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차 경주시경계탐사] 경주시경계 네번째 읍면 산내면, 경주 서남쪽 끝 '산속고을'
[제10차 경주시경계탐사] 경주시경계 네번째 읍면 산내면, 경주 서남쪽 끝 '산속고을'
  • 김종득 기자
  • 승인 2023.10.29 15: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주시에서 인구수는 하위3위...노인인구 비율 53.3% 경주시에서 가장 높아
경주시산내면 위치도
경주시산내면 위치도

 

산내면 전체지도(노랑선)
산내면 전체지도(노랑선)

2023년 1월 경주시 양남면 수렴리 지경마을에서 시작한 경주포커스 주관 경주시 경계탐사는 그동안 외동읍, 내남면을 거쳐 10월부터 산내면으로 접어든다.

경주시 산내면은 경주시에서 약 26km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9개 법정리와 68개의 자연부락, 19개 행정리, 68반으로 전체면적 143.03㎢중 임야면적이 전체의 약 83%를 차지하는 해발200-550m 고지대 산간 지역으로 밤낮의 일교차(5~7℃)가 심한 지역이다. 
지리적으로는 남쪽으로 울산시 상북면과 연접하고, 동남쪽엔 내남면, 서쪽으론 청도군 운문면, 북쪽으로는 영천시 북안면과 이웃하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보면 산내면은 대현리와 울주군 상북면 소호리가 경계하는 것을 비롯해 울주군 상북면 궁근정리를 지나면서 청도군과 이웃한다.
산내면 대현리가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와 이웃하고 있으며, 산내면 일부리는 청도군 운운면 오진리, 산내면 신원리는 청도군 운면면 공암리, 산내면 내칠리는 청도군 운문면 지천리, 산내면 상리는 청도군 운문면 봉하리 마일리, 영천시 북안면 당리 등과 경계를 하며 길게 이어진다.

경주시에서는 서면, 건천읍, 내남면과 이웃한다.  
산내면 상리가 서면 천촌리, 감산리가 건천읍 송선리, 내일리가 내남면 비지리, 대현리가 내남면 박달리와 인접해 있다.
낙동강 상류인 동창천이 면 중심을 관통하고 대구시민의 식수원인 운문댐 상류에 위치해ㅐ 산천어, 꺽지, 피라미, 빙어 등 민물고기가 많은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고장이다.

1896년 13도 시행때부터 '산내면'
산내면은 조선시대 태종(太宗) 13년 계림부(鷄林府)를 경주부(慶州府)로 개칭했는데 지역은 경주부에 속했으며, 고종(高宗) 32년 전국8도를 23부로 개편할 때 경주군(慶州郡) 서산내면(西山內面)으로 개칭됐다가 그 이듬해 광무원년(光武元年, 1896) 13도(道) 제도 시행으로 경주군 산내면으로 개칭됐다.

1914년 4월 1일 면제실시(面制實施) 행정구역 개편때 경주군 산내면 9개 리동으로, 1943년에는 9개 리동이 분동(分洞) 되어 19개 리동으로 됐다. 이때 내남면 박달리 일부와 울산군 두서면 소호동 일부를 병합했다.
1995년 1월 1일 경주시와 경주군의 통합으로 경주시로 산내면으로, 2020년 3월 3일 대현3리가 대현3리와 대현4리로 분동되어 20개 리동이 됐다. ①감산리 ②내일리 ③내칠리 ④대현리 ⑤신원리 ⑥외칠리 ⑦우라리 ⑧의곡리 ⑨일부리 9개의 법정리가 있다.

경주시 23개 읍면동 가운데 인구수는 하위 3위 규모...노인인구 비율은 가장 높아

TV프로그램으로 유명세를 타면서 핫플레이스로 등극한 화랑의 언덕
TV프로그램으로 유명세를 타면서 핫플레이스로 등극한 화랑의 언덕

산내면 전체면적은 142.55㎢, 인구수는 2023년9월말 현재 남 1598명, 여 1616명 등 총 3214이다.
경주시 전체인구(248,244명)의 1.3%이며, 보덕동(1678명) 서면(3214명)에 이어 23개 읍면동 가운데 하위 3위 규모다. 
세대수는 2055세대. 세대당 인구는 1.56명이다.
만65세 이상 노인인구는 1713명으로 전체 주민수의 53.3%를 차지해 경주시 23개 읍면동 가운데 노인인구 비율이 가장 높다.
경주시 노인인구 평균 25.7%의 2배가 넘는 비율이다.

이른 봄에 생산되는 곤달비는 봄내음 가득한 향기로 소비자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청정지역에서 잡은 물고기로 요리하는 매운탕 가게도 많이 있다.
1980년대 지역에서 방목해 키우던 산내 한우를 지역 특산물로 알린 ‘산내불고기단지’를 조성해 큰 호황을 누렸으며 지금도 ‘산내한우불고기’를 맛보기 위해 사람들이 찾는다. 동창천을 따라 대현리에는 곳곳에 캠핑시설이 들어서면서 여름에는 특히 외지 방문객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특히 몇년전 한 인기 걸그룹이 다녀간뒤 유명세를 타면서 화랑의 언덕은 사진촬영을 하기 위해 젋은 층이 많이 찾는 곳으로 급변했다. 

면소재지 의곡리 

18세기 중엽에 제작된 영남지도-경주부 부분 ⓒ경주의 옛지도
18세기 중엽에 제작된 영남지도-경주부 부분 ⓒ경주의 옛지도

산내면 소재지 의곡리에는 산내중학교, 의곡초등학교, 우체국, 행정복지센터 등 각종 편의 시설이 있다.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이 마을에 역이 생기고부터 어진 촌장이 마을을 잘 다스렸다는 데서 ‘의곡’, ‘의실’이라 불렀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하여 ‘의곡리’라 했다.

1711년에 발행된 「동경잡기」에 경주 서쪽 57리에 ‘의곡역(義谷驛)’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32년에 발행된 「경주읍지」에 ‘의곡창(義谷倉)’은 산내면에 ‘의곡역(義谷驛)’은 「동경잡기」와 마찬가지로 서쪽 57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91년 발행된 「경주풍물지」에는 옛날 의곡역이 있었던 마을 ‘역촌’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위치를 자세하게 알 수 없다.

역(驛)은 국가에서 만든 시설로 교통의 요지에 설치되어 여행자나 상인 등에게 숙박, 휴식, 식사 등을 제공은 시설이고 창(倉)은 쌀을 비롯한 곡물과 포백 · 병기 · 보물 등의 각종 물품을 보관하는 건물이다.

경주에서 산내가는 사연 많은 고개 당고개

경주 시내에서 건천읍 송선을 지나 큰 고개를 넘으면 산내면이다. 이 큰 고개를 당고개를 부르는데 땅고개, 당현(堂峴)으로도 불렀다고 한다. 땅고개는 당고개의 된소리이다. 당현(堂峴)이라 불렀다는 것은 옛날 이 고개를 넘는 사람들을 위한 「서낭당」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고갯마루에서 옛사람들은 잠시 쉬면서 목도 축이고 「서낭당」에서 소원도 빌었을 것이다.

이 당고개는 「낙동정맥」을 구간구간으로 나누어 등산하는 등산객들의 출발점이면서 도착점이기도 하다. 예전에 길옆에 약수터가 있어 많은 사람이 와서 물을 받아 갔다고 하나 지금은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산내면의 문화유산

내일리에는 천주교 순절지인 「범굴천주교성지」와 「진목정천주교성지」, 우라리 금강암에 통일신라시대 「석조여래좌상」,감산리와 우라리에 통일신라시대 「절터」 , 일부리에 통일신라시대 「심원사부도군」 ,우라리, 대현리, 일부리에는 조선시대 「야철지」 , 곳곳에 청동기 시대 「고인돌」이 남아 있다. (김성대/신라문화동인회)

진목정 성지 순교자 기념성당. 산내면 옛 oK목장, 바람의 언덕으로 올라가다 오른쪽에 있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피난와서 살던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병인박해때는 울산 살티에 모여살던 허인백(야고보) 이양동(베드로) 김종륜(루카) 가족이 산내면 소태동 범굴로 2년동안 피신해 살았으나 체포되어 약 두달간 모진 심문과 고문을 받은 뒤 1866년9월14일(음7월28일) 동천강 가 울산장대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고했다. 현재 이곳에는 순교자들이 숨어살던 범굴과 진목정 공소, 세순교자를 합장했던 묘지가 있다.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 참조
진목정 성지 순교자 기념성당. 산내면 옛 oK목장, 화랑의 언덕으로 올라가다 오른쪽에 있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피난와서 살던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병인박해때는 울산 살티에 모여살던 허인백(야고보) 이양동(베드로) 김종륜(루카) 가족이 산내면 소태동 범굴로 2년동안 피신해 살았으나 체포되어 약 두달간 모진 심문과 고문을 받은 뒤 1866년9월14일(음7월28일) 동천강 가 울산장대벌에서 순교했다. 이곳에는 순교자들이 숨어살던 범굴과 진목정 공소, 세순교자를 합장했던 묘지가 있다. 한국 천주교의 성지순례 코스로 많은 신자들이 방문한다. 

<마을 이름 유래>

■ 의곡1,2리(義谷1,2里)

◦의곡 : 조선중기에 월성이씨(月城李氏)가 처음 개척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연도는 미상임. 역(驛)으로 지정되면서 부터 어진 촌장이 나타나 마을을 잘 통솔하였다 하여 의곡(義谷)이라 부르게 되었음.
◦임동 : 김녕김씨(金寧金氏) 김선룡(金先龍)이란 사람이 처음 이 마을을 개척할 당시 숲이 덮혀 있었다 하여 임동(林洞) 또는 숲골이라 불리움.

■ 내일1리(乃日1里)

◦본내일 : 마을 뒷산에 해가 뜨고 달이 뜬다고 하여 그 산봉우리를 일월봉(日月峰)이라 하였고 마을 이름을 일월이라 하였는데 승려가 시주하러 왔다가 일월이라 하면 큰 재앙이 닥친다 하면서 내일(乃日)이라 고쳐주어 지금까지 불리우고 있음.
◦회평 : 이천서씨(李川徐氏) 가문의 서일범(徐一範, 晦川公)이란 사람이 개척하였다하며 회천공의 회(晦)자와 마을 앞에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하여 평(坪)자를 써서 회평(晦坪)이라 함.

◦너더리 : 마을 가운데 있는 작은 개울을 건너기 위해 널판지로 다리를 놓고 건너 다녔다 하여 판교(板橋), 널다리라고 불렀으나, 그 후 발음이 변하여 너더리라고 불리운다고 함.

■ 내일2리(乃日2里)

◦소태 :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월성이씨(月城李氏)가 피난와서 개척하였다하며 솥을 만드는 곳이 있어 솔터라고 하였는데 지명표기시 소태(少台)라고 표기되었다고 함.
◦상목 : 임진왜란 시 유규화(柳圭化)선생이 마을을 개척하였다 하며 마을 뒷산이 누에같이 생겼다 하여 잠두산(蠶頭山)이라 하였고, 누에는 뽕을 먹어야 잘 산다는 뜻에서 상목(桑木)이라 하였음.
◦수의동 :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예의를 잘 지키고 온순한 사람들이 살았다고 하여 수의동(守義洞)이라 불리운다고 함.
◦진목 : 처음 부락을 개척할 때 참나무 숲이 많이 있었다 하여 진목정(眞木亭) 또는 참나무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또한 이곳에는 옛날 참나무 정자가 있었다고 하여 참나무정이라 부른다는 설이 있음.

■ 대현1리(大賢1里)

밀양박씨 경보(慶輔)란 사람이 처음 이 마을을 개척하여 회곡이라 칭하였고, 그 후 어진 사람이 9명이 태어났다하여 구현동(九賢洞)으로 불리었음. 그 후 큰 재(고개, 峴)가 많아 대현(大峴)으로 불리우다 일제시 박재연이 이왕이면 고개현(峴)자를 어질현(賢)로 고쳐 대현(大賢)이 됨.

◦서편 : 동창천 서편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서편이라 불리움.
◦범곡 : 월성김씨 호(虎)란 사람이 처음 개척하였다 하며, 이 마을 앞산이 범의 머리같이 생겼다 하여 호곡(虎谷)이라 부르다가 후손에 와서 범이 배가 고프면 살림(재물)이 늘어나지 않는다하여 범곡(凡谷) 또는 범골이라 부름.
◦고강리 : 개척당시 마을에 고씨(高氏)가 살다 차례로 강씨(姜氏), 이씨(李氏)가 들어와 마을을 이루어 고강리(高,姜,李)라 칭함.

■ 대현2리(大賢2里)

◦시다 : 대한(大旱)에도 골짜기 물이 마르지 않고 절후에 맞게 농사가 잘되어 힘 들이지 않고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다하며 고려유신들이 피난 와서 후사와 평화가 오기를 기다렸다하여 시다(時多)라고 칭함.
◦태종 : 조선 3대왕(芳遠)이 고려 유신들의 군을 전멸하고 태종왕의 이름을 따서 태종이라 불리움.
◦동편 : 동창천 동쪽에 있다하여 동편(東片)으로 불리움.

■ 대현3리(大賢3里)

◦동곡 : 마을의 북쪽 산에 구리(銅)가 나왔다고 하여 동곡(銅谷) 또는 쇠동골이라 칭함.
◦중리 : 동곡과 와항 중간에 위치한다고 하여 중리(中里)라 칭함
◦귀농지 : 1961년 고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재임시, 실업자 구재책으로 산 100정(町)을 개간 50세대를 정착하여 농사를 지었다 하여 귀농지라 칭함.

■ 대현4리(大賢4里)

◦와항 : 태종 이방원이 고개마다 진지 번호로 일항(一項:외항), 재항(再項:소호)으로 정한 이름이 그대로 불린다고 하고, 마을 형태가 기와처럼 생겼다 하여 와항, 외항만디, 외항, 기와목이라고도 칭함.
◦귀농지 : 1961년 고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재임시, 실업자 구재책으로 산 100정(町)을 개간 50세대를 정착하여 농사를 지었다 하여 귀농지라 칭함.(A지구, B지구)

■ 일부1리(日富1里)

1720년경 밀양박씨 문용(文溶)이란 사람이 마을을 개척하여 이후 12대에 걸쳐 장인(匠人)으로 이어 오면서 상거래가 빈번하여 날마다 한집씩 부자가 생겨날 정도로 많은 돈을 벌었다하여 일부(日富)라 부르게 됨.

◦심천 : 옹강산에서 신원리에 이르는 골짜기가 깊다하여 지푼내 또는 심천(深川)이라 부르게 됨.
◦거산 : 골이 좁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큰 산 밑에 마을이 있다하여 거산이라 부름.
◦산수 : 마을 가운데 묘가 있었다 하여 산소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산수(山水)라 칭함.
◦제궁 : 마을에 큰 재실이 있었다 하여 재궁(齋宮)이라 하던 것이 지명 표기시 재궁(才宮)으로 불리움.

■ 일부2리(日富2里)

◦상신 : 어느 해 홍수가 나서 마을 전체가 떠내려가고 새로운 마을을 일궈 새말이라 하였는데 위쪽에 있는 마을을 웃새마을, 상신(上新)이라 칭함
◦하신 : 마을 유래는 상신과 같음.
◦장척 : 괘일 동쪽에 있는 마을로 골짜기가 일자형으로 긴 자와 같이 생겼다 하여 장척 또는 장자골이라 부름.
◦괘일 : 인근 마을에서 해가 제일 늦게 지므로 '해를 공중에 매달아 넣은 듯하다'하여 괘일이라 부름.

■ 신원1리(新院1里)

◦덕동 : 개척 당시 마을 위쪽에 절벽이 있고 시내가 흐른다 하여 암계(岩溪)라 부르다 뒤에 덕(德)이 있고 훌륭한 후손이 태어나기를 바란다는 뜻에서 1618년 김중보라는 사람이 덕동(德洞)이라 개칭함.
◦옷밭 : 마을 개척 당시 옻나무가 많아 옻밭 또는 칠전(漆田)이라 불리움
◦박다 : 개척 당시 박달나무가 많았다고 하여 박달이라 부르다가 그 후 박씨(朴氏)가 많이 살았다고 하여 박다, 박다동으로 불리움.

■ 신원2리(新院2里)

◦문산 : 마을에 서당이 많아 글공부하는 선비들이 많이 모여 들었다 하여 글메라 부르다 문산(文山)이라 칭함.
◦세원 : 1760년경 남평문씨 성을 가진 사람이 개척하였다하며 인가가 드문 곳에 원(院)을 새로 지었다 하여 새원 또는 신원(新院)이라 칭함.
◦멧골 : 마을을 개척 할 당시 매화가 많았다하여 매골, 매곡(梅谷)이라 칭함.

■ 외칠1리(外七1里)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개편 시 옷밭의 바깥쪽으로 되므로 바깥옷밭 또는 외칠전(外七田)이라 부르다 골짜기 바깥에 7개의 마을이 있다하여 외칠로 개편.

◦방동 : 마을에 방화사(芳花寺)란 절이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방화동(芳花洞)이라 부르다 마을이 꽃처럼 아름답다는 뜻과 방화사의 절 이름을 따서 방동(芳洞)이라 부름.
◦원두 : 원님이 관내 순시 때 유숙하던 원집이 있었다 하여 원두(院頭)라 칭함.

■ 외칠2리(外七2里)

◦월천 : 마을 뒤에 달산이라는 산이 있어 산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을 달랫골, 월천(月川)이라 칭함.
◦지리 : 후손들에게 지혜롭게 살아가라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지례(智禮), 지리(智里)라 불리움.

■ 내칠1리(內七1里)

골짜기 안에 일곱 동네가 있다하여 내칠(內七)리라 불리움.

◦직현 : 일자산(一字山) 아래 마을이 일자형으로 취락 하였다 하여 곧음터, 직현(直峴)이라 칭함.
◦교동 : 마을 가운데 세천이 흐르고 있어 집집마다 세천을 건너 다니는 다리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하여 다릿골, 교동(橋洞)이라 칭함.
◦개현 : 개척 당시 주민들이 한곳에 집단적으로 모여 살지 않고 흩어져 살았다고 하여 개터, 개현(個峴)이라 하다 근래에 와서 개현(介峴)이라 함.
◦의동 : 마을 지형이 개미와 같이 생겼다 하여 개미골, 의동(蟻洞)이라 칭함.

■ 내칠2리(內七2里)

◦안옷밭 : 옷밭의 안쪽에 있다하여 안옷밭이라 불리움.
◦산저 : 개척 당시 딱나무가 많이 있었다 하여 산저(山楮)라고 하며 위, 아랫마을 구분을 위하여 상산저, 하산저로 구분함.
◦월항 : 마을 지형이 반달모양으로 생겼으며 높은 곳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달 보러가는 첫째 동네'라는 뜻에서 다라미기, 월항(月項)이라 칭함.

■ 우라1리(牛羅1里)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산 지형이 우형(牛形)을 이루고 있다하여 우라로 칭함.

◦수피 : 마을 개척 당시 피나무 숲이 있었다 하여 수피(禾皮)라 칭함.

■ 우라2리(牛羅2里)

◦중리 : 개척 당시 동쪽 산정에 산성(山頂)이 있어 성촌(城村)이라 하였고 산에서 우렁이 소리가 들린다하여 명라동(鳴羅洞)이라 칭하다 자연부락의 중간에 위치한다 하여 중리로 칭함.
◦상리 : 우라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상리라 부름.
◦지경 : 수피와 중리의 경계되는 곳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지경(地境)이라 칭함.
◦시루미기(생식촌) : 골짜기의 지형이 시루와 같이 생겼다하여 시루미기마을이라 함.

■ 감산1리(甘山1里)

타 리동에 비해 산이 높지 않고 아름답게 생겼다하여 감산이라 칭함.

◦감존 : 개척 당시 밤나무와 감나무가 많아 마을 이름도 감존(甘存)이라 함.
◦어두 : 신라 때 전란으로 왕자가 피신하고 있던 곳으로 황자동이라 하다가 이를 은폐하기 위해 지형이 물고기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어머리 또는 어두(漁頭)라 칭함.
◦원동 : 조선 순종 때 원의 지방 순시때 기거하던 집이 있었다 하여 원동(院洞)이라 함.
◦탑동 : 탑이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탑거리 탑동(塔洞)이라 함.

■ 감산2리(甘山2里)

◦장사 : 마을 동쪽에 있는 산이 긴 뱀처럼 생겼다 하여 장사(長蛇)라고 하던 것이 조선말기에 정선비가 벼슬에 오르자 장사(長仕)로 부름.
◦방터 : 마을의 형태가 꽃같이 생겼다 하여 방터 또는 방기(芳基)라 칭함.
◦소목 : 마을 앞에 큰 소나무가 있었는데 이 나무에 사람의 손이 닿으면 마을에 재앙이 온다하여 손목(損木)이라 하였다 하고, 혹은 고을이 좁아서 소목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회골 : 마을에 큰 회나무가 있었다 하여 횟골이라 불렀다 하며 혹은 마을에 큰 불이 나서 잿더미로 변해 새로 마을을 일으키고 난 다음 횟골, 회곡(恢谷)이라 불렀다는 이야기임.

 

*제11차 탐사 신청은 여기로...<클릭>
http://www.gjfocus.co.kr/event/event12.html

경주포커스 후원은 바르고 빠른 뉴스제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