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주년 3.1절 특별기획] ③감포읍 나정리 출신애국지사 김봉규 선생, 군자금 모집활동중 일본인 경찰관살해...4년간 옥고
[제99주년 3.1절 특별기획] ③감포읍 나정리 출신애국지사 김봉규 선생, 군자금 모집활동중 일본인 경찰관살해...4년간 옥고
  • 김종득 기자
  • 승인 2018.03.05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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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포읍 나정고운모래 해수욕장 입구에 건립된 김봉규 선생 공적비.
감포읍 나정리 출신의 독립운동가 한송 김봉규 선생(1892.8.20~1968.2.3)의 공적비가 제99주년 3.1절을 맞아 지난 1일 제막했다.
감포읍 나정고운모래해수욕장 입구에 있는 선생의 공적비는 경주시와 경북도가 각각 2500만원의 예산을 들여 조성했다.
선생의 공적비는 그의 생가(감포읍 나정리 21-5번지)와는 불과 50m거리의 지척에 있어 그 의의를 더했다.

선생의 생가에는 종손부 정연옥씨가 살고 있다.

군자금 모금 활동중 연행 일경 살해후 중국으로 망명...그후 임정 밀서 전달후 국내서 체포 옥고

▲ 항일애국지사 고 김봉규선생. 1963년 대통령 표창장을 받고 기념 촬영한 것이다.
선생은 1920년대 경주 출신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였다.
국가보훈처의 공훈록, 그의 가족들이 일제 재판 기록등을 통해 수집한 선생의 활동은 이렇다.

감포읍 나정리가 고향인 선생은 1919년 9월 대구에서 송두환, 김종철, 노기영, 정래영, 최윤동, 이수영, 정동석등과 함께 독립운동 지하단체 결성에 참여했다.상해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 및 일본과 관련한 모든 비밀 조직을 수집, 상해 임시정부에 송금, 보고하는 활동을 했다.

1920년 12월6일 선생은 양북 출신의 김종철 선생(그후 만주에서 행방불명. 기사 하단 별도 박스 참고)과 함께 군자금 모집을 위해 경남 합천군을 방문한다.
자동차로 대구를 출발하여 6일 정달락의 집 근체서 숙박한뒤 7일 오전9시께 상백면 우조리 정달락의 집을 방문, 군자금 1만원 제공을 요구했으나 “가옥 건축중이라 현금이 없다”는 말을 듣고 40원을 빼앗았다.

이어 12월8일 경남 의령군 유곡면 칠곡리 남정구 집에 침입, 군자금 협조요청을 했다.
그러나 이들을 미행하던 일본군 순사부장 갑비((甲斐))와 한국인 손기수에게 체포돼 의령경찰서 신촌주재소로 연행되던 도중 선생은 권총 2발, 김종철선생은 1발로 갑비를 사살하고, 손기수에게는 부상을 입히고 도주했다.
그후 도보로 3일동안 피신한 끝에 대구에서 만난 두분의 애국지사는 만주로 망명했다.
김봉규 선생은 그후 1924년 임시정부의 밀서를 휴대하고 국내에 잠입했으며, 임무를 마치고 고향에 잠깐 다니러 왔다가 일경에 체포됐다.
조선총독부 대구 제3경비부 감포 주재소에서 체포돼 대구로 압송된 선생은 모진 고문을 받고 그해 11월6일 징역 4년을 언도 받고 옥살이를 했다.

4년간 옥고를 치런뒤에는 평생 고향 나정리에서 살며  고향발전에 헌신했다.
정부는 1963년 대통령 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해 선생의 공적을 기렸다.

1970년대 새마을 사업 초가지붕 개량과정서 선생이 기록한 독립운동 기록 발견

▲ 김봉규 선생의 손부 정연옥여사가 선생의 사진을 들고 회고 하고 있다.

▲ 선생의 후손들은 판결문 사본등을 번역한뒤 책으로 묶어 가족들이 모두 알수 있도록 공유했다. 손부 정연옥 여사가 보관하고 있는 판결문 사본등 각종 기록.
선생의 장손 고 김영길씨의 부인 정연옥 여사(71.선생의 손주며느리)는 남편 김영길씨, 가족들로부터 선생의 성품에 대해 “성격이 워낙 강직한분으로만 들었다”고 했다.
때문에 76세를 일기로 타계할때까지 지독한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고 전했다.

선생이 타계한 직후인 1969년 선생의 장손인 고김영길씨와 결혼하면서부터 선생의 생가에서 살고 있는 정여사는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는 과정에서 있었다는 아찔한 일화도 들려주었다.

1963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으나 표창장은 그후 분실했다.
당시까지 집안에 전해오던 것은 1963년 3월1일 대통령 표창장을 받고 기념촬영한 것이 전부였다.
선생이 생전에 기록해 둔 항일투쟁일지의 존재는 가족 모두 까마득히 몰랐다고 한다. 
그러나 뜻밖의 과정에서 독립운동 관련 기록물을 발견했다.

1970년대 초반, 당시 활발히 전개되던 새마을운동이 감포읍 나정리에서도 벌어졌고, 선생의 생가 초가지붕을 개량하는 과정에서 처마 아래에 보관해둔 여러 자필 기록물이 발견된것.
그 기록물을 국가보훈처등 행정기관에 제출하고서야 1977년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받았다.
당시의 기록물은 정부에 모두 제출하고 현재는 단 한점도 남지 않았다. 

생가 보이는 곳 묘지..공적 기록한 묘비 건립때 월성군과 보훈청은 각각 45만원씩 쥐꼬리 보조

▲ 김봉규 선생의 묘. 묘비는 1984년 건립한 것으로 전한다.
선생은 고향에서 타계한뒤 생가에서 약 1㎞남짓 떨어진 포월산 선산에 묻혔다.
전촌해수욕장에서 4번국도를 따라 경주방면으로 약 800m 가량 양지바른 산자락에 위치한 묘지는 선생의 생가가 먼발치로 보이는 곳이었다.

선생의 후손들은 1984년 묘지에 공적을 기록한 묘비를 건립했다.
가족들이 쓴 기록에는 당시 월성군에서 45만원, 보훈청에서 45만원을 보조금으로 지급한 것이 전부였다.
나머지는 장손 김영길씨가 450만원, 선생의 차남 김남원씨가 210만원을 부담한 것으로 전한다.
국가보조금보다 후손들이 훨씬 더 많이 부담해 묘비를 건립했던 것이다.

판결문 사본을 법원으로 부터 제출받아 일일이 번역하고, 기록한 것도 선생의 후손들이었다.
그 덕분에 자칫 묻힐뻔 했던 김봉규 선생의 항일 독립운동은 비교적 상세하게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국가 보훈처 공훈록에는 ‘대구 일대를 중심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령에 따라 군자금 조달활동을 전개했다’는‘ 일본경찰 갑비(甲斐)가 그와 김종철을 체포하려 하자 동지 김종철(金鍾喆)이 일경을 사살하고 함께 도피했다’는 내용의 짧은 기록이 전부다.

만약 김봉규 선생의 초가지붕 개량과정에서 선생이 간직했던 기록물을 발견하지 못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경주출신의 항일 독립운동가, 애국지사들의 발자취를 더 많이 발굴하고 후세들에게 바르게 알리는 것은 더이상 독립운동가 가족, 후손들만의 몫일수는 없는 일이다. 
당연히  우리 경주사람 모두의 과제여야 하고, 순국 선혈들과 애국지사의 피땀으로 수립한 정부가 응당 해야 할 몫이다.
지난해 부임직후부터 감포읍 출신의 독립운동가 공적비 건립에 앞장서, 지난해 8월 추경예산 확보를 통해 정래영선생 공적비를 건립하고, 올해는 아예 당초예산으로 확보해 김봉규 선생의 공직비를 건립함으로써 감포읍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의 공적비를 모두 건립한  최병윤 감포읍장은 그런점에서 칭찬 받아 마땅한 일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 지난해 건립한 정래영 선생 공적비

▲ 김봉규 선생의 후손들이 보관하고 있는 판결문 사본에는 깅봉규선생과 함께 옥고를 치런 감포읍 팔조리 출신의 정래영선생에 대한 신상기록이 나란히 보인다.

김봉규 선생이 연루된 군자금 모금 활동은 1919년 시작됐다. 당시 대구에서 지하조직 결성당시 10명이 참여했으며, 이 가운데 경주출신의 애국지사가 무려 3명이나 참여한 것으로 확인된다.
지난해 공적비가 건립된 감포읍 팔조리 정래영선생, 양북면 용당리 김종철선생, 감포읍 나정리 출신의 김봉규 선생이다.
감포읍 팔조리 출신 정래영 선생은 선생과 함께 징역 1년6월형을 선고 받고 복역했다.
또한명의 이 지역 출신, 양북면 용당리 출신 김종철 선생은 김봉규 선생과 함께 일본인 경찰 갑비를 사살한 직후 만주로 탈출한뒤 임시정부가 있던 상해로 가서 김원봉(金元鳳)·이종암(李鍾岩) 등이 조직한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한 것으로 전한다.

상해·만주 등지를 왕래하면서 1928년까지 항일운동을 전개한 김종철 선생은 김좌진 장군 휘하의 청산리 전투에 참가하는 등 활발한 독립운동을 벌였다고도 전한다.

김봉규선생등의 군자금모금 활동은 경북지역에서 독립군자금 모금활동을 벌였던 '경북 제2 유림단 의거'로도 국가보훈처는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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