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경주시경계탐사] 제2구간 -외동읍 모화리, 양남면 신대리 지명유래
[제2차 경주시경계탐사] 제2구간 -외동읍 모화리, 양남면 신대리 지명유래
  • 경주포커스
  • 승인 2023.02.23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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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시 경주시 경계(파란색 실선)를 따라 수많은 공장이 밀집해 있다. 사진 국토지리정보원
울산시 경주시 경계(파란색 실선)를 따라 수많은 공장이 밀집해 있다. 사진 국토지리정보원


◾경주시 최남단 외동읍

경주시 외동읍은 경주 최남단에 위치해 있다. 동쪽으로는 양남면, 남쪽으로는 울산광역시, 서쪽으로는 내남면에 접해 있다.

김성대.
김성대.

신라시대는 신라 6부인 취산 진지촌에 속했다. 1984년 이전에는 경주부 동면과 서면이라 불렀다. 1905년 동면과 서면을 합하여 41개 리를 관할하는 외동면으로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으로 17개 리를 묶어 외동면으로 불렀다. 1980년 외동읍으로 승격되었다.

현재 외동읍에는 ①개곡리 ②괘릉리 ③구어리 ④냉천리 ⑤녹동리 ⑥말방리 ⑦모화리 ⑧문산리 ⑨방어리 ⑩북토리 ⑪석계리 ⑫신개리 ⑬연안리 ⑭입실리 ⑮제내리 ⑯죽동리 ⑰활성리가 속해있다.

입실, 연안, 냉천, 구어리 한가운데 있는 봉우리인 애기봉은 외동읍의 상징 같은 곳이다. 외동인 고향인 사람들에게는 어머니 같은 산이라고도 할 수 있다.

청동기 시대 지석묘와 선돌(석계리)을 통해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이곳에서 터를 잡고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신라 문화를 상징하는 감산사 터 삼층석탑(괘릉리), 원성왕릉(괘릉리), 영지 석불좌상(괘릉리), 숭복사 터 귀부(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있음)와 삼층석탑(말방리), 원원사 터 삼층석탑(모화리), 석불입상(활성리) 등 문화재들이 있다.

지금의 7번 국도를 중심으로 신라시대에 왕릉을 조성하고, 절을 세우고, 관문을 만들고, 성벽을 세웠다. 이는 수도 서라벌을 침입하는 적으로부터 지키고 지금의 울산을 통해 많은 나라들과 교류한 아주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외동읍은 공업도시 울산광역시에 인접하여 울산광역시의 배후도시처럼 변하고 있다. 포항과 울산을 잇는 7번 국도의 확장, 경주와 울산을 잇는 자동차 전용도로 개설로 교통도 굉장히 발전하였다. 상전벽해처럼 각 마을과 골짜기들이 조용한 농촌 마을에서 공장 개발로 몸살을 앓고 있다.
<글 김성대 신라문화동인회 부회장. 교사>

◾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삭발하고 머리는 불태우고...

신라시대 불가에 귀의하는 사람이 모벌군성 성문에 이르러 삭발(毛伐) 하고, 머리털을 불태운(毛火) 다음 불국사 안으로 들어갔다고 하여, 모벌(毛伐) 혹은 모화(毛火)라고 하였다.

◾ 경주시 양남면 신대(新垈)리

신대리는 서쪽은 삼태봉, 동쪽은 상계리, 남쪽은 울산 농소 그리고 강동면의 경계 지점이다. 옛날 외동읍으로 가는 국도변이라 교통이 편리하고 또 만리성재로 통하는 재만리에 옛날 숯방이 있었다.

◾ 마을의 역사임진왜란 후 파평윤씨가 개척할 때 새로 지은 집터라하여 신대라 하였고, 이 성내에 어전리(於田里)는 팔송지라고도 하며, 외동읍으로 갈려면 만리(万里)재를 넘기 위하여 어정거린다 하여 어전이고, 옛날 소나무 여덟그루(8樹)가 있었다하여 팔송지(八松地)라고 한다.

건대(乾臺) : 동네 앞에 건대라는 산이 있어 옛부터 건대로 불리고 있다.

숯방(炭坊) : 옛날 숯을 생산하던 곳이라 숯방직, 숯방(炭坊)이라 한다.

토방(土坊) : 옛날 이 동네의 흙을 가지고 솟뿌리 공장을 하였다하여 토방(土坊)이다. 특히 신라의 성덕왕께서는 각평원진(角平元眞)을 시켜 장정 39,262명을 동원하여 해발 650m, 길이 2,039m의 성곽을 쌓아 왜적을 격퇴시킨 만리성이 바로 신대리이다. <경주시청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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