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차 경주시경계탐사] 가볼만한 곳 ③ 최치백 정려비
[제7차 경주시경계탐사] 가볼만한 곳 ③ 최치백 정려비
  • 경주포커스
  • 승인 2023.07.24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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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차 경주시경계탐사] 가볼만한 ③ 최치백 정려비

 

내남면 이조리에서 박달리로 향하는 904번 지방도로변에 있는 최치백 정려비.
내남면 이조리에서 박달리로 향하는 904번 지방도로변에 있는 최치백 정려비.
도로와 인접해 있는 최치백 정려비와 비각.
도로와 인접해 있는 최치백 정려비와 비각.
정려비 앞면.
정려비 앞면.
정려비 뒷면.
정려비 뒷면.
당대 명필 이광사가 글을 썼다고 적혀 있다.
당대 명필 이광사가 글을 썼다고 적혀 있다. 이광사의 본관은 전주. 자는 도보(道甫), 호는 원교(園嶠) 또는 수북(壽北). 아버지는 예조판서를 지낸 전주이씨 이진검(李眞儉)이다. 영조의 등극과 더불어 소론이 실각함에 따라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였다. 조선후기의 명필로서 윤순(尹淳)[1680~1741]에게서 글씨를 배워 진서(眞書)·초서(草書)·전서(篆書)·예서(隸書)에 모두 능하였다. 원교체(圓嶠體)라는 특유한 필체를 이룩하여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하고 집대성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최치백(1676~1744)의 효행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1752년(영조 28년)에 세운 정려비이다.
앞면에는 ‘효자 증조봉대부사헌부지평최공치백정려비(孝子 贈朝奉大夫 司憲府 持平 崔公 致栢 旌閭碑)’라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최치백이 7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를 지극히 모시니 그의 효행이 정성스러워 믿을 수 없게 꿩을 구한 신비스러운 이야기와 조선 20대 왕인 경종(1688~1724)이 승하하시자 3년 동안 상복을 입은 이야기와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용맹이 나가 싸운 이야기를 기록해 두었으며 당시 부제학인 ‘오수채(吳遂采)’가 글을 짓고 당대 명필가인 ‘이광사(李匡師)’가 글을 썼다고 새겨져 있다.

유교 국가인 조선이 국가를 다스리는데 효와 충은 중요한 덕목이다. 마을 사람들이 잘 다니는 곳에 정려비를 세워 많은 사람이 이를 본받도록 했다. 시대는 변했다. 그러나 조상을 받들고 나라를 사랑하는 근본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정려각은 도로가 넓게 나고 높게 나 방치된 것 같다. 또 관리가 되지 않아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있다. 시급히 옮겨 잘 보존해야 될 것 같다. 글 : 김성대 신라문화동인회 부회장(교사)

▶가는길

최치백 정려비 위치도.
최치백 정려비 위치도.

경북 경주시 내남면 상신리 551-4.
이조리, 덕천리를 지나 나오는 광석교에서 약 1.5㎞거리에 있다.
904번 지방도를 따라 박달리 방향으로 계속 이동하면 만난다.  상신2리 마을회관을 왼쪽에 두고 500m 정도 박달방면으로 더 이동하면 나온다.
비와 비각은 도로와 붙어 있다. 도로에서 1미터 아래 텃밭에 있다.
비는 반듯 했지만, 비각은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 허술했다.
흔한 안내판도 하나 없다.
멀리서부터 유심히 살피면 도로 오른쪽으로 비각이 눈에 겨우 들어올 뿐이다. 
내남면 안심리 암각화, 광석리 지석묘군에서 자동차로 5분 정도만 이동하면 만난다. 글 사진 : 김종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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