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주년 3.1절 특별기획] ② 경주만세운동 현장 '경주읍장터'서 독립정신 기려...박상진의사 묘 등 참배
[제99주년 3.1절 특별기획] ② 경주만세운동 현장 '경주읍장터'서 독립정신 기려...박상진의사 묘 등 참배
  • 김종득 기자
  • 승인 2018.03.02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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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9년전 경주만세운동 현장에서 참가자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다. 경주포커스는 역사의 현장임을 알리는 표지물을 제작해 부착했다.

역사의 현장에서 만세운동 참가자들의 숨결 느껴
제99주년 3.1절을 맞아 경주포커스가 주최한 <경주 3.1독립만세 및 항일독립운동 사적지>순례가 19명의 시민들이 참가한 가운데 1일 하루동안 진행됐다.

오전 9시 황성공원을 출발한 전세버스가 첫 번째 방문한 곳은 99년전 3.1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경주읍장터.
현재 경주경찰서와 제일교회등이 있는 이곳 네거리는 국가보훈처가 국내항일독립운동 사적지로 지정한 곳이기도 하다.

경주도동리교회(현재 제일교회) 박내영목사를 비롯해 윤기효, 박문홍 영수등이 신도들과 1919년3월11일과 12일 이틀동안 도동리 교회당에서 모임을 갖고 경주큰장날인 3월13일 거사하려던 계획은 일경에 의해 발각되면서 실패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거사를 함께 모의했던 애국청년 박봉록, 서봉룡, 박문훈, 최성렬 선생등은 12일밤 박문홍 선생의 집에서 만든 태극기를 앞세우고 경주작은장날인 15일 오후 3시30분 경주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선창했으며, 시민들이 호흥하면서 경주에서 독립만세 함성이 크게 울려펴졌다.

이 뜻깊은 장소를 방문한 순례단은 ‘1919년 3월15일 독립만세 운동의 현장’임을 알리는 작은 팻말을 붙이고 대한독립만세, 그날의 뜨거운 함성을 재연했다.

100주년이 되는 내년 3월1일에는 반드시 경주시민들의 힘으로, 역사의 현장임을 알리는 작은 기념조형물을 설치하자는 결의도 다졌다.

▲ 참가자들이 경주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경주장터 현장에서 경주포커스가 제작한 팻말을 들고 기념촬영했다.
▲ 경주만세운동 현장.

두 번째 방문한 곳은 내남면 노곡리 박상진(1884년 12월7일~1921년8월11일) 의사묘.
경주시 외동읍 녹동리에서 나고 자란것이 분명하지만, 울산 북구 송정동으로 출생지 논란이 정리되면서 경주시 행정기관과 시민들의 무관심속에 사실상 방치되고 있는 곳.

▲ 박상진의사의 묘를 참배하고 있다.
▲ 박상진의사의 묘.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한 박상진 의사는 법조계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판사’로도 공인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1915년 혁명적 독립운동단체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총사령으로서 독립군 양성과 군자금 모집, 친일모리배 처단등의 활동을 벌였던 박 의사는 1918년 일경에 체포돼 사형을 언도받고 4년동안 옥고를 치르다 1921년 8월11일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돼 순국했다.
1963년 정부가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한 박상진의사의 묘에서 순례단은 '경주겨레하나'에서 준비한 꽃과 술을 바치며  그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기렸다.


세 번째 방문한 곳은 건천읍 송선리에 있는 일천 정수기 선생(1896년4월24일~1936년1월10일) 의 기념비.

▲ 일천 정수기 선생 기념비에 조현우군과 남수현씨가 헌화하고 있다.
▲ 일천 정수기 선생 기념비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선생은 건천읍 출신으로, 경북 일대에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경북 유림의 원로 김창숙과 연락을 취하며 구국운동을 전개했다.

선생은 1922년 북경의 김창숙을 만나 독립운동 참가를 협의한후 1923년 입국하여 독립군 양성을 위한 거액의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다 1927년 일경에 체포돼 2년 6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갖은 고문으로 불구의 몸으로 출소했으나 40세의 나이에 순국했으며,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선생의 기념비는 독립운동 관련 현충시설로서 경주지역에서는 최초로 1968년 건립됐다.
건천읍 체육회가 매년 8월15일 추모행사를 해오는 곳이기도 하다.

서부영화 활극보다 더한 세금마차 습격사건

▲ 일제의 세금수송 마차를 습격한 '경북 우편마차 습격의거지'인 효현교 인근에서 당시를 회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 세금수송마차 습격사건을 보도한 매일신보 1915년 12월26일자 신문<사진=국가보훈처>

선생의 기념비를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보훈청이 '소태고개 경북우편마차 습격의거지'로 이름붙인 곳에 잠시 내려 당시를 상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경북우편마차 습격사건은 박상진 의사가 조직한 대한광복회 회원인 권영만과 우재룡이 1915년 12월24일 새벽 일제가 경주, 영일, 영덕 등지에서 거둔 세금을 대구로 수송하는 마차를 습격한 사건.
그날 새벽 광명리 효현고개와 소태고개에서 마차를 기습해 군자금 8700원을 확보한 사건이다.

소태고개는 넓어지고, 효현교가 건설된 이곳은 2010년 독립기념관이 발간한 항일독립운동 사적지 보고서에서‘소태고개-경북우편마차 습격의거지’로 지정해두고 있다.
일부 참가자들은 당시 습격사건에 대한 설명을 듣고는 “마치 서부영화를 보는것 같다”며 “영화로 만들만한 좋은 소재가 되겠다”는 평을 하기도 했다.
기자는 당시 애국지사들의 담대하고도 용맹한 활약상을 직접 보는듯한 감상에 빠지기도 했다.

이어서 네 번째로 방문한 곳은 일성 조인좌 선생의 묘.
선생의 묘는 금장대 위쪽 산정상부에 자리하고 있다.
묘소로 향하는 길에 금장대 암각화를 보기도 하고, 금장대에서는 전날 내린비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형산강의 풍광을 감상하기도 했다.

▲ 조인좌 선생의 묘를 참배하고 있다.

일성 조인좌 선생(1902년 ~1988년)은 일제 강점기를 거쳐 현대사에 걸쳐 활동한 경주의 대표적인 애국지사이자 사회운동가다.
경남 함안이 고향인 선생은 1919년 만세운동때 고향에서 선봉에서 활약했고, 1926년 광복단에 입단해 독립군 군자금 모금 활동으로 옥고를 치렀다.  1935년 경주에 정착했다.

부용당한양방의 전신인 대덕당 한역방을 개원해 지역사회에 봉사했고, 수익금은 독립군 군자금으로 송금했다.
한국전쟁중에 불교계 첫 고아원인 대자원을 설립해 수많은 전쟁고아들을 보살폈으며, 시립국악원, 경주서도학원, 경주기술고를 설립해 교육사업사업을 펼치기도 했다.

선생의 묘에서 헌화, 헌작한뒤 지난해 황성공원 시립도서관 입구 건립한 기적비 참배를 끝으로 항일독립운동 관련 사적지를 모두 마쳤다.

▲ 지난해 건립한 조인좌 선생 기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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