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제4차 경주시경계탐사] 신라충신 박제상, 조선 독립운동가 박상진의사를 모두 만나는 길
[기록- 제4차 경주시경계탐사] 신라충신 박제상, 조선 독립운동가 박상진의사를 모두 만나는 길
  • 김종득 기자
  • 승인 2023.04.17 18: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외동읍 녹동리 관문성터 앞에서.
외동읍 녹동리 관문성터 앞에서.

경주시가 주최하고 경주포커스가 주관하는 제4차 경주시경계탐사에서 실제 경주-울산 경계구간은 경주시 외동읍 녹동리에서 치술령까지  5㎞가 채 되지 않는다.

양남면 신대리에서 시작된 관문성의 끝을 이 구간에서 확인할수 있다.
양남면 신대리 삼태봉에서 남쪽으로 뻗어진 산봉우리를 따라 이어지던 관문성은 모화리 부근에서 일제강점기 동해남부선 개설로, 대한민국 수립이후에는 경주와 울산을 잇는 7번 국도 확장으로 훼손된다. 

태화강 지류 동천에서 끊어졌던 관문성은 다시 동천을 지나며 이어져 순금산 천마산을 넘어 외동읍 녹동리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경주시 외동읍 녹동리와 울산 울주군 범서읍을 잇는 14번 국도로 다시한번 끊어진다.
옛 성문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낮게 이어진 성벽은 외동읍 녹동리에서 다시 치술령을 향하는 것을 확인할수 있다.
그러나 이 성벽도 1978년 두산지가 만들어지면서 수몰돼 다시 끊어진다. 
성벽은 두산지를 지나 다시 치술령쪽으로 이어진다.
산성은 치술령을 향해 약 1㎞가량 더 이어지다 마침내 끝이 난다.
양남면 신대리에서 치술령 아래까지 경주와 울산의 경계는 마치 관문성 성벽위를 걸으며 그은 것 처럼 정확하게 나뉜다. 

제4차 탐사 외동읍 녹동리에서 치술령까지 구간은 신라의 충신과 조선의 독립운동가의 얼을 동시에 느낄수 있는 길이다.
400년대 이야기속 인물 박제상과 1500년뒤 1910년대 독립운동가 박상진의사를 동시에 만나고 기리고 이야기 할수 있는 곳이다. 

402년(실성왕 1년)에 고구려로, 418년 (눌지왕2년)에 왕의 부름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가 임무를 완수한 뒤 죽임을 당한 박제상과 그의 부인 이야기가 전해오는 치술령 망부석이 있고, 일제 식민통치가 극악했던 1910년대 조국독립투쟁에 앞장섰다 형장의 이슬로 생을 마감한 박상진의사가 독립운동의 의지를 다졌던 생가도 인근에 있다.

그래서 이번 탐사구간은 외동읍 녹동리 관문성에서 출발, 경주시 외동읍 녹동리와 울산시 울주군 두동면 경계를 따라 치술령까지 이동한 뒤, 외동읍 녹동리 박상진 의사 생가터를 방문하고 출발지 녹동리 관문성으로 돌아오는 구간으로 정했다.
전체 10㎞ 거리 가운데 절반은 시 경계, 절반은 시 경계를 벗어나 외동읍 녹동리 를 걸었다.

단순히 경계를 따라 걷는 산행이 아니라 우리지역의 역사와 문화자원을 하나라도 더 알고 배우고 찾아보자는 것이 경주시경계탐사의 본질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수 있다고 여겨서다. 
봄비가 대지를 촉촉하게 적신 2023년4월15일, 34명의 시민이 약 7시간동안 이 길을 함께 걸었다. 
제5차 탐사는 5월20일 치술령에서 묵장산으로 향한다. 경주시 외동읍 녹동리를 지나 제내리까지, 울산시 울주군 두동면 월평면이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경주시경계 제4구간 탐사
경주시 외동읍 녹동리 관문성~녹동리쇠부리터 ~치술령~ 박상진의사 생가터 ~경주시 외동읍 녹동리 관문성 

△ 일시 : 2023년4월15일 오전 9시53분~오후 4시57분. (약7시간 휴식 1시간 포함)

△ 이동거리 : 총 11.1㎞

△ 참가인원 34명

 

제4차 경주시경계탐사구간. 1번 외동읍 녹동리 관문성에서 출발 3번 치술령을 지나 6번 박상진읭사 생가터를 방문한뒤 1번 녹동리 관문성으로 돌아왔다. 

 

▲시간대별 탐사구간 요약

09:00 경주실내체육관 출발

09:55 외동읍 녹동리 관문성출발

10:10 (관문성에서 약1㎞) 녹동리쇠부리터

10:20 울산시 울주군 두동면 치술령 등산로 진입

12:36 출발지 3㎞지점.해발 521m 갈비봉 아래 점심 식사. 

13:30 출발 3.4㎞지점. 해발 582m.갈비봉.

14:37 출발 4.6㎞지점 치술령 해발 765m 신모사터, 망부석

15:27 출발 6.6㎞지점 돌탑 끝나고 녹동리 마을 가는길

16:34 출발 8.3㎞지점 박상진 의사 생가

16:57 출발 11㎞ 지점 녹동리 관문성

 

1. 녹동리 관문성터 (위 사진의 번호순입니다)

경주시 외동읍 녹동리와 울산시 울주군 범서읍의 경계에 관문성이 있다. 경주 맨끝에 성지구판장이 있다.
경주시 외동읍 녹동리와 울산시 울주군 범서읍의 경계에 관문성이 있다. 경주 맨끝에 성지구판장이 있다.

2차선 도로로 끊임없이 자동차가 다닌다. 도로 표지판이 그곳이 경주와 울산의 경계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원녹동으로 향하는 길은 버스 2대 교행이 어려울 만큼 좁다.
그 길 초입은 울산땅이다. 울산시 708번 시내버스가 회차하는 곳이기도 하다.

경주쪽 끝에는 성지 구판장이 있다. 그곳 자연부락은 녹동리 성저마을이다. 경주쪽에서 보면 관문성 안쪽 마을,성저(城低)마을이라고 한다.
마을 곳곳에 성돌로 담장을 만들고 축대를 쌓은 게 눈에 띈다.
(20여년전쯤부터 이 구판장의 주인이라는 김희순씨는 성저구판장으로 해야 할 것을 그 이전 주인이 성지구판장으로 간판이름을 다는 바람에 그 이후로도 간판이름을 성지구판장이라고 쓴다고 했다.) 

옛 사람들은 성저마을과 성지마을을 섞어서 불렀다고 한다.
최근에 인근 공단 노동자를 겨냥해 생긴 듯한 식당이름은 성지를 붙인곳도 있고, 성저를 붙인 곳도 있다. 지금도 성지와 성저가 구분되지 않고 있는 셈이다.

2.녹동리 쇠부리터

쇠부리터에 대해 설명도 듣고 구석 구석도 둘러봤다.
쇠부리터에 대해 설명도 듣고 구석 구석도 둘러봤다.

녹동리 관문성 경계에서 1㎞정도 떨어진 곳.
녹동리 쇠부리터다. 두산지 건설로 수몰위기에 처하자 옮겨두었다고 한다. 1970년대 문화재 보존을 위해 힘쓴 이들의 수고가 새삼 고맙게 느껴지는 곳.

상세내용은 3월22일자 기사 - 시 경계주변 가볼만한 곳 녹동리 쇠부리터

3.치술령 신모사터, 망부석 <글 : 김성대 : 신라문화동인회 부회장>

▪ 치술령(鵄述嶺)

치술령 표지석.
치술령 표지석.

치술령은 해발 765m이며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와 울산광역시 경계이다. 치술령에는 신라 충신 박제상과 가족들의 전설이 남아 있는 산이다.

삼국사기에는 박제상, 삼국유사에는 김제상으로 서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박제상은 <삼국사기 열전 박제상> 편을 통해 박혁거세의 후손이며 파사왕의 5 세손이고 할아버지는 아도갈문왕, 아버지는 물품 파친찬이고 신라 삽량주(지금의 경상남도 양산시) 태수를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죽어서는 대아찬으로 추증된다. 신라 왕자 눌지왕의 동생인 미사흔의 장인이다.

<삼국유사 기이 편 내물왕 김제상> 조를 통해 부인과 세 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 박제상의 부인이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어 치술신모라고 부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근거로 박제상 부인의 이름을 치술로 보고 <삼국유사 왕력 편>에 치술의 아버지가 실성왕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토대로 박제상 부인 이름을 치술로 보고 박제상을 실성왕의 부마로 보는 의견도 있다.

경주 김씨는 김알지를 시작으로 하여 미추왕 때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다. 미추왕-내물왕-실성왕-눌지왕-자비왕으로 왕위가 계승된다. 내물왕은 미추왕의 아들이며,실성왕과는 사촌지간이다. 눌지왕은 내물왕의 아들이며 실성왕의 조카이다.

내물왕 때 실성을 볼모로 고구려로 보낸다. 실성이 왕이 되자 자기의 원한을 풀려고 내물왕의 아들인 미사흔을 왜로, 복호를 고구려로 볼모로 보낸다. 내물왕의 아들인 눌지가 왕이 되자 두 동생을 데리고 오려고 하자 박제상이 고구려에 가서 복호를 데려오고 왜에 가서 미사흔을 탈출시키고 박제상은 대마도에서 죽임을 당한다. 이렇게 신라가 고구려와 왜에 볼모를 보냈다는 것은 신라의 국력이 아직 약했음을 알 수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박제상과 그의 애틋한 가족 이야기로 전국에 많은 유적지가 있다.

경주에는 망부석, 신모사터, 장사 벌지지, 치술령, 울주군 범서읍에는 은을암, 울주군 두동면에 치산서원, 양산시 상북면에는 효충사, 강릉시 저동에는 경양사, 대마도에는 박제상 순국비 등이 있다.

▪망부석

동해가 내다 보이는 망부석. 15일 운무에 가렸다.
박제상 부인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망부석. 

박제상이 왜국 땅 대마도에서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사실도 모르고 동해가 보이는 치술령에 올라 목메어 남편을 부르며 기다리다가 부인의 넋이 새가 되어 왜국으로 날아가고 부인의 몸은 그 자리에 바위로 변해 사람들은 이 바위를 망부석이라고 부른다.
사람이 돌로 변화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돌’이라는 단어에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영원 불변성을 가지고 있다. 훗날 동해 바다가 잘 보이는 이 바위에 부인에 대한 존경심으로 망부석 설화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 신모사터

신모사터.
신모사터.
치술령 오카리나 연주. 문화재 해설담당 김성대선생이 오카리나 연주를 하고 있다.
치술령 오카리나 연주. 문화재 해설담당 김성대선생이 오카리나 연주를 하고 있다.

 

박제상 부인은 남편을 그리는 마음에 세 딸을 데리고 이곳 치술령에 올라 남편이 죽임을 당한 곳을 바라보고 통곡하다가 죽어 치술신모가 되었고 이곳에 사당을 지어 부인의 아름다운 마음을 기렸다. 지금은 폐허가 되었고 그 터에 표지석만 남아있다.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오래된 뒤에도 부인은 남편을 사모하는 생각을 이기지 못하여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鵄述嶺)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었다. 그래서 부인을 치술신모(鵄述神母)하는데 지금도 사당(祠堂)이 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경주풍물지리>에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장마 때는 비가 그치길 빌고, 가물 때에는 무제(기우제)를 올렸다 한다. 무제당터라고도 부른다. 

4.녹동리약수터

해발 680m에 있는 바위를 뚫고 맑은 물이 끊임 없이 나온다.
해발 680m에 있는 바위를 뚫고 맑은 물이 끊임 없이 나온다.

치술령에서 묵장산 방향으로 경계를 따라 500미터 쯤 가면, 이정표 하나가 나타난다.
외동읍 ‘좋을라고 산악회’가 만든 철제 이정표다. 
치술령 종주길(묵장산 방향), 약수터, 석계 상동못 3.5㎞를 가리킨다.

약수터 방향으로 30미터 정도 급한 내리막을 내려오면 678m높이에 약수터가 있다.
말이 약수터이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샘이 있는 것도 아니고, 흐르는 물을 담아 놓는 구조물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오롯이 자연그대로의 물이 바위를 뚫고 나온다.
깨진 바위 3-4개 붙어 있는 듯 하기도 하고 그 자체로 거대한 암석처럼 생긴  바위 맨 아래쪽에 네모난 구멍으로 물 하나가 끊임없이 나왔다.
그야말로 암반수다.

치술령에서 묵장산 방향의 능선쪽 깊은 곳에서 시작된 물이 땅속을 지나고 바위틈을 뚫고 나오는 것 처럼 보였다. 
녹동리에서 치술령을 왕래하며 공동으로 사용하던 약수터라는 내용의 안내문을 ‘경주외동좋을라고 산악회’에서 만들어 놓았다.

약수터의 물은 다시 땅속으로 들어갔다가 200미터 아래에서 작은 실개천 모양이 되더니 4~500미터 아래에서는 제법 큰 계곡의 모양을 띈다.
이 약수터를 그 옛날 외동 녹동리 사람들은 찬물 샘이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5.돌탑 수백개

누가, 왜 만들었을까?
누가, 왜 만들었을까?

치술령에서 녹동리로 내려오는 길 끝에 최근에  쌓은 듯한 돌탑 수백기가 있다. 
입구에 암자 이름도 있고 전화번호도 적어 놓았다. 
녹동리 마을 사람들은 수년전에 누군가 암자를 만들고 돌탑을 쌓았는데, 그후로는 인적이 끊겼다고 한다.
유명한 TV프로그램, '세상에....'라는 제목이 절로 또오르는 풍경이다. 

6.박상진의사 생가터

박상진의사 생가터 앞에서 내력을 이야기 하고 있다. 사진 서기호.
박상진의사 생가터 앞에서 내력을 이야기 하고 있다. 사진 서기호.

경주시 외동읍 녹동리 녹동리 469-2~6에 있다.
이곳 녹동리 생가터는 독립운동가 박상진의사가 네살때(1887년) 이사와서 서울로 떠나던 열여덟살까지(1902년) 유소년기 15년을 보낸 곳이다. 
여전히 안내판 하나 없다. 
상세 내용 보기- 관련기사 2023년3월24일 기사  시경계주변 가볼만한 곳. 박상진의사 생가터

 

 

경주포커스 후원은 바르고 빠른 뉴스제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