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경주시경계탐사] 경계주변 알아보기 - 경주 동남쪽 끝 양남면은....
[제1차 경주시경계탐사] 경계주변 알아보기 - 경주 동남쪽 끝 양남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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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2.03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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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양남면.
경주시 양남면.

조선시대 경주부에 속해 동해면이던 양남면은 1895년 부제개편때는 경주군 동해면으로 불렸다.  
그러다 지금의 양남면으로 명칭이 바뀐 것은 1906년이다. 이때는 장기군 양남면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탈취한 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하고 몇 번의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게 된다.
이른바 월경지 정리라는 이름으로 각 군의 월경지와 땅거스러미들을 실제 생활권과 군역의 형태를 고려해 정리했다.
각 지방 관아가 관리를 쉽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

*땅거스러미 : 비공식적인 지리학 용어로 국경을 포함한 행정 구역의 경계선에서 한 쪽의 경계선이 좁고 긴 꼬리모양으로 다른 지역으로 파고들어 있는 모습의 땅을 가리킨다. 돌출지(突出地) 또는 돌미지(突尾地)라고도 한다.(위키백과)

지금의 양남면의 행정구역은 이때 정리된 모양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1910년 합병을 통해 조선의 국권을 완전 박탈한 일제는 1914년, 통치 효율성을 위해 본격적으로 대규모 행정구역 개편을 다시 단행한다.
이른바 부군면 통합이다.

조선총독부가 주도한 부군면 통합은 오늘날 대한민국 기초 행정구역 명칭과 영역, 경계선의 틀을 이루고 있다. 
양남면은 1914년 부군면 통합으로 장기군에서 다시 경주군에 귀속됐다.

조선 8도 체제에서 남북도로 나눠진 것은 1896년어었다.
양남면과 울산시 북구의 경계는 이 시점에 어느 정도 구획되었고, 1914년 부군통합때 획정된 것이다.  2022년 12월말 현재 양남면 인구는 3,552세대 6324명. 세대당 인구수가 1.78명이다.
 

양남면 연혁과 경계주변 마을의 지명유래

<양남면>

신라시대 : 신라6부의 하나인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에 속함
고려(984년) : 성종3년 삼경의 하나인 동경에 속함
조선(1413년) : 태종13년 경주부에 속함
1895년 : 경주군 동해면으로 개칭
1906년 : 경주군 지역편성시 장기군 양남면으로 개칭
1914년 : 부군 통폐합에 따라 경주군에 귀속
1953년 : 15개 법정리동 22개 행정리동으로 나눔
1955년 9월1일 : 경주읍이 시로 승격, 군명칭을 월성군으로 개칭. 월성군 양남면으로 개칭
1987년 1월1일 : 문무대왕면 봉길리 일부(월성원전부지) 양남면 편입
1989년 1월1일 : 월성군을 경주군으로 개칭
1995년 1월1일 : 통합 경주시 출범. 경주시 양남면으로 개칭

수렴(水念)리

수렴리 포구.
수렴리 포구.

◾ 마을의 자연환경

수렴리는 경주의 최동남 해안의 울산강 동쪽에 접한 동해의 해변 마을이다. 서쪽은 환서, 북쪽은 하서리와 접하며 해안바위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수영포, 관성, 영암, 지경 4개 부락으로 형성되고 1리, 2리로 구분되었다. 어업이 주업이나 농경지가 좋아 농사하는 사람도 많다. 그리고 옛날 왜적의 침입이 많은 곳이라 성질이 강하며 성공한 사람이 많이 있다.

◾ 마을의 역사
임진왜란 때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수병의 병영을 가졌던 곳이라 하여 수영포리라 하였는데 1914년에 행정리명을 수렴리라 하였다.

관성(觀星) : 옛날 시계가 없을 때에 별을 보고 시간을 측정하는 첨성대같은 것이 있었다하여 관성이라 함.
영암(靈岩) : 바위에 매년 무사고 제를 올린다 하여 영암인데 3년마다 별신굿도 한다.
지경(地境) : 경상북도의 지역경계라 하여 지경이라 부르고 있다. 여기굼바위. 그무바위 등의 주위의 바위를 이용하여 미역, 전복 등의 양식업을 하고 있다.

서동(瑞洞)리

◾ 마을의 자연환경

서동리는 남쪽이 울산 강동면에 인접하고, 북쪽은 신서리, 서쪽은 상계리, 동쪽은 수렴리를 경계로 자연환경이 좋아 농촌으로서의 경치가 좋은 곳이다.

◾ 마을의 역사
장기군 양남면 서동으로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서동리라 하고 경주군 양남면에 편입되었다. 신라시대부터 서부 상측에 위치하였다하여 웃서라고 하였고, 서쪽 1.5km 지점에 관문성이 개축되어 있어 전시에는 군인들이 적을 방어하고, 평상시에는 군인들이 부락에 와서 영농을 하였다하여 둔전리(屯田里)라고 하여 오던 중 1914년 부군통폐합시에 서동리(瑞洞里)로 되어 지금까지 오고 있다.

◾ 마을의 유적
안산 : 서동마을 앞에 있는 산으로, 전설에 의하면 옛날 어느 여인이 빨래를 하러 가다가 이 산이 동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 "산도 걸어갈수 있느냐?"고 하자 산이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마을의 지명

고짓골 : 서동 동쪽에 있는 골짜기|
광징이고개 : 광징이에 있는 고개로 광징이에서 울산광역시 강동동 신명리로 넘어간다.
광징이 : 서동 남쪽에 있는 넓은 골짜기
당미기 : 서낭당이 있던 고개로 진등 남쪽에 있다.
덕골 : 과목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못골 : 못이 있는 골짜기로 서동 서남쪽에 있다.
어구절골 : 어귀사라는 절이 있던 골짜기
절골 : 절이 있던 골짜기로 광징이 동쪽에 있다.
진등 : 못골 서남쪽에 있는 등성이
피낫골 : 덕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신대(新垈)리

◾ 마을의 자연환경
신대리는 서쪽은 삼태봉, 동쪽은 상계리, 남쪽은 울산 농소 그리고 강동면의 경계 지점이다. 옛날 외동읍으로 가는 국도변이라 교통이 편리하고 또 만리성재로 통하는 재만리에 옛날 숯방이었으며 환경 좋은 곳이다.

◾ 마을의 역사
임진왜란 후 파평윤씨가 개척할 때 새로 지은 집터라하여 신대라 하였고, 이 성내에 어전리(於田里)는 팔송지라고도 하며, 외동읍으로 갈려면 만리(万里)재를 넘기 위하여 어정거린다 하여 어전이고, 옛날 소나무 여덟그루(8樹)가 있었다하여 팔송지(八松地)라고 한다.

건대(乾臺) : 동네 앞에 건대라는 산이 있어 옛부터 건대로 불리고 있다.
숯방(炭坊) : 옛날 숯을 생산하던 곳이라 숯방직, 숯방(炭坊)이라 한다.토방(土坊) : 옛날 이 동네의 흙을 가지고 솟뿌리 공장을 하였다하여 토방(土坊)이다. 특히 신라의 성덕왕께서는 각평원진(角平元眞)을 시켜 장정 39,262명을 동원하여 해발 650m, 길이 2,039m의 성곽을 쌓아 왜적을 격퇴시킨 만리성이 바로 신대리이다.

경주시 양남면 상계리에는 500년 넘는 세월동안 이 마을을 굽어보며 지키는 소나무가 있다. 경주시가 2996년7월10일 보호수로 지정해 관리하는 나무다.고유번호 06-02-01.수령은 무려 560년이 넘었다. 높이 12m 나무 둘레만 1.2m다.

 

경주시 양남면 상계리에는 500년 넘는 세월동안 이 마을을 굽어보며 지키는 소나무가 있다. 경주시가 2996년7월10일 보호수로 지정해 관리하는 나무다.고유번호 06-02-01.수령은 무려 560년이 넘었다. 높이 12m 나무 둘레만 1.2m다.
경주시 양남면 상계리(415번지)에는 500년 넘는 세월동안 이 마을을 굽어보며 지켜 서 있는 소나무가 있다.
경주시가 1996년7월10일 보호수로 지정해 관리하는 나무다.고유번호 06-02-01.수령은 무려 560년이 넘었다. 높이 12m 나무 둘레만 1.2m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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