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차 경주시경계탐사] 가볼만한 곳-정무공 최진립 장군과 용산서원, 충의당
[제6차 경주시경계탐사] 가볼만한 곳-정무공 최진립 장군과 용산서원, 충의당
  • 경주포커스
  • 승인 2023.06.29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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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서원 숭렬사우.
용산서원 숭렬사우.
글 · 사진 : 김성대
글 · 사진 : 김성대
신라문화동인회 부회장. 교사. 

용산서원은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용산 아래에 있으며 정무공 최진립 장군(1568년~1636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정무공 최진립 장군은 조선시대 의병장이며 무관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참전했다.
1568년 지금의 경주시 현곡면 하구리에서 태어나 어릴 적 외가인 지금의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로 이주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인 최계종과 함께 의병장으로 왜군을 물리치는데 앞장선다. 1592년 경주읍성과 영천성 탈환 전투에 참가하고 1595년 무과에 급제한 후 1597년 울산 서생포 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통일신라부터 조선 후기까지 명신들의 행적을 수록한 『해동명신록』에 기록된 최진립 장군의 활동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공은 동생 계종과 함께 참전하게 되었다. … 공은 하루는 경주부윤 尹仁涵에게 이르기를 “저들이 있는 府의 남촌에는 도로 좌측에 先人의 집(자신이 집을 지칭함)이 있는데, 들으니 적들이 그 중에 모여 백성이 놀라서 달아났다고 합니다. 청컨대 먼저 가 보겠습니다.” 하니 윤부사가 장하다 하고 허락하였다. 이에 야간에 수 십 인을 데리고 가서 주둔한 집의 문을 막고 바람을 따라 불을 놓아 적을 모두 타 죽게 하였다. 또 집 위의 틈을 따라 나오는 자들은 화살을 쏘아 사살하고는 조총과 창검을 모두 거두어 관청으로 수송해오니 부윤이 탄복하였다고 한다. -한국사테이터베이스-

최진립은 임진왜란 때 세운 공이 인정되어 1594년에 무관직인 「군자감부정」으로 출사하여 1595년에 무과에 시험을 쳐 합격한 후 병자호란 용인전투에서 전사할 때까지 「훈련원정」, 「마령진수군첨절제사」, 「경상좌도수군우후」, 「경원도호부사」, 「경기수군절도사」 등 여러 관직을 거친다.

최진립 장군은 1636년 「공주영장」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당시 69세인 노구를 이끌고 전투에 참가해 용인 험천에서 청군과 싸우다 전사한다. 당시 상황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병자년 호란 때 공주 영장으로 있으면서 장차 군사를 거느리고 전란에 달려가고자 했다. 감사 정세규가 그의 나이가 많음을 민망하게 여겨 황박을 대신하고 뒤에 떨어져 있게 했다. 최진립이 분연히 말하기를 “근력은 비록 쇠했지만 뜻을 전쟁터에 나가 죽음에 있다.” 하고 눈물을 흘리며 달려갔다. 용인 험천에 이르니 적들이 철기로 몰아 압박해 오자, 최진립은 적진 앞에 우뚝 서서 활을 쏘면 반드시 적이 쓰러졌다. 그런데 선군에 무너지나 따르던 사람들이 다급하다고 알렸으나 최진립은 “내 죽을 곳은 여기다.” 하고 마침내 순절했다. -동경잡기-

그 후 1637년에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1638년에 청백리에 추천되어 선정된다.
1640년에 정려가 세워지고 1651년에 시호 ‘정무’가 내려진다. 1700년 이곳에 사우를 건립하고 위패를 모셨으며 1711년에 ‘숭렬사우’로 사액되었다. 입구의 신도비는 1740년에 세워졌다. 1870년 전국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963년에 서원 다시 건립하여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용산서원 보존회에서 매년 (음) 2월 하정일(下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1690년에 함경도 경원부에서 그를 위하여 충열사를 건립하였고 지금의 울산광역시 충의사에서도 최진립 장군 향사를 지내고 있다.

충의당은 정무공의 생가이며 경주 최씨 가암파 종택이다. 현재 충의당 주변은 「충의공원」으로 조성하여 장군의 동상과 여러 조형물이 있다. 충의당에는 정무공의 유품 및 서책들을 보관하는 경모각, 청백리정무공최선생기념관, 정무공의 불천위 사당인 부조묘가 있으며 정무공의 위패는 충렬사에 모셔져 있다. 뒤편에 충노각이 있다.

노비 옥동과 기별의 충노각

충의당의 충노각과 표지석.
충의당의 충노각과 표지석.

충의당에서는 매년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불천위 제사를 지낸다. 불천위 제사 후 정무공에 올린 제상을 대청으로 물린 후 후손들이 정무공 같이 전사한 두 충노 「옥동과 기별」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노비인 옥동과 기별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옥동: 최진립의 종이다. 임진왜란에 그 주인이 창의하여 왜적을 토벌할 때 옥동은 나이가 겨우 15~16세였다. 성심을 다해 주인을 받들며 위난을 피하지 않았다. 어느 날 왜적들이 갑자기 이르러 옥동은 주인과 같이 숨어 있었는데 왜적들이 멀리서 보고 크게 몰려와 수색하였다. 옥동은 화를 면할 수 없음을 헤아리고 몸을 던져 먼저 뛰어나와 여러 방면으로 왜적들을 유인하여 말하기를 “여기는 사람이 없다. 저 산골짜기에 많은 피난민이 있으니, 거기로 가는 게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왜적들은 그가 나이가 어리고 용모가 뛰어남을 아껴 차마 해치지 못하고 돋 다른 곳으로 향하니 옥동과 주인은 모두 안전할 수 있었다. -동경잡기-

기별: 최진립의 종이고 옥동의 조카이다. 병자년 험천 전투에서 최진립이 데리고 간 여러 종에게 말하기를 “ 내 나이가 많지만 마땅히 전장에서 죽을 것이다. 너희들은 기꺼이 나를 따르겠느냐?”하고, 옷을 벗어 던져주며 “나를 따라 올 사람은 이 옷을 입어라.”고 말했다. 기별이 울면서 옷을 입고 말하기를 “주인이 이미 충신이 되었는데 종이 어찌 충노가 되지 않겠습니까?”하고 마침내 진중에서 같이 죽었다. 시신을 찾아 보니 그의 주인 곁에 있었다. -동경잡기-

조선시대는 엄격한 신분사회였다. 옥동과 기별은 노비이지만 전장에서 정무공과 함께하고 정무공과 함께 죽음을 맞이한 노비이기 때문에 충노라 불렀다. 당시 사람들은 후세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당시 경주부 지방지인 동경잡기에 옥동과 기별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기록해 두었다. 또 문중에서는 충노각과 표지석을 세우고 정무공 사후 지금까지 끊기지 않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정무공 후손들이 12대 진사를 배출하면서 300여 년 동안 부를 유지할 수 있었고, 춘궁기가 되면 10리 안 백성들이 굶지 않게 할 수 있도록 곡식을 나눌 수 있었고, 최준 선생이 일제강점기 시절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위한 독립자금을 보낼 수 있었고, 수운 최제우 선생이 동학 창도 후 데리고 있던 노비를 수양딸과 며느리로 받아 줄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글·사진 : 김성대 신라문화동인회 부회장. 교사. >

용산서원과 충의당. 내남면 행정복지센터 인근에 있다.
용산서원과 충의당. 내남면 행정복지센터 인근에 있다.

용산서원 찾아가기 : http://kko.to/5GOEqC8fRV

충의당 찾아가기  : http://kko.to/22HaZdoaD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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