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차 경주시경계탐사] 외동읍 녹동리 경계주변 가볼만한 곳 ③ 독립운동가 박상진의사 생가터
[제3차 경주시경계탐사] 외동읍 녹동리 경계주변 가볼만한 곳 ③ 독립운동가 박상진의사 생가터
  • 김종득 기자
  • 승인 2023.03.24 13: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독립운동가 고헌박상진의사 유소년기 15년 보낸 곳
외동읍 녹동리 박상진의사 생가터.
외동읍 녹동리 박상진의사 생가터.

경주포커스가 경주시경계주변 문화재와 볼거리등을 소개하는 연재 기사의 제목은 ‘가볼만한 곳’이다.
그러나 녹동리에 있는 독립운동가 박상진의사 생가터는 ‘가볼만한 곳’이 아니라 ‘반드시 가봐야할 곳’으로 이름붙여야 마땅할 것 같다. 

경주시와 울산광역시 경계인 경주시 외동읍 녹동리 관문성에서 멀지 않은 곳, 외동읍 녹동리 469-2~6에 박상진 의사의 생가터가 있다.
녹동리 관문성에서 직선거리로 1.2㎞거리다.

이곳 녹동리 생가터는 독립운동가 박상진의사가 네살때 이사와서 서울로 떠나던 열여덟살까지 유소년기 15년을 보낸 곳이다.
박상진 의사는 1885년 1월22일 울산시 북구 송정동에서 태어나 1887년, 네살 때 외동읍 녹동리로 이사했다.
박상진의사의 할아버지가 박상진 의사 생부 시규, 백부이자 양부였던 시룡의 집을 나란히 장만해 주었다고 전한다.

박상진의사가 살던 집은 1970년초에 헐렸다. 기왓장과 건축자재는 당시 오천정씨 재실을 짓는데 사용됐다. 현재의 오천정씨 재실.
박상진의사가 살던 집은 1970년초에 헐렸다. 기왓장과 건축자재는 당시 오천정씨 재실을 짓는데 사용됐다. 현재의 오천정씨 재실.

1902년 상경해 왕산 허위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기 전까지  15년 동안을 경주시 외동읍 녹동리 생가터에서 지냈다.
성장하고 독립운동가로서의 기개를 키운 곳이 외동읍 녹동리인 것이다. 
자신보다 가난한 친구나 이웃을 도운 일, 부모에게 지극한 효성을 보여주는 박의사의 다양한 일화는 모두 자라난 외동읍 녹동리에서의 일이다.
수배중에 일제 경찰에 검거될 것을 알면서도 생모의 장례식 참석을 위해 찾아왔던 곳도, 검거된 곳도 모두 이곳 녹동리였다.

대개 독립운동가 집안이 그랬듯 박 의사의 집도 몰락했다. 한옥 2채가 나란히 있었다는 생가터도 모두 팔렸다.
정확히 언제 누구에게 팔렸는지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다.

경주포커스가 최근 확인한 등기부등본에 따르면 박상진의사 집터 대지 3필지 가운데 가장 면적이 넓은 469-2번지는 울산시 울주구, 울산시 북구 호계에 주소를 둔 울산시민 2명, 469-3은 외동읍 녹동리에 주소를 둔 주민, 469-4번지 역시 외동읍 녹동리 주민 소유로 나타난다. 나머지 밭 2필지 가운데 1필지는 469-3 대지소유주, 또다른 1필지는 469-4 대지 등기인과 동일했다. 등기부 등본에는 1968년, 1972년, 1973년의 매매기록이 보였지만 정확하게 그 이전 매매 시점이나 박상진의사 사후 그 고택의 내력은 불분명하다.

1970년대초반에 헐린, 박상진의사가 살았던 한옥 건축자재는 집터에서 1㎞남짓 떨어진  외동읍 녹동리 839번지에 오천정씨 재실을 만드는데 사용됐다.
그 재실은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다.
그러나 박상진의사의 생가터는 그곳이 위대한 독립운동가가 살았던 곳이라는 점을 알려주는 그 흔한 안내판조차 없이 그저 밭으로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생가복원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지만 아직 행정기관은 요지부동이다. 
박상진의사 생가터는 시경계주변 ‘가볼만한 곳’이 아니라 ‘반드시 가봐야 할 곳’임에 분명하다.
사상최악의 대일 굴욕외고 논란이 뜨거운 요즘이어서 더더욱 그렇다.

▶가는길
 

녹동리 관문성 방향이나 석계리 방향에서 오갈수 있다. 
녹동리 관문성~ 생가터까지 상세도. 관문성길을 따라 두산지를 지나서 가면 된다.
녹동리 관문성~ 생가터까지 상세도. 관문성길을 따라 두산지를 지나서 가면 된다.

 

생가터 주변.
생가터 주변.

박상진의사의 생가터는 외동읍 녹동리 관문성에서 갈수도 있고, 석계리 방향에서 갈수도 있다.

석계리에서 박 의사 생가터를 갈때는 석계지를 지나는 도로(상석길)가 유일하다.<사진 맨위>
외동읍 녹동리 관문성에서는 관문성길을 이용해 두산지를 지나는 길을 통해 생가터에 갈 수 있다.<사진 위에서 두번째>

어느쪽에서 가든 생가주변 녹동리 마을에 접근하는 도로는 자동차 2대가 교행하기도 쉽지 않을 정도로 폭이 좁다. 
때문에 관광버스로 가기에는 엄두를 내기 어렵다. 
울산에서나 경주에서 더러 뜻있는 모임의 회원들이 단체로 생가터를 방문하려 해도 그 점이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한다.  

경주도심에서 생가터까지 왕래하는 경주시내버스는 하루에 네번 다니는 609번 버스가 유일하다.
생가터 인근이 종점이 있다. 
울산쪽에서는  울산시 708번 시내버스가 30분에 한대꼴로 운행하지만, 녹동리 관문성이 종점이다.
이 버스를 이용하면 관문성길을 따라 생가터까지 걸어서 이동해야 한다. 

□ 독립운동가 광복회 총사령 고헌 박상진 의사

고헌 박상진의사는 일제의 무단통치가 극악했던 1910년대 우리나라 독립투쟁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해 평양법원에 발령 받았으나 사퇴하고 독립운동에 나선 것 하나만으로도 평가 받아 마땅한 일인데, 그후 그의 행적은 더욱 위대했다. 
1915년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총사령으로 취임한 그는 1917년 11월 채기중(蔡基中)·유창순(庾昌淳)·임봉주(林鳳柱)·강순필(姜順必)에게 칠곡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하게 했고, 1918년 1월김한종(金漢鍾)·장두환(張斗煥)·김경태(金敬泰)·임봉주(林鳳柱)에게 충청남도 아산 도고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하게 하는 등 여러명의 친일부호 처단을 통해 일제 부역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해방후 밝혀진 경주세금(우편)마차 습격사건도 그가 총사령인 대한광복회가 주도한 의거였다. 
1915년 12월24일 새벽, 경주군 광명리 소태(소티고개) 아래 효현교에서 경주·영일·영덕등지에서 거둔 세금 8700원(현재금액 2억5000만원상당)을 대구로 수송하던 일제 우편마차를 습격해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했다. 경주에서 유소년기를 보내 그였기에 가능했을터다.   

무도한 일제의 폭압에 숨죽여 있던 민중들에게 조선독립의 희망을 일깨운 투쟁을 이끌었던 그였기에 '3.1운동의 원천을 형성한 선각자'라는 평가도 있다. 

우리나라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ㆍ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ㆍ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시작한다. 대한민국의 뿌리가 임시정부이고, 그 임시정부를 탄생하게 한 것은 3ㆍ1운동이었다.
박상진의사의 독립투쟁이 3ㆍ1운동의 원천을 형성했다는 점에서 보면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박 의사의 위상은 더 없이 크고 위대하다. 

∎1884년 12월 7일 지금의 울산 북구 송정동에서 출생하여 4세 때 녹동리로 이사 옴
∎1902년 의병장 허위 문하에 들어가 반외세 민족의식을 키움
∎1904년 양정의숙 전문부에서 법률과 경제학 공부
∎1910년 판사 시험 합격 후 평양 법원에 발령을 받았으나 사퇴
∎1912년 상덕태상회를 세워 독립운동 군자금 마련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결성/ 대한광복회 조직하여 총사령에 취임
∎1915년 12월 24일 소티고개에서 일제 우편마차 습격
∎1916년 만주에서 무기와 화약류를 들여오다가 잡혀 6개월간 옥고 치름
∎1917년 11월 칠곡 부호 장승원 처단
∎1918년 1월 충청남도 도고면장 박용하 처단
∎1918년 녹동리 생가에서 일경에 체포됨
∎1921년 8월 11일 사형선고를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순국
∎1921년 8월 13일 내남면 노곡리 등운산 자락에 안장
∎1960년 울산에 추모비 건립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2021년 8월 11일 경주시에서 순국 100주기 추모식 가짐

 

경주포커스 후원은 바르고 빠른 뉴스제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