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경주시경계탐사] 제2구간 양남면 신대리~외동읍 모화리 경계주변 가 봐야 할 곳 ①관문성
[제2차 경주시경계탐사] 제2구간 양남면 신대리~외동읍 모화리 경계주변 가 봐야 할 곳 ①관문성
  • 경주포커스
  • 승인 2023.02.23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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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때는 왜구막고 임진왜란때는 경주 울산 의병들의 경주 남쪽 지킴이 성
관문성(신대리산성, 기박산성)
관문성(신대리산성, 기박산성)
관문성과 소나무.
관문성과 소나무.
외동읍 모화리 관문성 문터.
외동읍 모화리 관문성 문터.

글, 사진 : 김성대 (교사. 신라문화동인회 부회장)

경주시 양남면 신대리 지금의 마우나리조트 부근에 있는 산성은 경주시에서는 관문성, 울산광역시에서는 기박산성으로 부르고 있다.

관문성은 이곳에서 시작하여 지금의 경주와 울산의 경계를 따라 7번 국도 모화리에 있는 문(門) 터와 14번 국도 녹동리에 있는 문(門) 터를 지나 치술령까지 이어져 있다. 경주와 울산의 경계를 나눌 때 이 관문성을 기준으로 나누었음을 알 수 있다.

모화리에 있는 문 터는 경주와 울산을 잇는 현재의 7번 국도가 확장되면서 많이 훼손되었으나 최근에 성벽을 복원하였다.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동해남부선이 지나면서 더욱 훼손된 것 같다. 세월이 지나면서 많이 허물어져 그 형태를 찾기 어려우나 효청보건고등학교 부근에서 옛 성벽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녹동리에 있는 문 터는 경주 녹동리와 울산 울주군 범서읍을 잇는 14번 국도가 지나간다. 옛 관문의 모습을 찾을 수 없으나 성벽이 낮게 남아 있다.
 

관문성 위치도. 박방룡.
관문성 위치도. 박방룡.

경주시에서 설치한 안내판은 다음과 같다.

관문성은 울산광역시와 경상북도 경주시의 경계를 따라 돌로 쌓은 산성이다.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경주를 보호하기 위해 신라 성덕왕 21년(722)에 만들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당시 최고위 벼슬의 하나였던 각간(角干)을 지낸 원진(元眞)이 39,262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이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관문성이라는 이름은 경주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한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원래 모벌군성(毛伐郡城), 모벌관문(毛伐關門)이라 불렀는데 조선시대에 관문성으로 부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약 12㎞에 이르는 긴 길이 때문에 만리성(萬里城)으로도 불렀다. 성벽은 길이 40~50㎝, 두께 20~30㎝의 다듬은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돌을 쌓는 방식은 위쪽으로 갈수록 층지게 들여쌓는 물림쌓기를 방식이다.

울산광역시에서 기박산성(旗朴山城)의 명칭 유래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제월당실기』, 『용사일록』에 의하면 기박산성 의병들은 1592년 4월 23일 ‘사명청도(司命淸道)’라 쓴 붉은 색의 대장기를 세우고 그 주의를 둥글게 원을 그리며 각 의병장을 나타내는 기를 세웠다. 이와 함께 동·서·남·북·중앙의 방위를 나타내는 다섯 개의 기, 즉 오방기(五方旗)를 설치했다.
또한 전설의 인물인 치우(蚩尤)를 그린 깃발도 세웠다. 이헐게 많은 기가 세워진 광경은 당시 울산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이에 따라 산성이 자리 잡은 언덕배기를 임란이후부터 기배기로 부르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박은 배기의 음가를 한자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배기는 고갯마루 즉 고개의 가장 높은 곳을 뜻하며 한자로는 령(嶺)이다.

이 산성은 삼태봉에서 남쪽으로 뻗어 나온 해발 536~585m에 달하는 3개의 봉우리와 골짜기를 둘러싼 타원형 석성으로 울산광역시 중구 중산동 및 경주시 양남면 신대리에 걸쳐 있다. 기박산성, 신흥산성, 함월산성, 신대리성으로도 불린다.

서쪽과 북쪽의 성벽은 많이 무너져 내렸고 동쪽과 남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는 편이다. 지금까지 10개의 명문이 새겨진 성돌이 확인되었으며 문 터 5곳(동, 서, 남, 북문 터 4곳과 현재의 남문 터 1곳, 건물지 14곳, 대점봉수대 터, 배수구 3곳, 집수지 1곳 등이 확인되었다.
 

骨估 南界/居七山 北界/受地七步一尺 명문이 새겨진 성돌
骨估 南界/居七山 北界/受地七步一尺 명문이 새겨진 성돌
熊 南界/骨估 北界/受地四步一尺/八寸 명문이 새겨진 성돌.
熊 南界/骨估 北界/受地四步一尺/八寸 명문이 새겨진 성돌.

관문성의 모화리 문 터·녹동리 문 터와 성벽들은 신라 멸망 후 그 기능과 역할이 없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허물어진 것 같다.
그러나 신대리에 있는 산성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기와 조각이 발견되므로 성이 만들어진 신라시대 이후에도 고려, 조선시대까지 산성으로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양남면 동해안 일대와 남쪽 울산만과 서쪽 모화리 일대를 동시에 관망할 수 있는 지형적 조건을 갖춘 동해안 방어의 전초 기지임을 알 수 있다.

*3월탐사신청은 3월2일부터 경주포커스 홈페이지에서 접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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