렬각을 세운 것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294년전, 당시만해도 조선시대 한반도에는 호랑이가 많았다고 하니, 사람이 사는 마을까지 호랑이가 내려올수는 있었겠다.
그렇다고 여성 2명이 맨손이나 다름없는 방망이로 호랑이를 때려 잡았다?
아무래도 좀 과장이 심한 듯 싶지만, 나라에서 부인의 행실을 칭찬하는 비각까지 세웠으니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을터다.
호랑이까지는 아니었더라도 위해를 가하려는 무언가 모를 맹수가 집으로 왔고, 이를 두명의 부인이 힘을 합쳐 물리친 것일까?
그도 아니면 두명의 부인이 병든 남편을 극진히 보살피는 것을 본 이 마을 남정네들 혹은 고을원님이 지극히 남성중심의 시각에서 두 부인의 행실을 칭찬하고 싶어서 꾸며낸 말은 아닐까....?

열행비.
열행비.

비각안에 있는 비석은 1910년에 세운 것이다. 그 비석의 내용은 마을 사람들에게 전해오는 이야기와는 조금 다르다.
비문 해석은 오상욱 경북고전번역연구원장이 2020년11월26일 경주신문에 연재한 글에서 옮긴다.

  부인의 직분으로 하루는 베를 짜는데, 밤이 이미 깊었다. 남편은 평상에 누웠고, 마침 사나운 호랑이가 포효하며 갑자기 마당안으로 들어와 남편을 해치고자   했 다. ...즉시 이불로 호랑이를 덮어 날카로운 아가리를 막았다. 한명은 부엌칼로 호랑이를 찌르고, 한명은 절굿공이로 호랑이를 내리쳤다. 칼날의 빠르기가 새   와 같이 빨랐고, 절굿공이를 내려치기가 순식간이었다.이에 호랑이가 앞에 쓰러지고 남편을 위기에서 구하였다. 다음날 이웃마을 사람들까지 모두 모여 이들을   칭송하였고, 가죽은 벗겨서 관(官)에 주었다.

두 부인이 마당에 나타난 호랑이를 보고 급히 이불로 호랑이를 덮었고, 한명은 부엌칼로 호랑이를 찌르고, 한명은 절굿공이를 호랑이를 내리쳤다는 내용이다.|
비문내용도 전해오는 이야기처럼 황당하기는 매 한가지다. 그러나 호랑이를 잡는 대목은 마을 전설보다는 훨씬 구체적이다. 리얼리티를 강화하는 쪽으로 진일보 한 셈이다.

오 원장의 해석에 따르면 부윤 청음 김씨유가 칭송하는 시를 지었다는 내용도 있다. 그리고 정려각은 화재로 소실돼 후손들이 고쳐 세우고 기문과 상량문도 걸었다는 내용도 있다. 이 비석은 1910년 11월 여강 이채원이 짓고 함안 조원규가 쓴것이라고 오 원장은 풀이했다.

비문을 쓴 1910년은 정려를 받은 시점으로부터 181년이 흐른 뒤였다.
마을에서 전해오는 내용이 아무래도 좀 과장이 심했다 싶어 리얼리티를 보강해서 비문을 쓴 것이 아닐까 싶다가도 부윤이 시를 지었다는 내용까지 들어가 있는것을 보면 영 터무니 없는 일은 아니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작은 비각하나를 보며 별별 생각이 든다.
이런것이 이야기가 가진 힘이 아닐까?

경주에 산재한  수많은 비. 각 가운데 여성2명이 맹수중의 맹수 호랑이를 때려잡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것은 이 비각이 유일하다.
‘일부일처제가 확립된지 오래고, 남녀가 평등한 시대에 전처 후처 합해서 부인 2명의 이야기라니...’라고  타박할 이도 없지 않겠지만 이야기가 가진 힘을 잘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할때가 아닐까?

비각 옆에는 2005년 경주시지정 친환경마을을 기념해 마을의 유래와 지도를 그린 안내판이 그 기능을 다한채 볼썽 사납게 서 있다. <사진아래>
그 쓸모없이 흉물스럽게 서있는 안내판에 호랑이 때려잡은 부인 이야기 그림이라도 새롭게 그리는게 훨씬 나을 듯 싶었다.
 

비각옆 경주시지정 친환경지정기념 안내판.
비각옆 경주시지정 친환경지정기념 안내판.

▲가는길.

열행비 인근에 육의당, 영지, 원성왕릉이 있다.
열행비 인근에 육의당, 영지, 원성왕릉이 있다.

열행비 인근에는 가볼만한 곳이 많다.
주변 볼거리로 소개한 육의당과 원성왕릉은 물론 석가탑, 아사달 아사녀의 아픈 사랑이야기가 있는 영지도 지척에 있다.  
육의당과는 직선거리로 2.4㎞, 영지와는 1㎞ 거리다. 원성왕릉과도 불과 2㎞ 남짓이다. 
자동차를 이용하면 좀 여유있게 하루종일 둘러봐도 괜찮을 만큼 신라에서 조선까지 고루 고루 볼거리와 이야기가 있다. 
제내리에서 영지방향으로는 둘판으로 나 있는 2차선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이동하다 만날수도 있고, 7번국도 울산방향으로 향하다,  영지쪽으로 우회전한뒤 영지초등학교를 지나면 만날 수 있다. 
육의당과 마찬가지로 시내버스는 603번, 604번 버스가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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